〈 157화 〉 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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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 밑으로 들어오시려는 거에요?"
"확정적인 사안은 아니에요. 제가 아이데스님 밑에 있는 건 더 좋은 군주를 찾기 전까지만 임시적으로 있는 것이니 제가 아이데스님의 수족으로 완전히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수족처럼 대해드릴 필요도 없겠네요."
가면을 슬쩍 고쳐썼다.
딱히 흘러내리거나 잘못 씌어진 것도 아닌 가면을 굳이 고쳐 쓴 건 앞으로 너에게 내 맨 얼굴을 보여줄 일은 없다고 전하기 위함이었다.
라일라는 머리가 굉장히 좋은 인재다 보니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 정식적으로 내 밑으로 들어오진 않겠지만 이미 마음을 먹고 있다면 나에게 충성맹세를 할 시기를 당겨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제가 아이데스님께 충성맹세를 하면 달라지는 게 생기나요?"
"당연히 생기죠. 어찌 외부인과 내부인을 똑같이 취급하겠어요?"
"뭐가 달라지는 데요?"
"그걸 제가 왜 말씀드려야 하죠?"
라일라의 마음이 어느 정도 나에게 기울었다는 걸 판단한 이상 내가 먼저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었다.
어느정도 뻔뻔하게 나가야 라일라도 나를 만만히 보지 않겠지.
"치사하게, 그냥 말씀해주시면 안돼요?"
둘이서 독대할 때만해도 참 점잖고 고고해 보였던 인간인데 이제는 말괄량이 여식이 따로 없었다.
말도 톡톡튀는 것이 굉장히 얄미웠고 삐지기도 엄청 잘 삐졌다.
"안 됍니다."
"쳇..."
라일라가 입을 쭉 내민채 계속 걸었다.
짐칸에 공간이 남아서 그녀의 가방 정도는 올려놓을 수 있었지만 사람이 탈 수 있는 자리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라일라는 시에린, 안나와 번갈아가면서 남은 한 자리에앉았다 걸었다를 반복했다.
'부득불 앉아서 가고 싶다고 우기면 내 자리를 양보해 주려고 했는데 다행이 그럴필요는 없겠네.'
이것도 남녀역전세계로 인한 현상일 수도 있는 것이 만약 여기가 난세였다면 내가 몸이 아무리 약해도 무조건 앉아서 간다고 했을 거다.
다시 한번 남녀역전 세계 짱짱을 외치면서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 앉았다.
라일라와 나, 둘 다 서로와 대화를 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자 시에린이 라일라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시에린 성격대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친해지려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전문적인 단어가 난무하는 아주 어려운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세력을 운영하는 법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는 걸 보고 있노니 머리가 뽀개질 것 처럼 아파왔다.
"여기서 말이 통하는 분을 만날지는 몰랐어요. 아이데스님의 휘하에 이렇게 뛰어난 분이 계실줄은 몰랐는데요?"
"저야말로 라일라님의 지식에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군략가로 알고 있었는데 내정학도 상당히 깊게 알고 계시군요."
"스승님이 다양한 걸 가르쳐주시는 걸 좋아하시던 분이셨거든요. 전문분야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답니다."
"라일라님이 말씀하시니 전혀 허세로 들리지 않는군요. 아마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분이시겠죠."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던 문장들이었다.
그 뒤로는 또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서 어려운 이야기들만 늘어놓았으니까.
나도 나름 군주학을 배운 만큼 작정하고 분석하려고 하면 못 알아들을 것도 없겠지만 둘이서 편안히 얘기하라고 내버려두고 편하게 누워있었다.
"안나, 다음 목적지가 어디야?"
"오늘 하루 정도는 마을도 안 들리고 계속 걸을 거에요. 최종목적지는 아이데스 마을이 될 예정입니다."
아이데스 마을엔 특산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굳이 아이데스 마을을 들리는 이유는 내가 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랑 여동생한테 인사도 한 번 해야 했고 저번에 영입했던 꼬마 숙녀 한 분을 데리고 오기도 해야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상단 전체의 동선이 꼬이는 상황이었지만 어차피 상단 자체가 내거기도 하고 안나의 능력으로 동선꼬임을 최소화 했으니 깊게 생각할 건 없었다.
"근데 우리 마을에 상단이 잘만한 데가 없어. 여관도 없어서 지나가는 여행자들도 하숙을 해야 하는 곳인데 상단의 인원 전부를 하숙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주변의 쿨리온 영지에서 자면 됩니다. 저녁쯤 도착해서 아이데스님을 내려드리고 다시 아침에 데리러 오지요."
