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조금은 편안해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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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는 작은 선의에 민감했다. 그들이 생활하는 보육원이라는 작은 세상에서 아이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흥! 뭘 그런 거 가지구 울어?”
“너가 밀어서 그렇잖아!”
9살 남짓한 두 명의 남자아이는 격해진 놀이의 탓인지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술래잡기를 하다 술래인 아이가 쫒기는 아이를 밀어버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힘의 가감이 잘 되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또래들과 놀면서 그런 걸 배웠다. 본래는 부모를 통해서 배우지만 보호자가 없는 보육원의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이 그 대상이었다.
당사자인 아이들은 당연히 그런 과정을 몰랐다. 그저 서로에게 심통이 나 토라졌다. 말소리를 높여가는 아이들의 주위로 같은 보육원의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이 정도의 소란이면 보육원 선생님들이 좀 있으면 나와 아이들을 정리하리라.
아무튼 구경꾼이 생기자 아이들은 누구의 잘못인지 토로하기 바빴다. 그런 편 가르기의 과정을 밟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까만 눈이 있었다.
작은 싸움이 일어난 옆 벤치에 무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이였다. 거기에 앉아 아이들을 관찰하던 서율이 작은 입을 꼼지락거렸다.
“야... 너희들 저로 가서 싸워. 시끄러우니까.”
아직 덜 발달한 발음기관 탓인지 어눌해도 말씨는 강했다.
보육원의 아이들 사이에서 서율은 괴짜로 유명했다. 자신도 아이면서 같은 아이들을 귀찮은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아직 어리더라도 저 아이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귀신같이 알았다. 주변의 감정을 빠르게 캐치하는 게 아이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서율이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서율은 보육원 선생님들에게 인정받는 존재였다. 아이임에도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는 서율을 싫어하는 선생님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원초적이다. 누가 보육원에서 가장 힘이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서율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너랑 안 놀 거야!”
자기보다 작은 서율에게 기가 죽었는지 아이는 오히려 큰소리를 냈다. 사과하는 말도 없이 밀어버린 아이가 떠나갔다.
“나도... 너랑 안 놀아!”
홀로 남겨진 아이가 그 아이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주변의 구경꾼들이 자기가 본래 하던 일을 하러 자리를 피했을 때, 남겨진 아이는 서율을 흘겨보고는 여느 아이들처럼 발을 옮겼다.
“너, 그거 약 꼭 발라. 흉터 진다.”
넘어지면서 생긴 아이의 상처를 서율은 담담히 바라봤다. 그런 행위에 남자아이는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뭐든지 다 안다는 눈빛이 어쩐지 마음에 안 들었다.
“침 발라두면 나아!”
그럼에 상처를 낸 게 서율이 아님에도 말이 강하게 나갔다. 그리 말하고도 서율이의 눈치를 봤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율은 선생님들이 있는 한 보육원에서 무적이었다.
“침 발라서 나으면... 이 세상에 약이 왜 있니. 맘대로 해... 바르든지 말든지.”
아이의 강한 언성에도 여상했다. 일단 다친 아이에게 신경써줬으니 어른의 의무는 다했다는 게 서율이의 생각이었다. 서율은 진짜 상관없다는 듯 아이들이 오기 전부터 하고 있던 사색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게 뭔가 어이가 없었다. 아이는 잠시나마 보인 서율의 걱정스러운 검은 눈동자를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러다 아이는 선생님에게 가서 반창고를 하나 얻어왔다. 아이가 서율의 옆에 앉자. 다시금 서율은 아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쉬는데 방해되는데.”
“나도 쉬려고 온 거야. 조용히 하고 있을게...”
“내 벤치도 아니고 상관없나...”
아이는 서율이 자리를 피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율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아이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로 한 듯 주변을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눈길을 줬다. 그게 자신을 인정해 준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원인 모를 즐거움에 아이는 반창고를 뜯어 흙이 묻은 상처부위에 그대로 가져갔다. 그때 작고 따뜻한 것이 반창고를 붙이려는 손을 막았다. 그건 서율이의 손이었다.
“야! 씻고 소독하고 붙여야지. 따라와.”
“야 아니고 태수인데.”
“그래. 태수인지 뭔지... 암튼 따라와.”
손을 붙잡힌 태수는 서율이에게 질질 끌려갔다.
수돗가에 앉은 서율은 태수에게 손짓해 앉혔다. 물로 상처를 씻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고. 그 뒤로 소독하기까지 태수는 서율에게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고아는 작은 선의에 민감하니까.
태수와의 약속 날이 다가왔다. 이 날이 오기 전까지 시험을 대비해 미친 듯이 공부하는 척을 했었다. 시험 전전날 놀러가는 딸이 보내는 부모님에 대한 예의였다.
