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 * *
난 테이블에서 스토커로 오해한 남자애 앞에 앉았다.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내 평생 살면서 이런 적은 없었다. 척을 진 상대는 무조건 남이었는데.......
“나한테 할 말 없음?”
툭 내뱉은 그의 말에 움찔했다. 분명 놀랬는데 표정을 가다듬었다.
“별로?”
“이미 아는 사이야?”
유나는 내 옆자리에 앉아 미리 주문해 놓은 커피를 마셨다. 그런 유나의 모습에 난 속으로 생각했다. 어른이네 벌서 커피를 마시다니. 다 큰 딸내미를 보는 기분에 사로잡히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남자애는 맹렬히 나를 노려봤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저쪽도 유나 이름을 언급했으면 그런 식으로 오해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우선 아까 있었던 일은 사과할게. 미안.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거야.”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를 오해한건 사실이었다. 내 성격 탓에 타인에게 무안함을 안겨줬다.
사과하는 나의 모습에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남자애는 놀라다 못해 자지러졌다. 유나는 내가 사과를 할 정도니까 꽤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이해가 됐을 것이다.
“뭐야? 사과하라는 거 아니었어?”
그러나 남자애가 저렇게 까지 반응을 보이면 미안했던 감정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기껏 사과했는데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대답조차하지 않는 건 더럽지 않은가.
남자애는 열려있던 턱을 원상태로 돌려놓고선 의아해했다.
“사과 같은 거 빈말이라도 안 할 것 같았는데......”
“아니야. 율이는 끝맺음이 확실해.”
역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나이다.
이 몸으로 변하면서 느낀 거였다. 어정쩡한 반응으로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도 어정쩡한 맺음이 유지됐다. 유지만 된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그런 약간의 관계가 접근의 여지가 되었다. 한명도 빠짐없이 말이다. 나의 경우 그랬다.
내가 봐도 나의 외형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걸 뽐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나의 정체성과 문제가 있으며 지금 까지 살아온 삶에 무게에 반하는 행위였다. 나는 사람이 싫고 사람이 좋다. 자세히 말하자면 나를 모르는 사람은 싫고 나를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좋다.
다들 그렇지 않나? 하고 반박할 수 있는데 나의 경우 이게 극단적이었다.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 있는 곳이 나의 세상이며 움직이는 범위였다. 그 이상은 타지였다. 거기에 발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잠시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 남자애를 통해 사건을 들었는지 유나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승현아, 어딜 그냥 넘어가려고 그래? 네가 잘 이야기만 했어도 됐잖아. 율이는 이상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에 어떤 용건으로 말을 걸었는지 잘 알려줘야 한단 말이야.”
저기 유나 씨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그런다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는데요? 어........ 생각해보니 대체로의 사람들에게 적대반응을 보이는 구나. 특히 남성들에게 그랬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남자였던 내가 남자들과 어떻게 잘해볼 수가 있겠는가. 단지 그런 이유다. 친구라면 어떻게 생각은 해보겠는데 남자던 여자던 간에 모르던 사람과 사이좋게 만남을 유지할 수 있는 내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의 성은 아직 모르겠지만 유나의 말을 들었을 때 이름은 승현인거 같았다.
승현은 자신이 이상한 사람 소리를 듣는 게 억울했는지 유나의 말에 살짝 발끈했다.
“뭐?! 내 잘못이야?”
“율이 처럼 귀여운 애가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잖아?”
유나의 말에 승현은 나를 힐끔 본다. 나도 힐끔 승현을 바라봤다.
“음.....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네. 미안...... 내가 태어난 게 죄로구나.”
본의 아니게 치명타를 먹여버린 것 같았으나. 나의 외모 효과에 편승해 죄를 무마할 정도로 악녀는 아니었다.
“아니야. 내가 오해해서 미안해.”
이걸로 스토커 오해 건은 끝난 거지? 감정싸움 없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런 것보다 승현이가 부른 용건에 대해 궁금했다. 나와 전혀 접점이 없던 사이임에도 유나에게 부탁해서 만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승현아. 왜 보자고 했어?”
