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조금은 편안해진 일상
* * *
시간은 빠듯했다. 약속 장소에 딱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어떨지... 더 늦지는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달려간 버스정류장에는 알맞게 버스가 도착해 그걸 다급히 잡아 탔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탔어도 시내로 가는 버스라 그런지 앉는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는데 약 30분정도 소요가 되니까.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지금 신은 게 운동화라 다행이지 단화나 구두를 신었다면 발 아픈 건 예약된 거였다.
그런 신발은 신어보지 않아서 몰라도 유나가 신고 아파하는 걸 종종 봤다. 아프다면서 그런 걸 왜 신냐고 혼낸 적도 있었는데. 아마 다 도움이 되니까 신는 거겠지?
유나에게 들은 바로는 신으면 다리가 예뻐 보인다고 한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다리를 봤다.
뽀얀 다리가 보였다. 반바지 아래로 군살 하나 없는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예쁘게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은 그런 신발 안 신어도 될 거 같았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유나한테 말하면 며칠 동안 삐져있을게 분명했다. 그게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기에 혼자서 살포시 웃었다.
버스를 타려고 서둘러서 그런지 조금은 들쑥날쑥한 숨을 고르며 서있을 자리를 잡았다. 땀은 나지 않지만 더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름은 아닌데 봄도 아닌 거 같은 날씨였다. 반팔을 슬슬 꺼내 입어야겠다.
“저기.”
누가 어깨를 건드렸다. 그 쪽을 돌아보자 한 젊은 남성이 서있었다.
학생처럼 보이는데 우리 학교 학생인지... 아님 막 대학생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서 조금 당황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무시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유나가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으니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야 했다.
나도 이제는 수정이처럼 바뀌고 싶었다. 그럴려고 오늘 나온 것이었다. 이제는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설령 상대가 남자라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왜 그러세요?”
“이 자리 앉으시겠어요?”
그런 결심을 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한 거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후... 이런 거 좀 안 해줬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거부를 해도 남자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권유를 했다. 그럼에 안 앉는다는 사실을 양손을 써가면서까지 전달하고자 애썼다. 예전보다는 많이 참은 거였다.
“저 이제 내리니까 앉으셔도 되요.”
그럼에도 역시나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였다. 내가 앉기를 바라는지 이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더 이상 했다간 소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흠... 감사합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니었다. 굳이 앉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도 그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하고 대화를 이어갈수록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기 때문이다. 계속 대화하면서 힘 빼는 것 보다 빨리 상황을 종료시키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앉은 상태로 몇 정거장이 지나갔다. 신경 쓰이게도 나에게 자리를 양보한 남자는 여전히 버스에 남아 있었다.
이제 곧 내린다는 건 어디다가 팔아 먹었는지... 기억을 상실한 게 아닐까.
속으로 욕을 하면서 그 남자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시했다. 말을 걸 거 같아서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보는게 오히려 경제적이었다.
그때 멈춰선 정류장에서 분홍색 보자기를 낑낑거리며 들고 계신 할머니가 버스에 타셨다.
여기 계속 앉아 있기에는 눈치 주는 자리양보남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럴 바엔 서서 가는 게 더 나았다. 그리 생각한 나는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심스레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여기 앉으세요. 할머니.”
할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손을 부드럽게 쥐셨다. 꺼슬꺼슬하면서도 탁한 손이었다. 젊은 나보단 역시 할머니가 앉으시는 게 더 좋겠지.
무엇보다 자리양보남이 싫은 거였다.
“고마워~ 학생.”
할머니에게 감사를 미소로 화답을 했다. 본의 아니게 좋은 일을 해서 썩 나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때...
[이번 정류장은 유리은행, 유리은행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안내방송을 듣고는 정차버튼을 눌렀다. 열심히 흔들리는 버스에서 움직여 뒷문으로 향했다.
으으... 예전부터 생각하는 건데 우리나라 버스기사아저씨들 운전은 너무 터프해서...
손잡이를 안 잡으면 날아갈 거 같았다. 손으로 넘어지지 않게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아가며 조심히 뒷문에 도착하자. 내 옆에 한 남자가 서더니 말했다.
“어?! 여기 내리시나 봐요?”
발연기를 하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속으로 짜증이 치밀었다. 유나야 나 많이 참은 거지...
이 자식은 포기라는 게 없나보다. 난 자리양보남을 슬쩍 보고는 무시했다. 그리고 폰을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엮기고 싶지 않았다.
"우연이네요. 같은 곳에서 내리다니"
그러든지 말든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리양보남이었다. 시대착오적인 작업 멘트를 날려댔다.
그 때 문자가 하나 왔다.
유나였다. 이곳에 없어도 도움을 주다니 정말 고마웠다. 합법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문자 내용은 어디쯤인지 물어보는 거였는데 폰에 보이는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도 아주 살짝 지나 있었다.
난 다 와간다며 답장을 보냈고 얼른 버스가 도착하기를 바랐다.
자리양보남은 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약속 장소까지 갈 때까지 여전히 옆에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굴었다.
자기는 뭐하는 사람이며 그쪽이 마음에 들어 말을 걸었다느니... 별의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해댔다.
