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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도 괜찮아-11화 (11/54)

〈 11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 * *

힘이 되어 주겠다는 유나의 말이 너무나 기뻤다. 항상 내 편이라는 말도 세상을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눈시울은 자연스레 달아올랐고 이내 촉촉하게 물들었다. 울고 싶지 않았다. 절대 울고싶지 않았는데도 유나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니 안 울기가 힘들었다.

“쿠슷!”

“뭐야 그게! 귀여워~”

코끝이 징징 울려서 작은 기침을 하자. 유나는 나의 볼을 살짝 잡아 당겼다. 전생의 내가 우는 걸 봤으면 유나는 끔찍해서 못 봤을 텐데. 그게 이 껍데기 하나의 변화로 호감을 줄 수 있다는 건.......... 참 미묘한 일이었다. 전생의 자신, 의문의 1패.

유나와 나란히 5교시를 날렸다. 둘 다 눈시울이 퉁퉁 부어서 이 상태로는 교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잔소리를 듣더라도 다행인건 우등생이니 별소리 안하시고 넘어갈지도 몰랐다. 우등생 연기도 의외로 쓸 만한 것 같았다.

아무리 유나에게라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분명 믿고 있다. 내편이 되어 준다고 해도. 진실을 말하기는 꺼려졌다.

유나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 하면 유나는 반드시 들어주리라.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들어 줄 수는 있어도 이해 못할 것들뿐이었으니까. 환생? 전생에 남자였던 거? 어느 것 하나 이야기 해 줄 수가 없었다. 나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유나인 것은 확신했다. 그렇지만 말 할 수 없어서 또 나의 상처들은 방치되고 무뎌진다.

“그만 가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5교시 쉬는 시간 종도 울렸고 슬슬 가지 않으면 6교시 시작 종이 울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유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일어난 나를 매섭게 노려 볼 뿐이었다.

“또 이야기 안 해 주는 거야?”

유나의 호소에도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도 답답했다. 털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유나는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해 줬으니까.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뻐끔거리는 입술은 다시 닫히고 만다.

이해할 수 없다.

현실적이지 못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처한 상황은 이러한 일들뿐이었다. 털어놓은 후 유나가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말 하고 싶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유나도 사람이었다. 찰나 할 순간 나를 향해 ‘무슨 말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금 되물을 것이고 혹시 거짓말이라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건 나에게 악몽이었다.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미안해.........”

유나가 더 이상 듣기 싫을 사과만 툭 내뱉었다.

“그래? 그럼 이거 하나만 약속해.”

예상한 반응과 대답인지 유나는 동요도 없었다.

“뭔데?”

“내 곁에서 사라지지마,”

“.........”

“대답해!”

독촉했다. 무엇이 유나를 이렇게까지 흥분하게 만든 걸까.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저 약속에는 답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하나 남은 마지막 도주로였으니까. 그것마저 없다면 이 세상은 나에게 너무 잔인했다.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머리 한구석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뒀다.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 상황에서 벗어나면 되었다.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인생 자체를 로그아웃 해버리면 됐다. 그렇게 항상 도망쳐 왔다.

“이게 고민할 약속이야?”

유나가 슬퍼한다.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오늘 죽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약속할 수가 없네.”

이건 말장난에 불과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에 유나의 고운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따라갈게.”

그 말을 들은 나의 사고가 정지했다. 내가 없어도 유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 같은 친구가 없어지면 유나는 행복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그냥?”

이 대답이 장난인지. 혼란스러웠다.

“알겠어. 약속할게.........”

마지못해 답했다. 내 죽음이 유나를 죽인다면... 그건 안 될 일이었다. 내 마지막 사람 그리고 소중한 친구니까. 내가 행복하지 못해도 너만은 그러지 말아야했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으니 괜찮겠지... 이 생각이 나에게 해주는 유일한 위로였다.

*

학교를 마치고 나는 자연스럽게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다가 멈칫했다.

“집에 가기 싫은데...”

혼잣말을 내뱉으며 버스를 올려다봤다. 앞에 놓인 버스가 지옥행 버스 같았다. 가만히 서있는 나를 보며 버스기사님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학생 안 타니?”

“다음 거 탈게요.”

대답이 끝나자 매정하게 버스가 떠나갔다. 결국 나는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생각할 것도 있었다. 복잡한 감정에 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를 지경이었다. 사진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생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정도면 나도 이해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사진이 내가 잠자고 있을 때 몰래 찍은 사진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사진 뒤에 써진 사랑고백 같은 글귀가 더욱 문제였다.

난 정상적인 가족을 모르기에 그랬다. 여동생의 사진에 사랑한다는 말을 쓰는 오빠가 몇이나 될까?

오빠와는 잘 지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내가 남자였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꼭 나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 오빠의 기를 세워주기 위해서 힘냈다. 남자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그 부분을 건드려 주면 민감하게 반응했다.

난 언제나 오빠 편이었으며 그걸 숨기지 않았다. 표현했고 그럴 때 마다 오빠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더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족이 되는 길이었으니까. 내가 아는 방법은 그 뿐이었다. 이게 정답이 아니라 한다면 뭐가 더 있었을까?

남자였던 적은 있어도 여자였던 적이 없었다. 심지어 가족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새로운 가족에 대해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오빠에게 한 행동들이 다 옳은 거라고 여겼다. 그 행위에 거침이 없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요지경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나 오빠의 마음 틈에 들어와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답이 보이질 않았다.

“.........”

눈을 떴는데도 눈앞이 캄캄했다. 점점 어둠에 먹히듯 정신이 아득해지는 감각이었다.

