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2화-아재 영혼이 빙의된 여자들
“일단 당신은 여기 원주민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럼 누구인데 여기 있는 거야? 전설로나 전해지는 수해 건너 편 바다란 곳인 이곳에 말이야. 이곳에 누가 살고 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는데.”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갑자기 다른 세계에 던져져서, 곰을 만나 쫓기다가 구함을 받았다. 나는 뒤늦게 맥이 탁 풀려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버티고 있기에는 많이 힘들었다.
“하체가 부실하네.”
“에디나, 너처럼?”
“내가?”
“아니라고 생각해?”
에디나라고 불린 호리호리한 여성과 단발머리 백발의 엘프 여성이, 대화를 하다 말고 서로 말싸움을 시작했다. 정말 난데없이 서로 치고 받았다.
‘뭐야, 갑자기 싸우는 거야?’
“흠… 우선 짐을 한쪽에 놓고 그늘진 곳에 앉아 쉬면서 대화했으면 하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관리된 수염을 가진 중년인은, 두꺼우면서도 묵직한 저음으로 내게 휴식을 권했다.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와 두 여자들을 따라갔다. 슬리퍼를 챙기러 갈 기운도 없어 맨발로 걸어갔다.
각자 짐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 동안, 난 백사장과 투명하면서도 핑크빛이 감도는 바다에 시선이 팔렸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순간들에 더더욱 얼이 빠졌다.
‘풍경은 진짜 죽이는구나.’
모래의 촉감이 정말부드러웠다. 그래서 발로 그걸 느끼느라, 도망치는 동안에도 놓지 않았던 맥주캔과 스마트폰을 옆에내려놓았다. 모래를 두 손으로 쥐고 손 사이로 새어 나가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자니,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크, 쟤 어디 좀 부족한 애 아니야? 다 큰 남자가 무슨 모래 장난을 치면서 저렇게 멍한 표정이야? 옷 입은 것도 봐봐. 이런 곳에서 옷 같지도 않은 옷을 걸치고 돌아다니고 있고.’
‘일단 나한테 맡겨 두라고. 충분히 대화를 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우리의 상식대로면 니 말이 맞을 것 같긴 한데, 우리는이곳에 처음 왔다고. 저런 모습이 일상적인 복장일 수도 있어. 저 사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구. 저 남자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해.’
‘그냥 평범하게 집 앞에 마실 나온 남자 아니야?’
‘에디나, 넌 이 주변에 집이라고 할 만한 게 보여?’
소곤댄다고는 하는데, 아주 똑똑하게 다 들렸다.
‘저기 다 들리는데··· 나한테는 안 들리게 좀 멀리 가서라도 이야기하지. 나도여기는 초행이라고.’
나는 못 들은 척하기가 힘들어 머쓱했다. 바보 취급받는 것 같아서 손에 있던 모래는 털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시야의 왼쪽에 어떤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뭐야?’
내 눈 왼쪽으로 떠있는 [동기화중]이란 문자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라 있었다. 무엇인지 궁금해서 손가락으로 눌러봐도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손으로는 평소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다시 손에 쥐었다.
‘이게 아닌가?’
홀로그램을 쳐다보다 내 왼쪽으로 앉은 중년인, 버크란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버크는 큰 배낭을 모래사장 위에 내려놓고 수통의 물을 마시려 하고 있었다. 버크는 자신이 무해하다는 듯 인위적인 미소를지었다. 수통도 나에게 권했지만, 목이 마르지 않다고 하며 사양했다.
원주민 취급받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체감할 수 있었다.
‘호의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이 권하는 음료를 마시기는 조금 그렇잖아. 뭔지도 모르는데 잘못 마셨다가 큰일 나면 어떻게 해? 맥주를 마셔서 그렇게까지 목마른 것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곰이 뛰어다니는 험한 세상 아니던가. 그런 곳에서 처음 본 사람들을, 어디의 뭘 믿고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을까. 현대인의 감수성으로는 거부감이 들었다. 입구에서 새어나와 모래로 떨어지는 액체는, 분명 물 같아보이긴 했다. 그러나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이 기이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상황이 나의경계심을 크게 자극했다.