나이를 보니 군대 물까지 드신 양반인데 나한테 이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저 고등학생입니다. 그만 가시죠.”
“그래? 고등학생이야? 어디 고등학교 다녀?”
나이를 말하면 떨어질까 싶어서 알려줬더니 말까지 놓으며 더욱 치근덕거렸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돌겠네... 이 남자를 약속 장소에까지 데려가 애들한테 피해는 주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서부터 점점 짜증이 차올라 한계치에 도달한 나는 마음을 다 잡기로 했다.
유나야 용서해라... 나는 여기까지 인가봐.
어떻게 멸시해야 이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 갈 길을 갈지. 잠시 생각했다.
자리양보남을 똑바르게 노려보자 외모 칭찬을 호들갑을 떨며 했다. 그에 주변 시선이 집중되어 낯 뜨거웠다. 진짜 민폐남이 아니라 핵폐기물급이었다.
“저기...”
짜증나는 짓 그만하고 꺼져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난 갑자기 깍지가 끼여진 오른손을 보곤 열리던 입을 다물었다.
크고 따뜻한 손은 난로가 손안에 있는 듯 후끈후끈했다. 커다란 손인데도 뭔가 익숙한 느낌. 그런 감상을 느끼는 자신에게 움찔하며 내 오른쪽을 바라봤다.
내 손을 잡은 태수는 자리양보남을 맹렬하게 바라봤다. 그러며 마치 보호하듯 등 뒤로 나를 숨겼다. 이 상황이 뭔가 묘했다.
“누구시죠?”
카페에서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와는 달랐다. 태수는 어디 데이트를 하러 가듯 빼입은 터라 몰라볼 정도였다. 키도 어릴 때와 다르게 크고... 턱도 날렵하고 코도 오뚝한 것이...
왜 갑자기 태수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고 있지?... 미친 건가.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임에도 눈빛으로 자리양보남을 때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두 남자 사이에 낀 자신이 한심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드라마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게 의외로 신기하기도 했다.
자리양보남은 태수의 기세에 눌렸는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 바빴다.
키도 태수가 조금 더 컸고 체형도 관리를 하는지 다부졌기에 한눈에 봐도 자리양보남이 밀리는 게 느껴졌다.
조잘조잘 시끄럽던 입이 딱 다물어진 게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니 정정한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상쾌했다. 오늘은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태수의 손이 맞닿은 곳에선 두근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내 거 인가 싶어서 반대쪽 손으로 맥을 짚어 봐도 아니었다.
깍지를 껴서 그런지. 상대의 심장소리가 바로 느껴지는 느낌. 굉장히 빠른 고동소리에 나까지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태수는 심장병이 있는가보다... 안 그럼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었다.
잡고 있는 손 탓인지 뭔가 안절부절 못하겠어서 이제 좀 놓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자리양보남은 아직도 우리를 살피고 있기에 섣부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나도 눈치가 없진 않으니까. 이 상황에서 태수를 뿌리치는 건 할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손 한번 잡은 걸로 거머리가 떨어져 나가면 나야 좋았다.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의 가장 큰 적은 남자친구인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임자 있는 여자는 건들면 안 되는 거니까. 그럼에도 찝쩍대면 호감이 아니라 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한참을 서로를 살피고 있던 그들이었다. 나를 한번 보고 태수를 한번 보더니 자리양보남이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도망치는 꽁무니를 보자 속이 다 후련했다.
상황이 종료되니 어째선지 태수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내가 물음에 태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심장 떨리네... 이런 거 처음이라.”
“손잡은 거?”
만약 사실이라면 그건 의외였다. 남자였던 내가 봐도 대학교에서 인기 많을 것 같은 훈남이었으니까.
내가 깍지 낀 손을 들어보이자 그걸 보더니 태수는 황급히 내 손을 놓았다. 떨어진 온기에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미지근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나 꽉 잡고 있었나...
그런데 너무 내 손을 내팽개치듯 놓아버려서 조금 기분 나빴다. 아무리 그 거머리한테서 구해주기 위해 잡은 거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걸로 확신했다. 태수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어쩐지 허전해진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태수는 뒷머리를 긁었다.
“손잡은 거 미안...”
“미안하긴. 오히려 고마워. 그 사람 때문에 난감했거든.”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자. 태수는 자신의 목덜미를 긁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진짜 사실이었네... 유나가 인기 많다고 그래서 설마 율이가? 했는데.”
“사실이라 기쁘니?... 나는 죽겠는데. 관심 없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말 거는데. 진짜 돌아버리겠다.”
“하긴... 그렇겠네.”
“괜찮은 방법이었어. 남친 행세하니까 바로 가버리네... 나 혼자였으면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 텐데.”
감정소모 없이... 불편한 시선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해줄 남자가 없기에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폐기되었다. 이번에 태수도 내가 아는 사람이라 이렇게 했던 거니까.
“딱 봐도 표정이 썩어가는 게 보이더라...”
웃으며 말을 잇던 태수는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대량으로 들어오는 문자폭탄에 유나가 분노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유나가 난리치기 전에 얼른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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