내가 남자애를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생기다니. 성을 모르니 불편하다. 물어볼까? 이름 같은 거는 첫 소개에서 하는 건데. 소개하기 전에 스토커로 오해하고 사과하고 등의 많은 일들이 있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거? 우리 반에 너 있다고 하니까. 유나가 너랑 친구라잖아? 그래서 한번 보고 싶다고 했지.”
“유나가? 아니 이것부터 물어보자. 너, 유나랑 무슨 사이야?”
지금 이건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하나뿐인 유나에게 남자친구라니. 딸처럼 오냐오냐하며 애지중지 키운 유나를 간단히 넘길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유나 아버지에게 유나 좀 잘 부탁한다는 소리는 내가 들었단 말이다!
이미 남자친구라고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벌써부터 흥분해 있을 필욘 없었다. 아까부터 보이는 유나의 풀어진 표정은 너무도 귀여웠고 승현에게 스스럼없는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아 오래알고 지낸 사이라고 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촉으로는 그렇고 그런 거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달려들어서 따지고 싶지만 아까전의 잘못도 있고 지금은 그들에게 사실 확인을 받고 다음 행동을 정해야 했다.
승현을 칼로 찌를지.
승현을 포크로 찌를지.
감히 유나를 괴롭힐 수는 없기에 승현이 나의 주 타깃이다.
물음에 대답한 것은 승현이 아니라 유나였다.
“승현이는 소꿉친구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게 적당하지 않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소꿉친구라니!? 그거 들은 적이 없었다.
유나하고 난 유치원시절 부터의 사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었기에 만나고 그러기는 힘들었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소홀함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떨어지더라도 유치원 시절 때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만났던 것 같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유나가 방과 후 나 이외의 친구를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같은 학교에 들어갔다. 적어도 고등학교에 들면서 사귄 친구들은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사실이 떨떠름하고 당황스러웠다.
“대체 언제?”
“율이 하고는 정말 자주 놀았지? 그래도 율이 집하고는 거리가 꽤 있으니까 저녁 전에는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갔잖아. 그때마다 애도 놀다오는 길인지 승현이하고 자주 만나게 되었어. 같이 놀지는 않았지만 인사는 하는 정도? 딱 그 정도였는데. 율이도 알다시피 우리 초등학교 따로 나왔잖아? 아는 친구가 있을까 했더니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가니 승현이가 떡하니 있는 거 있지.”
유나는 친절히 모든 걸 말해주었다.
즉 내가 없는 곳에서 만든 친구였다. 그런 거라면 내가 모를 만도 했다.
어린 유나는 초등학교에 올라가서 다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꺼려진다고 했다. 그럼에 유치원 때부터 얼굴은 알던 사이인 승현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런 별것 없는 내용인데. 왜 난....... 이렇게 실망한 거지?
지금 유나는 나 이외에도 친구들이 많았다. 중학교를 거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사귄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른 친구들한테는 별 감정이 없었다. 유독 승현에 관해서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거부반응이 일었다. 승현이라는 친구가 유나가 사귄 중학교 고등학교의 친구들과의 다른 점은.......
그가 소꿉친구라서? 나만 가지고 있던 단 하나뿐인 자리.......?
순식간에 떠오른 생각에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생각이었다. 소꿉친구라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은 없었다. 그걸 유나에게 강요한다면 상대에 대한 오만이고 기만이었다. 그럼에도 것 잡을 수 없이 그 오만한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자리야. 아무도 뺏을 수 없어. 유나는 내꺼야.
이미 소꿉친구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들이 요동쳤다. 미쳤다. 소유욕으로 무장된 마음이 날뛸 것 같았다.
입술을 물어뜯으며 감정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최근 들어 점점 심해진다. 이런 감정의 기복은 좋지 않았다. 강하게 짓이겨진 입술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제야 심장박동소리가 가라앉았고 정상적인 생각이 가능해졌다.
