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라해도 괜찮아-1화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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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그럼에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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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율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응! 딱 그 자세야! 역시 소꿉친구라면 그 자세지!”

자연 갈색의 머리칼을 양갈래로 묶은 귀염상의 소녀가 흑발의 소녀의 위에 올라타고 있다. 서율이라고 불린 흑발의 소녀는 만면에 미소를 담으며 양갈래 소녀를 올려다봤다.

그 미소는 어린 소녀답게 맑고 깨끗한 것이었지만 어쩐지 불손한 의도를 품은 것 같기도 했다.

서율은 양갈래 소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 자세에서 벼.......별로 깨우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니까 말이야. 착각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응? 지금 이 자세 잠자는 친구 깨울 때 쓰는 거라고 안했어?”

“그렇긴 한데. 상황과 대사의 갭이 엄청 매력적인 거야.”

“상황? 갭? 어려운 말 쓰지마~”

처음 설명 받은 내용과 방금 지시받은 말의 차이에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양갈래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서율이 말한 대사를 읊었다.

조곤조곤, 한껏 부끄러움이 담긴 그 파괴력에........ 서율은 넋이 나가는 줄 알았다.

이 만남이 향후 서율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지 못한 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꿈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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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자각했을 때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또 다시 인생이라는 걸 살아가야 한다는 게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 개고생을 하고도 신이라는 조율자는 날 풀어주지 않았다. 그거 더럽게 아팠는데...... 얼마나 용기내서 시도한 건데.

더러운 편린의 조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역겹고 치졸하고 더럽고 끔찍한 날것의 기억이 파라노마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런 기억 따위 다 사라지면 좋을 텐데. 양보해서 다시 살게 해주는 거까지는 좋았다.

근데 이 기억만은 가져가지. 그거면 되었다.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날 이렇게 만든 신은 대답조차 없었다.

흔히들 죽고 환생하면 어떤 생물로 태어날지 모른다고들 했다. 아무렇게나 있는 벌레, 여느 주택가의 강아지, 길거리에서 울부짖는 고양이 등등의 사람이 아닌 생물이 될 가능성이 나에게도 다분하게 있었다.

오류 사항이 있다면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이었다.

이전 생에서 난 남자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남자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남성과 여성... 의 중간적인 존재. 어정쩡한 생명체였다.

이 몸을 가지고 벌써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른도 아닌 그렇다고 어리지도 않는 나이. 난 고등학생이라는 사회적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법적 성인에 가장 가까운 그런 존재였다.

어린아이에도 숙녀에도 들지 못하는 애매한 시기의 소녀였다. 아니 나라는 생물 자체가 그냥 애매한 존재였다. 남자였던 여자라니 완전 따뜻한 아이스크림과 같지 않을까.

씻고 나온 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매번 보는 얼굴이지만 역시 아직은 어색했다. 본인이 여자라고 알고 있어도 어색한건 어색한 거였다.

머리는 풍성하면서 길고 윤기가 흐른다. 거기다 가녀린 몸....... 영략 없이 굴곡진 여체는 남자라고는 우길 수 없는 형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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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 춥지도 덥지도 않는 적절한 온도의 날씨. 이런 날이 되면 두텁게 몸을 무장하고 있던 여성들의 옷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한 겨울 내내 따뜻함을 전해주던 외투를 옷장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곤 옷장에서 봄 옷 칸을 뒤적였다.

무난하게 청바지와 흰색 티를 꺼내 입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는 봄 날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성복장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화사한 햇빛을 조명삼아 산뜻한 느낌을 주는 게 역시 디자이너들이 말한 거라 그런지 틀린 게 없었다.

꾸미고자 고른 옷은 아니지만 역시나 잘 어울렸다.

방을 나가기 전, 전신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흰색의 상아빛 피부. 크고 뚜렷한 눈매와 짙은 눈동자. 조금만 힘줘도 다칠 것 같이 여리여리하게 뻗은 목선.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예쁜 외형이었다. 그게 내 몸이었고 지금의 나였다.

매번 마주하는 현실에 한숨을 내뱉으며 방을 나섰다.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갔다. 방은 2층에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매번 중노동에 시달렸다. 방콕 족에다가 귀차니스트인 나에겐 계단을 내려가는 행위도 고문과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침대 위가 행동범위인 나는 최소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왜 밖에 나가려 하냐면..........

“망할 오빠 자식....... 감히 여동생을 팔다니.”