다 머릿속에 있던 내용이었던 거라 확인 작업을 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역시 고등학교 공부는 다시해도 귀찮았다.
나에겐 주말에 밖을 나간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는데 최근 몇 주간은 빠지지도 않고 매번 나갔다. 자발적으로 원해서 나가는 게 아니라 항상 약속이 만들어졌다.
대체로 유나하고의 약속이었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태수가 먼저 만나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히 유나하고 태수를 동등하게 볼 수는 없었다. 둘 다 어렸을 때 알았던 아이들이었어도 그 결이 달랐다.
유나와는 7살 이후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왔다. 거기다 동성이라는 게 꽤 컸다. 아마 남자였다면 나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을 중학생 때. 이미 척을 지고 말았을 지도 몰랐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더욱 성격이 더러웠었다.
태수는 같은 보육원 출신에 과거 어렸을 때의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고아인 것도 동등했다. 친구 만들기에 서툴러 어딘가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던 그 시절, 유나와 같이 곁에 있어준 인물. 하지만 나 먼저 입양을 간다는 죄책감인지 왠지 모를 미안함에 보육원에 가지 못하게 되어 그 뒤로는 만날 수 없었다.
사실 그 미안함도 잠깐이었다. 가족에게 녹아들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하느라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아무튼 태수는 어떻게 보면 내가 처음으로 순수하게 대한 이성친구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라도 나는 그때와 정신연령은 그닥 변하지 않았다. 원체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그렇게 태수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하니 맨몸으로 전쟁을 나서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약속시간 까지 약 2시간 정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긴 머리를 감고 나니 10분 정도가 흘렀다.
스킨과 로션 선크림까지 바르고 수건으로 말아놓은 머리카락을 말리자 30분이나 지나가있었다.
빗질을 하고 한참동안 멍 때리다가 옷장을 열어 옷을 뒤적거렸다.
거기서 난 멈칫했다.
“뭘 입어야하지?”
침대 위에 옷을 펼쳐 두고 이렇게까지 머리를 굴리며 고민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오히려 시험문제 보다 어려운 게 옷 고르는 게 아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옅게 들리는 초침 소리에 방에 걸린 시계를 봤다.
“으아! 시간이....”
어떤 사람이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할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여유를 가지고 한 1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해 주는 게 예의였다. 약속 장소 까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리니까. 걸어서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간을 계산하면 조금 빠듯한 시간대였다. 내가 서두를수록 시간이 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냥.... 대충 입자.”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거에 신경을 썼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에 걸려 예전에 엄마가 골라 옷장에 넣어준 무난한 옷들을 골라 착용했다.
약속 시간이 다되어 감에 따라 은근 초조해졌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겉모양을 확인하곤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방문을 열자.
“혼자 중얼중얼... 어디를 가길래 그래?”
엄마가 방문 앞에 서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도통 모르겠다...
“엄마?”
엄마는 눈을 얇게 뜨더니 내 옷을 살펴봤다. 그리곤 무심하게 툭 던졌다.
“예쁘게 입었네?”
그에 당황했다.
“어? 아니... 그냥 옷장에 있는 거 입은 거야.”
그런 반응에 엄마는 콧소리를 내더니 내 어깨를 잡았다.
“남자니?”
“남자도 있고... 유나랑 수정이도 같이 가는데?”
엄마는 기쁜 듯 손뼉을 쳤다.
“흐응~ 드디어 우리 딸이 남자친구를 만들었구나?”
“그런 거 아니야. 엄마. 유나랑 수정이도 간다니까?”
“아니긴....... 늦은 거 아니니? 얼른 가보렴~”
엄마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어보였다. 이미 자신의 세상 속인 듯 발걸음은 가벼웠으며 내 주변을 돌며 옷을 정리해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엄마 말대로 늦기도 해서 변명도 하지 못한 상태로 현관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에 정정해주고 싶었다.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
“엄마, 남자친구 같은 거 아니니까... 왜 듣고 싶은 말만 들어요?”
“이 애가 엄마를 뭘로 보고. 엄마만 알고 있을게”
“아니라구...”
난 다시 한 번 부정하려고 했는데 엄마는 나를 떠밀었다.
“남자친구 기다릴라. 얼른 가, 우리 딸.”
그 말을 끝으로 난 집 밖으로 밀려났다. 아무리 딸이 남자를 안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대우는 너무했다.
“이제 출발하는데 기운이 다 빠져...”
주변에서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결국 내 자신이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가 중요했다. 그렇게 자신에게도 자기최면을 걸며 약속장소로 가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