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54화 (54/54)

〈 54화 〉 생소함에 물들다

* * *

우물쭈물 하는 것도 기다려줬다. 말하는 걸 듣고 나서 내가 거절을 해야지. 설레발은 금물이었다. 먼저 거절을 해버리면 혹시 다른 용건 일 경우에 너무 난감해 지니까.

근자감이 심하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이었다.

봄바람이 불고 풍부한 흙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벚꽃이 지고 이젠 초록의 입사귀가 매달린 나무, 싱그러움을 알리는 것처럼 핀 봄꽃들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저녁은 뭘 해먹을까... 내일 아침은 간단하게 김치볶음밥을 해먹는 게 좋겠지? 그나저나... 쌀이 있던가?

상대방이 마음을 준비를 하도록 진득하게 기다리는 것도 계속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그건 익숙해지는 데 이 설렘을 뿜어내는 상대방에 대한 건 언제 익숙해지려나...

아니지, 솔직히 익숙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아봤자... 마음이 동하는 일은 없으니까.

“서율 선배... 저기... 제가... 선배를.”

여기까지 들으면 안 들어도 알겠는 걸. 좋아한다는 말 하도 많이 들어서... 나중에는 이도저도 아닌 말이 될 것 같아 솔직히 좀 불안했다.

“율아? 뭐야, 여기 있었어?”

어?...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낮으면서도 매력 있는 목소리, 날 율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어디 좋은 곳에 가는지 쫙 빼입은 태수의 몰골은 꽤나 훌륭했다. 여기 봐도 교복, 저길 봐도 교복인 학교에서 그의 생김새는 주목을 받기 쉬웠다. 물론 옷차림을 제외하고도 생김새가 워낙 뛰어나 그럴 수도 있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도 있잖아?

태수도 한 남자애와 단둘이 있는 나를 보고선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 광경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유나 말고는 없겠지... 고백 현장은 어떤 이유에서든 불가침 영역이 되니까. 그 분위기를 깨트린 건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는데 물을 안 넣는 것과 같았다.

자취하는 고딩인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인가 싶지만. 어느 누구나 무안해 할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어... 그랬구나... 당연한 건데.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응?”

반응할 새도 없이... 이름 모를 남학생은 후다닥 학교 건물로 사라졌다.

성대한 오해를 한 거 같은데... 나로서는 매번 같은 거절을 안 해도 되니까 어쩌면 다행이지 않을까. 저 학생에게는 미안한데. 뭐 괜찮겠지.

“나 실수 한 건가?”

“좋은 실수였다고나 할까. 근데... 내가 학교 오지 말라고 했지.”

사람 말을 정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사람 모이는 거 싫어하기에 태수에게는 학교 접근 금지 명령을 저번에 내렸는데... 아님 인생 2회 차라고 사람취급도 안 해주는 거니...

“아니... 너가 오라며?”

“내가? 언제? 미쳤다고?”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모을게 뻔한데? 번화가면 몰라도 여긴 풋풋한 애들만 있는 학교였다. 태수는 그런 학생들에게 자극이 되는 존재였다.

“유나가 그랬는데? 너가 할 말 있다고 해서 와달라고.”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하는 태수의 말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 할 말 없거든?”

“아... 유나, 이게 진짜. 걔 어디 갔어?”

눈빛이 살벌했다. 유나 이번에 잡히면 진짜 혼나겠는데...

“잘 생각해봐. 너한테 혼날 걸 알 텐데. 이미 튀었겠지.”

“와... 이걸로 장난을 친다고?”

허탈해 보였다. 하긴 대학도 다니고... 알바도 미친 듯이 하는 태수에게 오라 가라 하는 건 너무 철없는 행동이 아니니 유나야...

“음...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일하느라 바쁜데.”

“아니.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딱 보니까 너 몰래 한 짓 같은데...”

오... 날 꽤나 신뢰하는 구나. 물론 태수의 예상이 맞았다.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를 불렀으니까. 왜 그런 장난을 친 걸까? 아무리 유나가 바보여도 예의는 있는데...

잠시만... 설마... 이게 유나가 말한 방법인가...

연출 어쩌고 하더니 이걸 노린 거구나. 고백을 받는 타이밍, 그리고 그림 같은 태수의 등장. 유나가 말한 연출이 이것일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네.

“근데... 아까 그 남자애는?”

“나도 오늘 처음 본 애야. 신경 쓰지 마.”

뭘 신경 쓰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렇게 말이 나갔다.

“그래? 일단 갈까? 여기 계속 있을 건 아니잖아?”

“그러네. 또 사람 모이기 전에 얼른 가자...”

다행히 뒷문이라 그런지... 인적이 드물었다. 그래도 뒷문을 통해 하교하는 학생들도 있기에 몇몇은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들을 살폈다.

