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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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합쳐서 2번의 휴가가 있었다.
처음에는 휴가라는 말도 없이 집에 찾아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가 날짜를 알려주며 나에게 꼭 와달라는 말을 듣고 의아했다. 갑작스럽게 전화로 약속이 잡히고 말았다. 이걸 약속이라고 할까? 일방적인 통보라고 하는 게 맞았다.
부조리에 부조리를 담아놓고 그대로 숙성시킨 그 곳에서 버텨본 나에게는 눈에 선명하게 상황이 그려졌다.
현역 동기든 선임들이든 군대 아저씨들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게 분명했다.
오빠가 스스로 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도 아니었고. 뭐든 오빠의 물품에서 무슨 낌새가 있었겠지. 끽해봐야 가족사진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의 존재가 알려졌고 선임에게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그런 간단한 문제다. 근데 나..... 여고생인데. 경찰마려운 상황이 아닌가.
아무튼 오빠는 별 수 없는 상황에 내 얼굴을 공개해 군대 생활에서 꿀을 빨아보겠다. 는........ 뭐 그런 거였다.
내가 군대에 가본 봐로는 가족 중에 여형제가 있는 것은 꽤나 도움이 됐다. 꼭 여형제여야만 했다. 여자 친구는 애매했다. 예쁜 여자 친구는 더욱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것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의외로 신경이 쓰였다. 나도 자대에서 여자 친구 편지 받았다고 자랑해대는 동기의 뒤통수를 갈겨버린 적이 있었으니 말 다했다.
그 여형제가 예쁠 때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다리를 놓아 인연을 맺어보겠다는 그런 심보였다.
그런 의도로 해서 얼굴이 팔려나간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번엔 내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얼굴 보여준다고 해서 닳는 것도 아니니 좋다고 치자. 실제로 그렇게 여형제를 가지고 있던 애들은 군 생활이 아주 조금이나마 수월해 진 것은 사실이었다.
오빠를 위해서니 딱 한번이야 괜찮을 것 같았다. 이 이후로 다른 부탁은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터미널에 들어왔다. 사람이 떠나고 사람이 들어오는 곳, 이래 모든 터미널이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터미널 입구가 훤히 보이는 기둥에 기대 죄 없는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두드리며 시간을 때우기를 몇 분, 아니나 다를까 많은 시선들이 느껴졌다.
몰래 본다고 보겠지만 시선이라는 것은 시선을 받는 사람에게는 느껴졌다. 사람의 눈길이라는 게 촉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처음에는 불신했는데 이게 감각적으로 전해지는 거였다. 그걸 이런 몸이 되고서부터 알게 되었다.
여자는 시샘의 눈으로 남자들은 호감의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중학생 때부터 많이 받아본 시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벌레가 몸을 스멀스멀 기는 것처럼 꺼림칙했다. 내가 본의 아니게 예쁜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쳐다보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은 그렇다는 것이나 그게 이루어 질 일은 없었다. 매번 사람들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 시선에 매번 안절부절 못했다.
시선을 무시하고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주위를 빙 둘러봤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나와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선 눈길을 돌려 제갈 길을 걸어갔다.
이내 매표소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바라봤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한 무리가 있었다.
그때 한 남학생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 좋은 예감? 이딴 건 생각하면 안 된다. 나의 안 좋은 예감은 매번 다 들어맞았다.
제길..... 나 이미 생각했구나.
아니나 다를까. 날 본 후 자신의 주위 학생들을 불러 모으더니 가위 바위 보를 하기 시작했다. 한명 빼고는 환호성을 질렀고 그 한명이 주뼛주뼛 다가왔다. 그의 행선지가 내 쪽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어림도 없는 바람이었다.
그는 나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고선 얼굴을 붉혔다.
이거 그거지? 자주하는 그거.
“......뭔데요.”
“저....... 저기.”
“번호 달라고요?”
초조한 마음 때문인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남학생이었다. 그 남학생은 무척이나 설레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초리였다.
미안한데 그 기대에는 부응할 수 없었다. 나에게 기대해서 받을 수 있는 거라곤 매도 뿐 이다만. 키 차이 탓인가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교복을 바짝 줄이고 머리칼에 힘 좀 준 것이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날라리처럼 보였다.
“예,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번호 드릴게요. 연락하시던지 말던지........”
“예?”
나의 대답에 남학생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서있는 학생에게 가지고 있던 종이 쪼가리 하나를 건넸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챙겨왔지.
여기에는 내 번호가 아닌 아무 번호나 적혀있었다. 번호를 주긴 주는데 내 번호가 아닌 작전이었다.
총각....... 다른 사람 찾아보렴. 이 아저씨는 너희 같은 것들에게 관심 없어요. 팔짱을 끼며 그 남학생을 올려다봤다. 아 진짜 역시 키는 중요했다. 키로 인해 자신이 살짝 제압되는 감이 있었다. 이 느낌이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남자일 때는 170은 가볍게 넘었었는데...... 에효.
