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43화 (43/54)
  • 〈 43화 〉 어릴 적, 그때의 보육원

    * * *

    지금의 나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약속이 있었다.

    태수하고의 약속이 이렇게 까지 반가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니지 태수보다는 보육원 원장님에게 고마워해야...

    8살 때 입양을 가 졸업한 이후로 보육원에는 처음 가는 거였다. 태수의 권유가 없었다면 가볼 생각을 전혀 못했으리라.

    이전 생에서도 졸업한 보육원에는 발길조차 주지 않았었다. 떠나면 끝이라 여겼던 터라. 거기다 원장님과 선생님들은 일적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거니까. 알뜰살뜰 아이들을 돌봐도 그게 당연했고 입양을 보내면 모든 게 끝난다 생각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이번에 원장님이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건 조금 당황스러웠다.

    많은 아이들 중에서 스쳐지나가는 아이였을 뿐일 텐데도... 보고 싶다고 해주신 게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어색함과 긴장보다는 그리움이 더 컸다. 그래도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나의 차이는 몸의 크기뿐일 정도로 변한 건 딱히 없었다.

    오늘은 진태 오빠가 아닌 태수가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오빠에게 약속이 있다고 말을 꺼냈을 때 정말 아쉬워했다. 그걸 보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나는 오빠를 하루라도 안보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착한 딸과 여동생, 거기다 의도치 않게 여친 행세까지 해야 했다. 정말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문까지 가는 길은 평소처럼 유나와 수정이가 함께했다.

    “오늘 보육원 간다고 했지?”

    “응. 너도 갈래?”

    “음... 그러고 싶은데, 태수 오빠한테 미안하니까 참아야지.”

    웃으며 영문 모를 말을 하기에 가던 걸음을 멈췄다. 유나는 그런 게 있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뭔 소리야?”

    “넌 몰라두 돼. 그치 수정아?”

    “응... 태수 오빠 방해하면 혼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지 수정이와 유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시시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수정이는 태수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게 조금 궁금했다. 처음 태수를 보고 마음에 들어보였는데... 벌써 접은 건 아니겠지?

    예전에 수정이가 카페를 도망치듯 뛰쳐나갔을 때, 그 이후로 혹시나 불편할까봐 태수의 이름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조심한 것이 무안할 정도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수정아 혹시... 아직 태수한테 마음이 있어?”

    “응? 아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왜?”

    궁금했던 걸 직설적으로 묻자 수정이는 눈이 커졌다가 웃었다.

    “율이는... 눈치가 좀 없는 거 같아...”

    “그치? 애가 머리는 좋은데 이런 쪽으로는 좀 둔해!”

    또 나만 빼고 둘이서 실실 웃었다. 거기다 둔하다는 거에 공감을 해서 돌려줄 말이 딱히 없었다.

    “뒷담화도 아니고 앞담화를 해?”

    눈에 힘을 주며 슬쩍 애들을 노려봐도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유나는 그렇다 쳐도 수정이까지... 이젠 정말 내가 편해진 것 같아서 나도 웃음이 나왔다.

    잡담을 하며 걸으니 정문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엔 태수가 이미 와있었다. 그는 폰을 들여다보며 정문에 등을 기대 서있었다. 주변엔 여학생들이 그를 힐끔거리며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야... 태수 오빠 이렇게 보니까 그림이네.”

    “남자인 율이를... 보는 거 같아...”

    유나와 수정이의 감탄에도 난 헛웃음을 냈다.

    꼴에 대학생이라고 고등학생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본판이 원래 좋아서 모델 같았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알바 할 때 입는 유니폼이 아닌 사복차림은 꽤나 느낌이 있었다. 여름이 되어감에 따라 옷감이 얇은 옷이어서 다부진 몸이 여실히 들어났다.

    매력적인 남성의 등장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게...

    “내가 다 창피한데...”

    마음 같아서는 일행이 아닌 척 무시하고 싶었다. 설마... 나도 제 3자가 보면 저런 꼴인가?

    “얼른 가보자. 애들 더 모여들겠다.”

    유나의 말에 긍정해 서둘러 태수에게 가까이 갔다. 이렇게 주변이 웅성웅성 시끄러운 와중에도 태수는 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폰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야, 너 일부러 여기 서있었지?”

    시큰둥하게 말하자 태수는 그제야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웃었다. 나의 책망에도 태수는 짜증도 한 번 안냈다. 마냥 웃으면서 시꺼먼 눈동자에 내 모습이 담았다.

    “오자마자 짜증을...”