아 저번에도 태수가 학교에 왔을 때, 엄청난 소문이 나돌았는데... 고등학생 어린애로는 내 성에 안찬다나 뭐라나... 또 그 소문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때는 유나의 도움으로 소문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유나가 작정하고 태수를 부른 거니까... 오히려 소문을 부추길 생각이지 않을까.

이 고백 지옥에서 꺼내줄 생각인 것 같으니까. 소문이 돌게 되면 정말 그게 해결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본의 아니게... 태수를 이용하는 꼴이었다.

“태수야, 일단 정말 미안해.”

아까와는 다른...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걸 알기에 하는 사과였다.

“괜찮다니까. 유나한테 잘 피해 다니라고 해.”

“응... 그럴게. 근데 아마 나 때문에 그랬을 거야.”

“무슨 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아까도 봤지? 그 남자애가 고백하려던 거.”

“그치. 봤지. 나 처음 봤어 고백 받는 걸 보는 거.”

태수와 함께 길을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유나처럼 편안한 기분, 아마 태수가 내 성격을 다 받아줄 사람이란 걸 알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내 과거도 알고 거기에 남자였던 것도 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싫어할 지도 모르겠네... 남자였던 나한테 이용당하는 거면. 사실을 전하는 게 조금 두려워도 말해야 했다. 이제 숨겨두는 일 없기로 했으니까. 말하지 않아 오해하고 틀어지는 건 싫었다.

“후배들이 생기고... 이런 일이 좀 잦아서. 유나하고 수정이하고 그만두게 할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거든. 그러다 결정된 게 유나가 생각한 걸 하기로 했고. 나는 현 상황만 벗어날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서 유나가 하는 대로 두긴 했는데... 그 방법이 너였을 줄은 몰랐어.”

“무슨 말인지 도통...”

“그러니까... 유나는 너하고 나하고의 관계를 소문을 내려고 하나봐. 음 우리가 아무 사이는 아니지만... 소문이라는 건 내려고 하면 낼 수는 있잖아? 거기에 저번에 너가 학교에 왔을 때도 잠깐 말이 돌았거든. 너가 내 남친 아니냐고.”

“그... 그래? 어째 그런 일이...”

태수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이 반응은 당연했다. 여자라고 알았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내 정체를 태수는 아니까. 있던 정도 떨어질 상황이겠지.

“그렇지? 좀 아니지? 역시 유나의 생각을 믿은 게 잘못 이었나봐.”

“하하... 잘못까지야. 유나가 할 법한 생각이지.”

그 웃음 참으로 어색해 보여... 얼마나 싫으면 저럴까? 음... 역시 이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 할 테니까 걱정 마. 소문은 내가 저번처럼 잘 막아볼 테니까.”

남자하고 남자친구이라는 소문이 난다고 생각하면... 으 나라도 불편했다. 동성애자면 몰라도. 비록 주변에선 남녀로 보일 순 있어도 태수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의 마음도 이해해 줘야 했다.

해달라고 강요할 만한 게 아니니까. 유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결국 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 건가.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너 힘든 거 아니야?”

“음... 힘들긴 한데. 내 일인데 감수해야겠지 뭐... 고백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구. 그냥 귀찮을 뿐...”

“괜찮아...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나도 여친 없는데 그런 소문난다고 뭐라고 할 사람 없어.”

귀지가 쌓였나... 태수가 허락한 듯한 말을 한 것만 같았다.

“괜찮다고? 소문이 나도?”

그리 되묻자.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싫은데 억지로 끄덕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괜찮지. 친구끼리 그것도 못해주겠어?”

정말이구나. 태수가 괜찮다고 했다. 유나의 이 끔찍한 방법을 해도 된다니... 얼마나 착한거야. 친구사이라면 돈도 빌려주고 너 준거야 하고 말할 것만 같은 착함이었다.

“고마워. 너한테 귀찮은 일은 없을 거야.”

이 말도 안되는 방법을 허락해줬는데... 이 이상 태수한테 폐를 끼치면 안 되었다. 소문은 부정하지 않고 놔두면 알아서 커질 테니까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다.

유나야... 태수가 이제 너를 혼낼 일만 남았구나. 이 끔찍한 일을 강요받은 태수의 분노는 엄청 나겠지. 나도 살아야하니... 유나가 대신 태수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야했다.

이제 지옥 같던 고백의 늪에서 해방인가... 너무 좋은데? 억지로 하는 태수는 안됐지만. 나는 자유였다.

“정말 그냥 평상시와 같아?”

태수가 불안한지 그리 물어왔다. 남친 행세를 해달라는 게 아니니까 그에게는 다행일지도 몰랐다.

“응, 네 이름만 빌리면 되는 일이야. 다행이지?”

“그게 다행인가...”

말끝을 흐리며 읊조린 말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확실히 안심하는 말투였다.

“응응, 참 다행이야.”

내가 못 박듯 말하자 그도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대화를 나누며 걷자. 어느덧 자취방 근처에 도착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