나에겐 4살 터울인 오빠가 하나 있다. 친오빠는 아니지만 입양된 나에게 가족처럼 대해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자신들이 낳은 자식이 아님에도 무척이나 차별 없이 대해주셨다. 나를 거두어 주신 두 분은 아들보다 딸을 선호했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 그 소원이 입양으로 나마 이루어진 게 기뻤는지 날 많이 아껴주셨다.

그런 가정에서 오빠와 나는 자랐다. 부족함 없이 평범하게.

‘난’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오빠가 느끼기에는 달랐다.

분명 자신이 그들의 친자식인데 사랑이 양분되었다. 아니 이것도 내 생각.

객관적으로 보자면 부모님들은 나를 더 아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이상한 경우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사람들이셨다.

입양된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런 행위에서 오빠가 상처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상처를 난 최근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대학에 올라간 오빠가 술에 취해서 집으로 찾아왔다. 드문드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 냄새가 과하게 행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바른 생활 소년이었고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봤었다. 그렇게 방에 찾아온 오빠는 다짜고짜 이런 말은 던졌다.

"왜 너가 가족인 거냐고! 가족만 아니면..... 되는데...."

술의 기운을 빌려 어눌한 발음으로 처량하게 울부짖는 장남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그런 기색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다정하게 나를 대해 주었으니까. 아릿한 충격에 멍하니 그런 오빠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끄러운 고함 소리에 찾아오신 부모님은 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오빠를 다독여 주셨다. 그 순간 잠시 오빠와 나를 저울질하는 것 같아 오싹했다.

꾹꾹 마음속에서 덮어뒀던 사실을 갑자기 눈앞에 들이밀었다.

오빠하고 아빠하고 엄마........ 이 세 명이 본래 집안의 식구였다. 그건 내가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는 사실. 역시 피붙이는 다르지.......

난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빠진 가족에게서 눈을 돌렸다.

슬프고 아파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슬프고 아픈 시기는 다 지났다. 이 정도는 아픈 게 아니다. 그냥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눈을 피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술에서 깬 오빠가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와서 이 세상의 술들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릴 정도로 사과를 했다.

본래는 착한 오빠다.

그 철없던 성장과정 속에서 삐뚤어져서 나를 못살게 굴었어도 됐을 것이다.

부모님을 뺏어간 적이라고 나에게 심술을 부렸어도 괜찮았다.

그랬어도 난 오빠를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게 내가 버림받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니까. 외지인인 내가 꾸역꾸역 이곳에 남아있고 싶으니까.

또 다시 타인이 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빠는 내 탓을 하지 않았다. 그런 오빠에게 미안해서. 감사하고 고마워서.

뭐 그런 사정이 있어서 그리 나쁘지 않았던 남매지간이지만 최근 들어 오빠에게는 조금 더 무르게 되었다.

현관 옆에 붙은 작은 거울을 보며 이상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완벽한 자신이 거울 속에서 서있었고 그에 만족하며 휴대폰을 열었다.

“시간은......11시 43분이니까. 늦진 않겠네.”

정해진 약속 시간은 12시였고. 근처 버스터미널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뭐 버스라는 게 시간에 딱 맞춰주는 게 아니다 보니 도착한다고 한들 바로 오빠를 만날 것 같지도 않았다.

“엄마,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엄마가 주방에서 고갤 내미셨다.

“딸아, 어디 가는 거니? 음식 만드는 거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엄마는 손이 컸다. 이틀 전 재료가 든 봉지를 무더기로 집으로 들고 오셨으니 오늘 점심은 상다리가 부셔질 정도로 반찬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을게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의 요리는 맛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오빠가 그 음식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는걸?

“재료만 다듬어 줘요, 나머진 갔다 와서 내가 할 테니까.”

“오랜만에 보는 아들한테 음식 대접 해줘야지......”

“엄마, 휴가 나온 아들에게 그 음식은 너무하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하자. 눈을 돌리는 엄마였다.

“부.......부탁해 우리 딸.”

“우선 오빠 데려올게요.”

나는 요리를 꽤했다.

이전 삶에서 철이 들고는 혼자 살았던 터라 음식은 곧잘 해서 먹었다. 몇 년을 그러다 보니 실력은 자연스레 늘었다.

이번 생에서 아빠하고 엄마에게 가끔 해주던 요리가 최근 들어서 잦아지고 있었다. 아빠도 그렇고 엄마까지 요리를 나에게 일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지금까지 받은 게 있는데 그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그들에게 난 착한 딸이어야 하니까.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나에게 엄마는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셨다. 그에 반응해 옅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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