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생소함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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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 되면서 바뀐 게 많았다.
우선 유나와 수정이하고 같은 반이 된 점일까.
1학년 때 진태랑 있었던 일은 학교에서는 단 한 명, 담임선생님이시던 노장 선생님만 알고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건 다른 선생님들도 아셨는데 자세히 아는 건 노장 선생님 뿐.
그 사건이 있고 며칠간 학교를 쉬었으니 노장 선생님만큼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행정처리를 하실 수 있었다.
무단으로 학교를 빼먹은 건 내가 우등생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그 사유자체가 큰일이라...
그걸 보면 정말 우등생 만세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기에 은연중에 힘을 쓰셔서 나를 케어해 줄 수 있는 유나와 수정이를 같은 반에 몰아넣으셨다. 노장 선생님의 노력으로 우리 세 명은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성적순으로 반이 나뉘는데 유나는 그렇다 쳐도 수정이와 내가 같은 반이 될 수가 없는 구조였다. 마지막 시험 성적에서 내가 1등이었고 수정이가 2등이었기에 몇몇 애들은 의아한 듯 했으나.
일개 학생의 힘으로 왜 그런지 알기란 힘들기에 흐지부지 의문은 넘어갔다. 사실상 친하지 않으면 누가 어떤 반이 되던지 상관이 없으니까.
또 2학년이 되면서 바뀐 게 있다면 아까처럼 이유 없는 고백이 많다는 것. 나랑 일면식도 없는 애들이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하는 통에... 너무 귀찮았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욕을 하면서 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안 좋은 습관은 이제 버리기로 했으니까. 근데 가끔 가다가 욱하기도 해서 이 일은 어떻게 해야만 했다.
유나와 같이 반에 들어가자. 수정이가 책상에 박혀 공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예전처럼 음침한 기운은 없었다.
나랑 같이 쇼핑도 자주 갔고 유나는 수정이에게 화장하는 법도 알려줘서... 지금의 수정이는 학교에서 외모나 얌전한 성격적인 측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안경을 벗고 특유의 촉촉한 눈을 이젠 숨기지 않았고. 쑥스럽게 웃는 것도 자주 보여줬다.
할 생각만 있으면 수정이에게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줄을 이을 텐데... 지금은 연애에 관심이 없는지 공부에 더 열성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이 나오는 이유를 안 뒤로는 더더욱 몰두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감동 받은 점은 인생 2회 차라는 치트를 친 것과 같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력을 인정해 준 것이랄까. 과거의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지 같은 공부벌레인 수정이는 알아줬다.
의지가 꺾이기는커녕 날 이기려고 더 열심히다.
“저거 또 공부하고 있네...”
유나가 고개를 저으며 수정이에게 다가갔다. 유나는 당연하게도 풀고 있는 문제집을 보란 듯이 접었다. 그에 수정이는 장난감을 뺏긴 아이처럼 울상이었다.
“유나야, 애 울겠다.”
“아... 아니야. 괜찮아.”
표정은 전혀 안 괜찮아 보였다. 친구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정이는 닫힌 문제집을 그대로 책상 아래로 넣었다. 풀지 못한 문제보다 친구를 선택한 것이다. 문제랑 같이 저울에 올라간다는 게 좀 그렇지만...
“율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율이는 평상시에 하던 거 하고 왔지.”
유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곤 수정이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도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애들 옆에 앉았다.
이해한 듯 수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를 하고 있었긴 해도 같은 반이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아는 듯 했다.
“그렇구나... 너무 힘들면 그만하라고 내가 말할까?”
“우리 수정이...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다고?”
“음...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점점 성장해 가는구나. 자기 의견 말하는 것도 힘들던 아이였는데. 이제 친구를 위해 나서기까지 했다.
“아직 우리 말고는 대화도 잘 못하잖아?”
“동급생은 무리지만... 후배들은 무섭지 않으니까.”
말 더듬는 것도 줄고 이제 정말 트라우마가 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게 참 대견하고 기특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유나도 나의 현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너무 심하긴 해. 그치?”
그리 운을 때자 수정이도 유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니까... 내가 볼 땐 장난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이 후배들이 선배를 뭘로 보고... 설마... 율이가 노는 애처럼 보여서? 막 남친을 하루마다 갈아치우는 날라리로 본 걸까?”
“네 머릿속에 날라리의 이미지는 그거니?”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남친... 이런 식이지 않을까? 잘 모르지만...”
“그게 말이 되니... 아무리 노는 애들이라도 사랑이 그렇게 쉽게 바뀔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후배들이 계속 선배님들의 교실로 찾아오잖아!”
“그냥 선배노릇을 하고 싶은 거였구나?”
“응... 유나라면 그럴 것 같았어.”
수정이하고 내가 웃어도 유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좋아. 교실 문에 써 붙이자.”