    “솔직히 말해봐, 너 남들 시선 즐기는 게 취향이니?”

    “시선?”

    그제야 주변을 훑어보는 태수였다.

    “뭐야 이거. 연예인이라도 온데?”

    태수는 자기가 연예인 같다는 걸 모르는 지 화들짝 놀랬다. 굳이 집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콧대가 높아질 게 뻔했다.

    “말을 말자...”

    “근데 율아, 너 혼자야?”

    “아니? 유나하고 수정이...”

    어? 뭐야 애들 어디 갔어?

    분명 따라오는 걸 봤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애들이 사라져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진 걸 깨닫는 순간 폰에 진동이 울렸다.

    [잘 놀다 와~ 내일 보장!]

    [율이 파이팅!]

    유나와 수정이가 각자 문자를 보내왔다.

    이것들이... 나만 내버려두고 도망을 쳤다.

    아이들을 찾고자 주변을 돌아봤는데 나와 태수를 바라보는 많은 시선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이거 내일 뭔가 학교에 소란이 돌 것 같은 느낌이...

    ­

    율이는 태수에게 차분하게 걸어가더니 맑은 눈으로 올려다봤다.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학생들의 이목을 모으고 있는 태수가 마음에 안 드나보다.

    그녀는 모르리라...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태수에게는 꽤나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유나는 그게 사랑이던 우정이던 그 자체만으로도 그런 율이의 모습이 참으로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뒤숭숭한 건 수정이가 태수에게 마음이 있었던 부분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율이는 지금 태수 오빠한테 아무 감정도 없을 거야...”

    율이가 태수에게 하는 걸 보면 유나에게 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냥 친구 그 자체였다.

    “율이는 그렇더라도... 태수 오빠가 아니잖아... 거기다 나 이제... 마음 접었어...”

    그녀가 태수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왔었다. 이 사람은 율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율이가 라이벌이라니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보다도 그런 라이벌 의식조차 율이에게 가지고 싶지 않았다.

    수정이에게 율이는 처음 생긴 친구였다. 조금이라도 우정에 금이 갈 것 같은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태수에게 갔던 마음이 설령 사랑이라고 해도 율이가 더 좋았다. 그래서 깨끗하게 마음을 접고 율이만 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으니까.

    귀염상임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 싫어하는 율이는 생활할 때는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시니컬한 율이가 흰 미간에 살짝 인상을 쓰며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기의 도중인지 작은 입술이 들썩거렸다.

    그 귀여운 표정에 무장해제가 된 태수는 조금 가시가 있는 율이의 말에도 그저 웃기만 했다. 율이가 뭘해도 마냥 좋은 것처럼 보였다.

    “잘 어울린다...”

    물론 이들이 사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제 3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보면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수정이는 율이한테 말하면 얻어맞을지도 모르니 말을 아꼈다.

    흐뭇하게 율이와 태수를 보던 수정이는 미소를 머금어도 조금 진지해 보이는 유나에게 눈길이 갔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유나는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이 반짝였다.

    “수정아, 내가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거든? 같이 가줄래?”

    수정이는 율이보다는 유나를 알고 지낸지 짧았다. 그래도 항상 밝은 유나가 이리도 진지한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이건 백프로 율이와 관련된 일이었다.

    “율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지...?”

    “응... 율이는 미련하게도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하거든. 뭐가 무서운지...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하지 않아서 내가 진짜 답답해 미칠 것 같아.”

    말해주길 기다리다 지친 유나는 이제 가만히 있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머리가 좋은 율이의 고민이라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아도 노력은 해봐야겠다고.

    아무리 유나가 바보여도 누구와 관련된 일인지는 생각할 수 있었다.

    저번에 진태 오빠가 휴가를 나왔을 때, 정말로 평소와 달랐다. 마치 곧 떠날 사람처럼 변해버린 율이를 붙잡느라고 하루하루가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그때도 진태 오빠의 휴가였고 지금도 진태 오빠가 휴가라 했다.

    거기다가 율이네 집에서 들은 진태 오빠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진태 오빠가 이제는 계속해서 율이를 데리러 오는 것도 목에 걸린 가시처럼 성가셨다.

    결정적으로는 진태 오빠와 관련된 이야기를 율이가 계속 피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야기꽃이 피지는 못해도 피하지는 않았을 텐데.

    모든 게 진태 오빠와 관련이 있어보였다.

    “나도... 율이를 돕고 싶어...”

    수정이의 결심한 표정에 유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좋아... 그럼 율이네 집으로 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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