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44화 (44/54)
  • 〈 44화 〉 어릴 적, 그때의 보육원

    * * *

    태수하고 단둘이서 학교 정문을 나서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아이들은 많지... 웅성웅성 거리는 단어들 속에서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팔뚝에 난 미세 털이 삐쭉 서는 것 같았다.

    태수는 저 소란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당사자들끼리 아무 상관 없다면 별 의미 없는 말이었는데 이리저리 나 혼자만 흔들리는 꼴이었다.

    안절부절 못하겠는 마음에 무안해진 난, 무심결에 긴 머리를 손으로 빗질했다. 사락사락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심신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여자들이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왜 머리를 매만지는 건지 알겠다. 이거 꽤 효과가 있구나.

    얼른 학교 근처를 벗어나고 싶었는데... 뛰는 것도 뭐했다. 그게 더 눈길을 끌게 뻔했다. 그냥 얌전히 걷자.

    “너 어릴 때랑 머리 스타일이 변함이 없네.”

    그리 태수랑 나란히 걸으며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남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있는지 태수가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긴 머리였네.

    “귀찮아서... 헤어샵에도 잘 안가거든.”

    “여전하네. 그 시절에도 시끄러운 거랑 귀찮게 하는 거 딱 싫어했잖아.”

    “그랬나? 뭐... 사람 쉽게 안 변하니까.”

    “하긴. 나도 변한 거 없으니.”

    응? 애가 뭔 소릴 하는 거지 지가 변한 게 없다고? 잠시 멈춰서 태수를 바라봤다.

    “뭐래, 너 어릴 땐 귀여웠는데... 지금은 좀...”

    부담스럽게 남자다워져서 좀 그랬다. 난 그대로인데 이 애만 커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웃음 한번으로 이성을 다 홀리고 다닐 것처럼 생겨가지고선 변한 것이 없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거기다 발음도 어눌했던 변성기 전,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나에게 이 묘한 낮은 음성이 간질간질했다.

    “그렇게 따지면 너도 변했거든?”

    어릴 적에는 지금의 축소판이었다. 남자였던 감각이 강했던 어린 시절. 자신을 볼 때마다 웬 인형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꼈다. 눈도 큼지막하고 피부도 투명한 것이 내가 세상 살면서 본 아이들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귀여웠었다. 그게 자신인 것이 아이러니였다.

    아무튼 지금은 태수도 알건 다 아는 나이... 보육원에서 지냈던 것처럼 허물없이는 못하겠지.

    “그래서 불편하니? 그럼 떨어져서 걷던가.”

    “전혀? 난 괜찮은데.”

    보육원에 가는 게 그렇게 기쁜가 아까부터 왜 이리 웃어대는지. 정들까 무서웠다. 대꾸하지 않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근데 하나 간과한 게 있었다. 하교시간인 지금 버스정류장에는 학생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 미치겠다. 너 이제 학교에 오지 마.”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는 통에 애꿎은 태수만 잡을 수밖에 없었다.

    ­

    버스를 타고 10개의 정거장을 지나면 우리가 있었던 보육원이 나온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인데도 보육원을 나온 뒤 찾아온 적이 없다는 건 내가 너무 무신경했던 걸까?

    버스에서 내린 후에야 평화로운 주변 환경이 만들어졌다. 약 반년동안 나라는 존재에 익숙해진 학교였기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아본 건 입학식 첫날 이후론 처음이었다.

    내일 학교에서 무슨 이야기가 돌지 안 봐도 비디오라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아무리 무심한 나라도 웅성거리는 소문까지 모른 척 할 만큼 철면피는 아니라... 며칠 동안은 유나를 통해 사태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건 내일의 나에게 맞기고 지금은 보육원에 도착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보육원’ 이름만 보면 눈이 부실 것만 같았다. 근데 그 안에 있는 인물들은 대게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었다. 간판만 빛나 보이는 건 내가 이곳 출신이라 그런 거겠지.

    버림을 받았거나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부모를 잃었거나. 결론은 가족이 없는 아이들의 모임이었다. 나도 그리고 옆에 있는 태수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나 여기 9년 만에 와봤어. 근처에 와볼 생각도 안했거든.”

    “나는 종종 왔는데... 너도 얼굴 좀 비추지 그랬어. 원장님이 널 얼마나 아끼셨는데.”

    “그랬어? 난 특별하게 뭘 받은 기억은 없는데?”

    “보육원에서 너만 선생님들이 터치 안한 거 기억 안나?”

    “그게 날 아끼신 거야?”

    뭘 모른다는 듯 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과자나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는다고 하면 다들 군말 없이 주셨지. 낮잠 시간에 잠 안 자고 책 읽어도 다 봐주시고. 체육도 하기 싫다하면 열외. 식사시간에도 맛있는 음식은 꼭 하나 더 주셨고. 거기다 선생님들이 잠잘 시간에 네가 있는 반을 담당하고 싶으셔서 말싸움까지 하셨어. 그렇게 침 마를 새 없이 다들 널 칭찬하셨지.”

    “그랬던가...”

    “뭐... 나도 뒤에 내용은 최근에 들은 거야. 아무튼 선생님들이 나 볼 때마다 율이는 잘 지내는지 물어보셨어.”

    “그럼 직접 연락하셨으면 되는데... 양부모님 연락처는 다들 아시잖아?”

    태수는 내 말에 차분하게 보육원을 바라봤다.

    “그게 쉽겠니... 우린 다들 보육원을 떠나고 싶어 했잖아. 가족 찾아 떠난 애들은 우리 안 보고 싶을 거라고 다들 그러시더라. 자기들이 연락하면 슬펐던 기억도 떠오를까 봐 못 하셨데.”