“뭘?”
“율이에게 고백 금지.”
“와... 상상만 해도 창피하다. 선생님들이 뭐라 생각하실지... 너무 싫은데?”
“그럼... 고백 금지라고 써두자. 율이 이름은 안 들어갔으니까 누군지 모르지 않을까?”
“그런가... 괜찮나?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선생님이 궁금해 하시면 뭐라고 대답할 건데?”
“율이 때문에 붙였어요. 라고 할 거야.”
유나의 당당한 언급에 어이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 내 이름만 안 쓸 뿐이지. 똑같잖아...”
“좋아. 이렇게 하자. 율이는 임자 있음. 건드리면 죽는다.”
“과격해진 거 말고는 그대로잖아.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당연히 유나는 내 말을 안 듣기에 그 뒤로도 도움이 안 되는 의견을 몇 개 더 말했다. 보다 못한 수정이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남자 친구 있다고 하면 어때?”
“그것도 그래... 그게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길이야. 누구냐고 물어도 굳이 말해줄 필요도 없지. 사생활이니까. 응, 그게 좋겠다.”
“흐음... 그게 최선인가...”
없는 남자친구 있다고 하는 방법... 생각 못하진 않았다. 하기 싫었을 뿐, 남친 있다는 그 한 마디면 다 정리될 사안이었으니까.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목구멍에서 남친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란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문제였다. 상상만 해도 닭으로 진화할 것만 같았다. 피부가 오돌토돌 하다 못해 뚫고 나올 만큼 소름이 돋았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부끄러운 건지... 아님 정말 싫어서 못하겠는 건지... 그것조차 잘 모를 지경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자 유나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실제 있는 것도 아니구. 그냥 말로만 하는 거야. 딱 한번으로 율이의 점심시간이 자유를 되찾을 거야. 율이 정도면 있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휴...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거지?”
밑져야 본전. 유나에게 한 번 더 물어보았다.
“후후... 하나 더 있긴 해. 율이가 거짓말도 안 해도 되는 신박한 방법이.”
유나는 내 물음에 검지를 보여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게 뭔데?”
“비밀이야. 이 방법을 쓰면 율이에게 나쁘진 않을 거야. 굉장히 빨리 결과가 나올 거라구.”
“맘대로 해... 지금보다 나빠질 일이 있긴 하겠어?”
점심시간마다 불려나가... 하교시간에는 기다려... 솔직히 좀 버거웠다. 유나가 생각한 방법이 실패하면 남친 있는 척 하는 걸로 가자. 그게 최후의 방법이었다.
하교시간, 유나의 표정이 싱글벙글 한 것이... 좀 불안했다.
“이런 건 연출이 중요하다고!”
그리 말하며 나를 이끌고 학교 정문이 아닌 뒷문 쪽으로 갔다. 간간히 뒤를 살피며 누가 따라오는 지 확인도 하기에 정말 의심스러웠다.
“연출? 뭐하는 데 연출을 해?”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오늘은 율이한테 고백하는 사람 없나?”
“그게 그렇게 매일 있지는 않거든?”
“겸손하긴... 내가 볼 땐 이렇게 가다간 전교생한테 사랑 받는 전설의 여고생이 될 거 같아.”
“정말... 끔찍한 타이틀이네.
몸이 절로 떨렸다.
유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등 뒤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이 누나. 잠시 시간 괜찮아요?“
누나라니... 이 호칭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승현이 동생 지은이가 언니라 하는 것... 그리고 보육원 후배인 석현이가 부르는 누나라 부르는 건 그렇게 듣기가 좋은데. 다 큰 애가 불러서 그런가. 나 은근히 귀여운 거 좋아하나보다.
“내 말 맞지?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 구나~”
“아... 잠시만 갔다 올게.”
“응, 요 근처에 있을게.”
날 부른 후배에게 다가갔다. 이제까지와 다른 점은 매번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 외에는 다 같은 레퍼토리로 흘러갔다. 오늘 처음 본 후배가 고백하고... 그걸 나는 거절하고. 항상 같았다.
봄은 새로운 출발에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시린 옆구리를 채워줄 이성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왜? 무슨 일 있어?”
매번 같은 말만 해서 그런지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상냥하게...
“그... 그게... 율이 누나...”
“잠시만... 누나라고 안 부르면 좋겠어. 그냥 선배라고 해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철벽 기질은 어디 안 가는지 이런 말도 물 흐르듯 나왔다. 대부분 이렇게 하면 무안해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몇몇은 당황해 하면서도 끝까지 준비해온 말을 하는 스타일도 있었고.
“죄송합니다. 선배.”
아마 이 애는 후자인 것 같았다. 일단 지르고 보자는 느낌?
“응, 고마워. 그래서?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