승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그런데, 서율. 유나한테 소꿉친구 스킬 가르쳐준 거 너야?”
“.......”
에이........설마? 츤데레 캐릭터와 소꿉친구라는 위치가 만들어내는 최고의 콜라보. 츤츤거리며 아침에 깨워주기. 가볍게 알려주던 어릴 적 추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걸 승현한테 했다고?
“아침마다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
“진심이야?!”
나한테는 한 번도 안 해줬는데! 아니 어릴 때 그 스킬을 가르쳐 주면서 딱 한 번 해줬던 것 같은데.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슬림 체형이면서도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성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유나에게 아침에 깨워주기를 받다니.
부.....부러운...... 아니 저질스러운 놈. 그리고 괴롭다니 뭐가? 즐거운 게 당연한데 괴롭다는 표현을 쓰는 승현이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떠오른 게 있었다. 남자라면 겪는 아침에 피해 갈 수 없는 불편함. 집 안에 누군가가 있다면 가라앉을 때 까지 침대를 떠날 수 없는 형벌과도 같은 현상.
남자의 자연현상을 모조리 알고 있는 지라 괴롭다는 승현의 말은 좀 거슬렸다. 그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승현을 노려봤다. 움찔하며 등받이로 몸을 빼는 승현이다. 그런 반응을 보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마다 세우느라 고생이 많네?”
“커헉!!”
나의 말에 승현은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아마 그런 표현 자체를 이해 못할 줄 알았나보다. 미안하지만 내가 남자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단다.
“무슨 얘기야?”
승현과 나는 유나의 순수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아직 유나에게는 이 상태로 있어줬으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남성에 대해 자세하고 올바르게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함구하고 있자. 유나의 호기심은 승현에게 가버렸다.
아침에 배가고픈 것 때문에 괴롭다. 에서부터 시작한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코끼리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로 변질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결국 승현은 유나와 동물원에 가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 유나는 나하고 까지 약속을 잡고는 시험기간이 끝나고 결국 3명이서 동물원에 가게 되었다. 저런.........
“어떻게 나한테 다 떠 넘기냐?”
“여고생한테 그딴 이야기 한 것부터가 성희롱이야. 지금부터라도 끼니마다 콩밥으로 챙겨주는 파라다이스로 가버리는 게 어때?”
“그건 거부한다.”
승현도 자각은 있는지 고개를 돌리며 미안해하는 눈초리 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나와 승현은 안 어울린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해서 그런 그림 같은 사랑을 한다면 모를까.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게 키운 유나가 승현을 좋아한다니.
이게 딸을 보는 아비의 마음인가? 꽤나 고통스럽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현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걸었다.
“소꿉친구끼리 친해지는 게 어때?”
즉 나랑 친해지고 싶다. 이건가? 저돌적이면서 뜬금없었다. 열이 받았다. 아침마다 그런 좋은 헤프닝을 받으며 으쌰으쌰하고 있는 너하고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소꿉친구의 소꿉친구는 라이벌이지.”
“남남 선언보다는 좋지.”
말이나 못하면.....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나하고는 남이 되는 편이 좋을 거야.”
유나가 승현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좋은 방법이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승현이 유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유나는 내 소중한 친구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니까.
예쁘고 사랑스러운 유나다. 한번 빠지면 이 저질 변태 승현도 해어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유나와 승현이 절교를 하던지 남자친구가 되던지.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꿉친구 자리에는 나 혼자 만이 남을 수 있었다. 이건 꽤나 매력적이기에 반드시 성공해야했다.
우선.................
“유나가 승현을 싫어하게...........”
지금부터 하려는 건 용서 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했다.
여동생의 자리도 딸이라는 자리도 친구라는 자리도 언제 부서질지 몰랐다. 언제 나사가 풀려 떨어질지 모르는 징검다리와도 같았다. 가장 견고하다고 자부하는 유나의 마음 속 한자리, 나에게서 딱 하나 남은 유일한 안식처인 소꿉친구라는 자리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딱 그것만 내가 바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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