    “그랬구나.”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난 입양을 보내면 끝이기에 연락 한번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을 당했을 뿐이니 이상하지는 않았고 선생님들을 책망할 자격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슬플까봐 못했다라... 가슴부분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

    “들어가자. 내가 간다고 연락했으니 다들 알고 계셔.”

    “응.”

    태수의 안내를 따라 부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가 무색하게 어릴 적과 다른 점은 딱히 없었다.

    작은 놀이터와 안전 수칙이 적힌 팻말. 어린이집과 비슷한 건물. 대부분의 것들이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나는 이미 여길 떠났다는 점이었다.

    “우와! 태수 형이다!”

    옅은 향수에 잠겨있던 나의 시야에 아이들이 들어왔다. 다들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와 태수에게 엉겨 붙었다. 형이라 부른 아이는 10살 정도 되어보였다. 태수는 그 아이를 안아 올렸다.

    “석현아, 지금 저녁시간 아니야?”

    “맞아! 다 먹고 놀려고 나왔어. 형은... 어?”

    석현이라 불린 아이의 태수한테 꽂혀있던 눈이 나를 향했다. 그에 나는 싱긋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녕?”

    내가 말을 걸자 어디가 고장 난 것처럼 아이의 몸이 삐걱거렸다.

    “으으... 안녕하세요오... 형 나 내려줘...”

    안절부절 눈알을 돌리던 석현이는 땅으로 내려와 태수의 등 뒤로 숨었다. 뭐지... 내가 무서운가? 유나한테 지적받은 대로 무표정은 무섭다고 해서 웃어본 건데. 이것도 아닌가봐. 아이들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최승현 동생인 지은이는 나를 잘 따르는데.

    “낯가림이 심한가 봐?”

    “석현이 엄청 활발한 애야.”

    “근데 왜 이래?”

    “면역력이 없는 거지. 뭐.”

    태수는 아저씨같이 웃으며 석현이의 머릴 쓰다듬었다.

    “면역? 감기라도 걸린 거니?”

    조금 걱정된 나는 아이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뒷걸음을 쳐 내 손과 멀어졌다. 좀 충격...

    “아니요...”

    뻘쭘해진 손을 거뒀다.

    “너무 마음 쓰지 마. 그냥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야.”

    아이의 톡톡 튀는 감정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석현이가 얼굴을 붉힌 체 도망갔다. 그것도 잠시 이내 다른 아이들이 우리의 주변을 둘러쌓다. 그 중 볼 살이 가득한 여자아이가 태수를 쳐다보며 오밀조밀한 입술을 들썩였다.

    “오빠는 백수야?”

    “갑자기 왜 그래. 예빈아, 나 상처 받는다.”

    보육원에 자주 온다는 말은 사실인지 태수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백수면 시간 많으니까. 더 자주 오면 좋겠어.”

    “오, 우리 예빈이...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고?”

    “오빠가 자주 오면 과자랑 아이스크림 더 먹을 수 있어서 좋아.”

    낭랑한 대답에 태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자주 오고 먹을 것도 많이 사올게.”

    태수가 아이의 머리를 흩으려도 아이는 기분 좋게 태수를 따라 웃었다.

    아이들하고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 같아서 어쩐지 이 풍경자체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의 모습으로 태수를 정의하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까지 있을 줄이야. 태수는 공백의 시간이 무색하게 정말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좋네...”

    난 정말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말을 꺼냈는데 어째선지 태수의 표정이 굳었다.

    “아... 미안. 넌 원장님 보러 온 건데. 너무 시간 끌어서 짜증 난 거 아니지?”

    “괜찮아. 내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애들 보는데 짜증을 내겠니.”

    “그것도 그렇네.”

    태수는 피식 웃으며 아이들을 다독여 놀이터에서 놀게끔 했다.

    난 멀찍이 서서 그런 태수를 기다렸다. 아이들을 다 정리하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또 한 아이를 달고 왔다.

    자세히 보니 처음에 도망간 석현이였다.

    “석현이가 할 말이 있다는데?”

    “응? 석현이 할 말 있어?”

    쪼그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아이는 또 얼굴이 붉어졌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닌가? 나중에 선생님한테 알려드려야 하나?

    “누나... 태수 형 여자친구예요?”

    “어... 음?”

    석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일단 놀랐다.

    옆에 서있는 태수를 힐끔 보자. 양손을 모으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그 반응과 이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짜증은 내지 말아야지.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석현이는 여자친구가 뭔지 아니?”

    “손잡고 다니는 이성친구요.”

    정말 아이다운 정의였다. 그런 정의라면 내가 할 말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태수의 손 안 잡고 다니는 이성친구야. 알겠지?”

    석현이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보육원에서의 내 이미지가 태수 여친이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럼 여긴... 왜 왔어요?”

    “왜 왔긴. 나도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왔지.”

    “어? 그럼 누나, 선배였어요?”

    “선배?”

    “여기선 이곳 출신을 선배라 불러.”

    태수가 단어의 의미를 옆에서 설명해줬다.

    “맞아. 나 선배니까 여기와도 되지?”

    “와! 누나 선배구나!”

    갑자기 반말로 변했다. 이 애 은근히 철벽남이었구나. 외지인이 아닌 걸로 정의되자 벽이 사라졌다.

    “내가 말했지? 석현이 엄청 활발하다고.”

    태수가 석현이의 머리에 손을 턱하니 올리고 의기양양했다. 왜 너가 그런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날 무서워하는 게 아니니 그걸로 다행이었다. 조금 기뻐진 내가 그 더벅한 머리에 손을 올렸다.

    “으으...”

    아닌가... 외지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는 건 싫어하는 눈치였다. 얼굴이 붉은 걸 보니... 머리 만지는 걸 싫어하나?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