“언니? 뭐해?”

그때 앙증맞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옷깃이 잡아당겨졌다. 그 동글동글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를 한번 내려다보곤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상가 쪽으로 와버렸나 봐. 인도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있었는지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봤다.

땅에 닫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그렇게 시점이 낮아지자 아이와 눈높이가 맞았다. 아이는 아이 특유의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나도 그에 따라 웃었다.

“언니, 엄청 예뻐!”

“고마워.”

손을 올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해주는 칭찬이었다. 곱게 받아드리지 못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았다. 아이가 아니라 남자가 했다면 거부했겠지........ 남자 아이까지는 허용범위였다.

검은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아이는 한 눈에 봐도 귀여웠다. 아직 아이기 때문인가 젖살도 가지고 있어서 무심코 꼬집고 싶었다. 뉘 집 자식인지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건 범죄니까 그만두자.

범죄 생각은 접고 아이하고 눈을 맞췄다. 뭐가 좋은지 아이는 배시시 웃었다.

“혼자 왔어?”

“아니, 오빠랑 같이 왔어.”

오빠라..... 그 단어를 들으니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이 아이와 오빠는 어떤 관계일까? 적어도 우리보다는 평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이 남매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

“와......”

익숙한 남자 목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최승현이 거기에 있었고 나도 슬그머니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왜 놀래는데?”

“의외의 인물이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목소리를 흘렸다. 남자가 되가지고 아직도 꽁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꽁해 있을 만큼 화를 낸 건 맞았다. 욕도 하고 언성도 높였으니 승현도 나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기 힘들었다.

“지은아 가자. 이 언니 바쁜 언니야.”

최승현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이동하려 했다. 당연히 나에게서 도망가려는거다. 날 보기 싫은 것도 충분히 이해했다.

그나저나 이 애의 오빠가 최승현이라니. 궁금한 게 생겼는데 살짝 물어보기 꺼려졌다. 모르는 사이였다면 다짜고짜 물었겠지... 근데 아는 사이라 거부반응이 일었다. 그래도 지금뿐이었다.

당장 이 의문을 풀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못하니까.

“잠시만...... 물어볼게 있어.”

“네가? 나한테?”

“그러게...... 이 내가 너한테.”

그리 말하자 발걸음을 멈추는 최승현이었다. 솔직히 무시하고 갔어도 난 아무 말도 못했을 건데. 조금은 고마웠다.

승현에게 물어보려는 건 조금 쑥스러운 질문이었다. 내가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그 단어를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소름이 돋았다. 입술이 떨리다 못해 펄럭거렸다. 그래도 최승현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고자 했다.

“넌 네 동생, 지은이 사.............라........ㅇ하고 있어?”

혓바닥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못했다.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거웠다. 나하곤 연이 없는 단어였다.

“다시 한 번만. 사? 뭐라고 한 거야?”

짓 굳은 놈일세........ 정말로 못 들은 건가. 내가 이렇게 부끄러움을 참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특별히 한 번만 더 이야기해 주지. 이번엔 눈 딱 감고 이야기했다.

“지은이. 사랑하느냐고.”

“그건 가족으로써 사랑하느냐. 이걸 묻는 거지?”

“응.”

“뭘 그렇게 부끄럽게 물어봐. 아무튼 사랑하지. 당연한 거야. 가족이니까.”

승현의 입을 통해 자연스레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정말 순수하게 느껴졌다.

최승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지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 지은이도 환희 웃었다. 아니꼽지만 눈부신 남매였다.

“고마워. 대답해 줘서.”

“아니야....... 나도 저번엔 미안했어.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지.”

“됐어. 그건 이미 끝난 얘기야.”

원하지 않는 배려로 그는 나를 괴롭혔다. 분명 선의의 행동이었다. 그래도 나에겐 폭력이었다. 성의라고 해서 모든 게 용납되는 건 아니었다. 그에 화가 나서 그에게 서로 상처를 입혔다.

최승현이 싫었다. 그렇기에 그와 연관되어 버렸다. 그가 싫든 좋든 나는 그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유나가 좋아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아야 하니까.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이라는 가정이 붙겠지만.

“난 이만 가볼게. 지은아 다음에 보자.”

“응, 언니 잘가아~”

지은이는 자신의 오빠의 손을 놓고 나에게 양팔을 흔들어 주었다. 정말 귀여운 지은이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발장을 살폈다. 오빠 신발이 놓여있었다. 아직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나보다. 일찍 들어온 것인지 어떤지는 몰랐다. 여하튼 오빠가 집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질질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족을 포기할 순 없었다. 두 번의 기회가 나에겐 주어졌었고 첫 번째는 처참했었다. 두 번째인 지금은 아슬아슬 하지만 그런대로 유지는 하고 있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부셔지게 보기만 할 순 없었다. 그걸 막기 위해 난 오빠의 감정을 이용할거다.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기에 오빠는 나에게 미안해했다. 그래서 어제는 간접적인 물음에도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내가 느낀 것은 오빠의 죄책감이었다.

“오빠. 집에 있어?”

난 거실에 들어서며 소리를 냈다. 이 시간에 아빠는 회사에 갔다. 엄마는 장보러 가셨는지 모습을 들어 내지 않으셨다.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오빠는 답이 없었다. 다행히 그때.

삐걱­

2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있었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나는 긴장했다.

가방 속에 넣어둔 아침의 그 사진을 꺼내들었다.

오빠 제발... 제발... 내 꿈을 부수지 말아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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