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39화 (39/54)
  • 〈 39화 〉 평범한 가족을 바랐다

    * * *

    요즘 집안 분위기는 최악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빠가 군인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면회를 취소한 것으로 인해 가족들의 걱정은 점점 커져만 갔다. 아빠하고 엄마, 두 분이 모이면 오빠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의미모를 죄책감만 커져갔다.

    “율아. 나가니?”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자. 엄마가 다가오며 말했다. 조금 퀭한 모습이었다.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는 게 아닐까. 집에 있기 껄끄러워진 나는 최근 들어 자주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엄마도 나보다 오빠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문제 행동을 보이는 건 오빠니까 부모로써 당연한 반응이었다.

    “네, 친구 만나러 잠시.”

    “응. 조심히 다녀와.”

    집에만 자주 박혀있는 내가 나간다고 하면 방방 뛰며 기뻐하시던 모습은 이제 없었다.

    그저 눈앞에 닥친 근심에 다른 감정은 다 먹혀버린 듯 했다. 엄마는 힘없이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부모님한테 연락은 줘야지... 아직 고민 중인가.”

    오빠에게 속으로 불만을 표하는 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오빠도 부모님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내가 오빠에게 제안한 일이 어떤 의미일지 고민하는 게 뻔했다.

    망가지게 두고만 볼 수 없었기에 결정한 일이었다. 나보다도... 가족이 우선이었으니까.

    ­

    지은이하고 영화를 보기위해 시내로 나왔다. 약속시간 보다 약간 일찍 나와 일행을 기다렸다.

    “저거 진짜 왔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지은이의 손을 잡고 영화관에 온 최승현을 보고 질색했다. 오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긴 했는데 진짜로 와버릴 줄이야. 꽤나 지은이가 소중한가보다.

    “언니~”

    강아지처럼 곧장 달려와 안기는 지은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자.

    “빨리 왔네.”

    최승현의 말에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보다 5분정도 빨랐다. 나야 약속시간보다 빨리 나오는 게 습관이 되다보니 이상할 건 없었는데 최승현도 나랑 비슷한 과였다.

    나하고 최승현이 대화를 나누자. 주변의 시선이 최승현에게 잠시 집중되었다가 흩어졌다.

    그는 잠시 모인 시선에 당황했다. 익숙한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이목을 모으는 건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았다. 조금 짜증나는 것 말고는 딱히 상관없었다.

    “당황스럽다니까. 진짜.”

    그는 방금 상황에 작은 불만을 표했다.

    “유나랑 다녀도 비슷할 텐데?”

    유나도 나랑 같은 계열의 시선을 끌만한 인물이라. 그런 유나랑 자주 다닌다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한데...”

    “그건 그렇고. 그래서 뭐 보는 건데?”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매표소 스크린에 나오는 영화 목록을 바라봤다.

    “무시냐... 뭐 아무튼 지은이가 보고 싶은 게 있다던데?”

    어린 아이가 보고 싶은 거라면 귀엽고 아기자기 한 거 일려나.

    만화 극장판 같은 것도 보였다. 이중에서 뭘 보고 싶은지 지은이에게 묻자. 작은 키로 스크린을 올려다보더니 손가락을 내밀었다. 저게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저... 저건 좀 아니지 않을까?”

    “뭔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지은이가 고른 건 공포영화 같은데. 응, 저건 아무리 봐도 공포영화다.

    “아~ 저게 나왔구나. 지은이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거네.”

    최승현은 어째선지 납득한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나만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거야? 무엇인가 착오가 있는 거겠지. 이렇게 어린애가 피가 흐르고 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라는 걸 본다는 건 이상하잖아.

    “응! 저거!”

    “그럼 표 예매하고 올게.”

    진짜인가? 정말 저거를 본다는 거야? 이 어린애가? 아닌데....... 안되는데 난 무서운 건 잘 못 본다고.

    큰일 났다! 최승현이 매표소로 이동하기에 다급히 손을 뻗었다.

    “잠깐만! 그거... 정말로 볼 거야?”

    “왜? 너한텐 별로 일려나.”

    미안한 듯 옆머리를 긁는 그였다.

    “별로라고 하기보단........”

    거절하기에는 눈앞에 즐거워하는 지은이가 아른거렸다. 우리 지은이 보기와는 다르게 공포영화 마니아였구나.

    사실을 말해줘야 하나? 최승현한테 무서운 거 잘 못 본다고 말해야하는 거야? 유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데...

    말하지 않으면 지은이 때문이라도 보게 될게 분명했다. 안본다고 하면 그 이유를 물어볼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사실 말하는 흐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내가 공포영화 같은 거... 잘 못 봐...”

    잠시 정적. 최승현이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수치스러운 느낌은... 약점을 보인 거 같아 조금 탐탁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는데! 죽을래?”

    “아니... 공포영화 못 본다고 하기에. 갑자기 무슨 말하는지 잠시 이해가 안 되서.”

    “그러니까. 공포영화 보지 말자고.”

    “웬 공포영화를... 아!”

    최승현이 이해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우리 저거 볼 거야.”

    최승현이 전자 스크린을 가리켰다. 눈으로 쫒아가자 아까 봤던 그 공포영화 포스터가 나오고 있었다.

    이게 지금 날 놀리나...

    “장난쳐? 다른 거 보자니까.”

    최승현은 언성을 높여 다급히 말하는 나를 보고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아니, 스크린 계속 보고 있어봐.”

    “왜 아까부터 스크린 보라는... 건... 데?”

    검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섬뜩하게 찍힌 포스터가 스윽 넘어가더니 깜찍한 그림체의 어린 소녀가 지팡이 같은 걸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포스터가 나왔다.