"나는 아이데스집에서 하숙할래!"
"나도."
시에린과 라이넬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알았어. 둘은 우리집에서 자."
"아...아이데스님! 저도!"
"넌 안돼, 상단을 이끌어야지."
"저도 안돼요? 마디안님이랑 이야기 할 거리가 아주 많거든요."
"라일라님은 오셔도 됩니다."
라일라가 먼저 말하지 않더라고 우리집에서 재울 생각이었다.
우리 세력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저만 버림 받는 거에요?"
안나가 울음기 가득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 정도로 넘어갈 정도로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버림 받는 다니,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날 거잖아."
"알았어요..."
안나가 축 처져서 걸었다.
"야 너무 상심하지 마."
쳐져 있는 안나를 시에린이 다가가서 위로해줬다.
시에린의 말빨은 진짜 대단하니까 상심한 안나 정도는 쉽게 위로해줄 수 있겠지.
'오랜만에 잠이나 잘까.'
마차만 타면 잠에 드는 건 나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일이었지만 근래에는 마차에서 자 본적이 잘 없다.
일단 마차자체를 많이 안 타기도 했고 상단의 마차는 외부의 공기와 햇빛에 직접적으로 노출 되는 곳에 사람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잠을 자기 편한 환경이 아니라는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작정하고 잠드려고 하면 자지 못할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을 살포시 감고 햇빛을 즐겼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포근한 햇빛은 붉게 물들어 노을을 형성하고 있는 저녁이었다.
"일어났어?"
순번이 시에린 까지 돌았는지 내 옆자리에는 시에린이 앉아있었다.
"어, 일어났어."
입을 타고 흐르는 침을 닦고 몸을 바로 세우니 익숙한 길이 보였다.
"거의 다 도착했어. 그런데 너 진짜 잘 자더라. 편한 환경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잘 자냐?"
"익숙해 지면 어디서든 잘 수 있어."
"얼마나 잘자는 지 라이넬이 네 얼굴에 낙서하고 있는데도 안 일어나더라."
뭐?
무심코 얼굴을 만지며 라이넬을 바라보니 라이넬은 시에린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세차게 돌리고 있었다.
"난 낙서 같은 거 한 적 없어! 모함이야!"
"안나, 내 얼굴에 낙서 있어?"
안나가 내 뒤쪽에 있는 시에린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 눈쪽을 손으로 가르켰다.
"오른쪽 눈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하나 있어요."
"야! 너까지 그러기야?"
"판다 같은 게 아주 귀여우신데요? 라이넬님이 잘 그리신 거라고 생각해요."
"라이넬... 실망이야..."
"한 적 없다니까?"
길길이 날뛰고 있는 라이넬을 구경하는 맛이 아주 쏠쏠했다.
그렇게 5분정도 웃고 떠들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아이데스마을에 도착했다.
"더 늦으면 쿨리온 성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장사는 내일 아침에 하자."
"저랑 그만큼 빠르게 헤어지고 싶으시다는 뜻이죠?"
"너 걱정한거지 왜 그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니."
"... 알았어요. 내일 아침에 봬요."
안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상단을 데리고 쿨리온 성쪽으로 걸어갔다.
상단이 안 보일 때까지만 서 있다가 마을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온 뒤로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작은 마을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계절의 변화 뻬고는 그대로인 우리 마을을 보며 집으로 걸어갔다.
똑똑
살며시 노크를 하고 기다리니 벌컥하고 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나오셨다.
"아들! 왔어?"
우리 어머니는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다른 애들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꼭 껴안고 빙글빙글 도셨는데 친구들 앞에서 어머니한테 껴안기는 게 상당히 부끄럽긴 했지만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셨을 지도 충분히 이해가 됐으니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빠!"
뒤이어서 여동생까지 나와서 나에게 안겼다.
"진짜 오랜만이야."
나에게 안긴 동생을 몇 번 토닥여 준 다음에야 나한테서 떨어졌다.
"아들 친구분들이시죠??"
"저희둘은 친구고 이 분은 임시 친구에요."
"임시 친구요?"
"아직 충분히 친하지 못하거든요."
"마디안님이랑은 충분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 데 말이죠."
가볍게 티격대는 둘의 모습에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들어오세요. 저녁 맛있게 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다들 즐겁게 우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아주 작게 읍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