“용건은 끝났죠?”
“예? 예......”
내가 쪽지를 넘긴 걸 봤는지 뒷쪽에서는 휘파람 부르고 난리도 아니다. 지들이 전화해서 창피 당할지도 모르고 설레발 치는 게 좀 통쾌했다.
“그럼 수고요.”
내 대답을 끝으로 쪽지를 받아든 남학생이 자신들의 무리로 기쁘게 뛰어갔다. 너무 기뻐해서 좀 미안하네.
아주 개미 다리털만큼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웃음소리도 들렸다. 내가 아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연예인이 따로 없네.”
“윽....... 이 끔찍한 목소리는......”
“끔찍하다니.......”
뒤 돌아보니 몇 개월 새 근육이 더 붙은 오빠가 서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훤칠한 부러운 키. 본래 또렷한 이목구비가 살이 빠진 탓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짧은 머리에 군복을 착용한 모습, 각 잡힌 베레모, 영락없이 휴가 나온 군인이었다. 그럼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코를 막고 최대한 발랄하게 말했다.
“어휴... 냄새난다. 군대 냄시......”
“뭐냐, 그 말년병장 같은 분위기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난 이상의 여동생을 연기하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이게 옳은 거라고 확신은 못하지만 최소한 나의 판단으로는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건 형제지간에선 중요하다고 내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말년병장이라는 말에 조금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넘겼다.
오빠는 내 머리에 큼지막한 손바닥을 올렸다. 키 한번 엄청나게 크네. 혹시 매번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면서 양분을 가져가는 게 아닐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오빠의 손을 가볍게 떨쳐냈다.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남자가 머리를 쓰다듬는 건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살짝 부끄러워하는 척 웃었다.
“뭐야? 동생이라며?”
“동생 맞습니다.”
“내가 보기엔 여친처럼 보였는데?”
이제 보니 오빠 뒤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각자 한마디씩 하며 나를 내려다봤다.
하나 둘 셋....
작대기 세 개의 위엄이란....... 지금의 나는 민간인이라 그게 주는 힘을 몰랐다. 아니 정말 잘 아는데 모른 척 해야지. 지금 저게 효과를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빠 정도였다.
그나저나 휴가면 자기네들 집이나 들어갈 것이지 여기는 왜 온 것일까. 저들이 나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귀찮게 내가 여기에 있는 거였다.
분노가 차오르지만 짜증 내서 무엇 하리 얼른 이 시간이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다. 이제 내 얼굴 봤으니 제발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마음과는 반대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왕 돕기로 한 거 끝까지 해야 했다. 나의 웃음에 다 큰 어른 2명이 얼굴을 붉혔다. 경찰아저씨 불러야할까?
“이름이 서율이야?”
“네.”
“혹시 남자친구는 있니?”
“없어요.”
만들 생각도 없어요. 그냥 없어요.
“그럼 전화번호 받을 수 있을까?”
왜 이리도 내 번호에 다들 관심이 많을까. 이정도면 번호 팔아서 장사해도 되겠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내 번호를 못 얻어서 안달이었다.
갖은 질문을 던지는 두 군인들에게 대충 대답을 돌려주기를 몇 번.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이렇게 모를 수 있을까.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싫은 티를 내고 있는데도 이 둘은 오빠를 방패삼아 질척거렸다.
오빠는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참으라며 소리없이 입모양만으로 내게 전달했다. 이 두 군인만이 우둔하고 무뎠던 거였다.
“이 쪽지 드릴게요. 이 번호로 내일 바꿀 예정이거든요.”
“바꿀 번호라고?”
“네, 지금 번호 알고 가셔서 연락 안 되면 곤란하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만.”
당연히 바꿀 생각 없다. 상대방도 멍해 있지만 되물어볼 생각은 없어보였다. 거절을 빙 둘러 말한 걸 눈치 챈 건가? 그런 거라면 좋겠다. 그러지 않더라도 오빠가 제대 후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저희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모님이 기다리셔서요.”
“어? 그래.......”
“가자, 오빠.”
“저 먼저 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 야! 우리도 가자.”
흠, 뒷맛이 구리긴 했다. 이번 만남이 오빠가 군 생활을 하는데 효력이 있는 것일까? 오빠의 휴가가 끝나면 면회라도 가야겠다. 그러고 보니 왜 생각도 못했을까. 면회가 더 효과적인데........
물론 효과적임과 동시에 내가 귀찮았다. 아마 내가 이렇게 뭐든지 귀찮아하는 성격인 걸 알기에 오빠가 면회를 부탁한 게 아니라 이렇게 잠시나마 얼굴이나 보여주자는 식으로 한 것이겠지.
이렇게나 신경 써주는 오빠였다. 한 번 마음 내키면 면회라는 형식으로 찾아가 봐야겠다. 마음이 내킬지는 미지수였지만.......
연기의 일환으로 잠깐이라면 다녀오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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