    절체절명의 지구를 지키기 위한 소녀들의 모험. 마법으로 악당들을 몰살이다! 이런 문구가 적힌 만화포스터였다.

    그러니까... 난 헛것을 본거였다. 거하게 착각을 해버렸다.

    “그러니까. 저거를 지은이가 본다는 거지?”

    “당연하지, 애초에 청불 영화를 지은이가 어떻게 보냐. 우리도 못 보는데.”

    아... 저거 청불 영화였구나. 거기나 나 아직 청소년이었다.

    사실을 알고 나니 갑자기 엄청 부끄러워 졌다. 그런 원초적인 정보도 확인 못할 정도로 당황하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매... 내가 해올 테니까. 지은이나 보고 있어.”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나는 매표소로 다급히 향했다.

    난 대체 무슨 짓을... 이미 엎질러진 물인가. 그런 날 보며 히죽거리는 최승현을 가만히 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창피했다.

    아 진짜 집에 가고 싶다.

    ­

    “영화 어땠어. 지은아?”

    “응! 재미있었어. 언니랑 같이 봐서 그런가?”

    나를 올려다보며 그리 기쁜 말을 해주는 지은이였다.

    그런 지은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최승현을 노려봤다.

    영화를 보기 전, 그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방금 본 만화의 주인공이 쓰는 ‘기억 조작’이라는 게 진짜로 있어서 그 기억을 없애줬으면 하는 정도다.

    “왜? 내가 뭘 했나?”

    “아니. 아무것도.”

    그래 최승현은 아무것도 안했다. 그냥 나 혼자서 자폭한 거 뿐 이니까. 근데 왜 분한 기분이 들지? 혼자 길가다가 넘어졌는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보여 진 느낌이다. 이 무슨 수치 플레이냐.

    “카페라도 들렀다가 갈까?”

    “응! 나 케이크 먹고 싶어!”

    최승현이 지은이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나는 어떡하지. 그냥 집에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은이가 내 손을 잡았다.

    “언니도 같이 가자!”

    “응? 아니 나는...”

    최승현에게 엉망진창으로 수치를 받은 뒤라 도주하고 싶었다. 근데 이 아련한 어린아이를 두고 갈 수 있을까?

    “안 갈 거야?”

    지은이는 갑자기 울상이 되었다. 역시 어린아이인가... 표정이 획획 바뀌었다. 애절하게 바라보는 게 강아지가 산책 가자고 떼쓸 때의 눈 같았다.

    별 수 없나. 집에 가서 할 것도 없고.

    “알았어! 가면 되잖아.”

    “미안하네. 지은이가 떼를 써가지고.”

    “됐어.”

    미안할거면 떼쓰기 전에 막으라고. 라는 뒷말은 숨긴 체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우리 3명은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찬찬히 둘러보자. 익숙한 느낌의 카페였다. 기억 속을 뒤져보니까.

    저번에 태수를 처음 만났던 그 카페였다. 그때 최승현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며칠간 우리 집 쪽 카페에서 일한다고 했으니까. 여긴 없으려나.

    지은이를 데리고 빈자리에 앉자. 최승현이 대표로 음료를 주문하러 갔다.

    근데 웬걸 돌아온 그는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었다. 옆에 태수를 끼고 온 것이다.

    “유나가 있을 줄 알았더니 너가 있네...”

    “어딜 가나 있네. 스토커야 뭐야.”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말하자. 태수도 피식거렸다.

    “저번에 말했지... 같은 체인점이라 도와주러 간 거야.”

    “그건 나랑 상관없지... 계속 내 눈에 띄니까 짜증나거든? 좀 조심해줘.”

    “아오... 이걸 때릴 수도 없고.”

    태수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자. 아까 있던 수치스럽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소꿉친구가 짱인가.

    최승현은 멀뚱히 태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일하러 가보셔야 하는 게?”

    그때 가만히 있던 최승현이 태수에게 말했다. 그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어쩐지 견제당하는 거 같으니... 방해꾼은 사라질게.”

    태수가 영문 모를 말을 하기에 뭔가 싶었다. 견제? 최승현을 쳐다보며 말해서 나도 그를 바라봤다.

    “제가 무... 무슨 견제를 한다고.”

    아니면 아니지 당황하니까 오히려 더 그런 거 같잖아. 그런 최승현을 한 번 보더니 태수는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선 일자리로 돌아갔다.

    “저 오빠, 언니 좋아하는 거야?”

    가만히 있던 지은이가 날 보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 요즘 애들이 그런 개념이 빠르다는 건 알 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으니 확 느껴졌다. 그리고 저 순수한 눈길. 뭐든지 단면적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닐걸? 저 사람은... 언니 친구야.”

    “친구?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이성 간에 친구사이는 없데.”

    아저씨... 아직 어린 지은이한테 뭘 알려주신 겁니까...

    “진짜야?”

    최승현이 나에게 되물었다. 애는 또 왜 이러는 거야.

    “뭐가 궁금한데.”

    “저 사람이 너 안 좋아한데?”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건데.”

    진짜 사랑 얘기는 질색이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라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겨났다.

    난 최승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겠지만... 설마 너 나 좋아하니?”

    물음을 던진 뒤, 최승현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런데 내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어넘겼다. 최승현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응, 아주 바람직한 대답이었다.

    유나가 좋아하는 그가 날 좋아할 리가 없지. 매력적인 여자가 자신을 좋아한다는데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을 터였다. 그 대답을 들으니 조금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한번 폈다. 불안한 미래는 없는 건가. 다행이었다.

    “그냥... 안심하고 싶어서.”

    다음에 태수한테 수정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떠봐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