하늘에서 내리 쬐는 햇볕도, 바닷가에서 부는 바람도, 내 손과 발로 느껴지는 백사장도, 확실히 내 자취방에서 볼 법한 광경은 아니었다.
‘영화나 만화 제작인가? 거기서 볼 법한 복장이긴하네.’
장소만 의문스러운 게 아니었다. 저들이 입은 옷과 체형을 보자니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그들의 역할을 추론해보며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단발머리의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그쪽은 뭐라고 불러? 난 코엘, 저 멀대같이 키만 큰 여자는 에디나, 옆의 남자는 버크라고 해. 우리들은 모험가야.”
“제 이름은 이정후라고 합니다. 직업은 저기… 아직 없습니다.”
갑자기 취업준비생의 처지에선 뼈를 맞는 기분이었다.
그냥 취업준비생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나. 어차피 처음 보는 처지에 그럴 듯한 직업으로 말하는 것이 좋을까 싶었으나, 스스로를 코엘이라 부른 엘프 여성은 내 답변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질문을 해놓고도 그냥 다른 질문을 더 던졌다.
“지금 보고 있는 물건은 무슨 아티팩트같은 거야? 초면에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일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코엘은 눈을 반짝이며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다. 아직 할부가 남은 내 스마트폰. 나는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숨기듯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이내 관뒀다. 곰도 때려잡는 사람들에게서 지키려면 얼마나 지킬 수 있을까. 목숨 살려준 이들이 설마 빼앗지는 않겠지 싶어서, 혹시나 하면서도 스마트폰을보여줬다.
의도적으로 그냥 별거 아니라는 느낌을 주려고 대부분의 기능이 제한되어 있다고 뻥을 쳤다. 음악도 틀고, 사진도 찍고, 번역 기능도 있고, 지도도 볼 수 있고, 정보 검색도 가능하지만 전부 생략했다.
“그런 기능들이, 그 조그만 물건 하나에 다 들어 있다는 건가? 믿을 수가 없군.”
거구의 남자는 앉아 있던 곳에서 설명을 듣다가, 내 설명에 호기심이 자극되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혼잣말을 하는 것이 믿기지 않는단 투였다. 코엘이 그를 보며 불평했다.
“에퉤퉤, 버크, 일어날 거면 미리 말 좀 하든가. 모래 날리잖아. 퉤퉤.”
“초고대 문명에서나 존재했다던 그런 마법 아티팩트 아니야? 수해를 건너서 전설의 바다를 찾은 것도 신기한데 우리가 초고대 문명의 흔적을 찾은 건가봐!”
“바다를 찾은 것도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건데! 거봐. 내가 이거 꼭 하자고 했잖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여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한 건 너였으니까...뭐, 인정해줄까?”
‘그나저나 이 아저씨 목소리는 무슨 성우가 앞에 있는 것 같네. 저 목소리면 뭐 일 안하고 성우만 해도 떼돈 벌겠다.’
“근데 세분 다 참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얼마 전에 2년 약정으로 교체해서 약정기간이 한참 남아 있는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세 사람의 눈빛이 너무 매서워서 궁금하던 내용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네? 저희는 지금 더스트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무슨 소리신지? 지금도 한국말로 대답하셨는데요?”
잠시 대화가 멈추자 파도 소리만 철썩이며 우리들 사이의 오디오 공백을 채웠다.
잠깐의 정적이 너무 갑갑해서 목은 안 말랐지만 나도 모르게 옆에 놓아둔 맥주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따악!
맥주캔 따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줄이야. 세 사람의 눈이 내가 마시는 맥주캔을 향했다. 저 사람들은 내게 수통을 권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권하지 않기가 뭐했다. 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의 아들답게 예의상 나머지 맥주캔 2개를 들어보이며 권했다.
‘사람은 셋인데 두 개를 주기가 애매하네. 먹긴 할려나?’
“드릴까요?”
“지금 마시는 게 뭡니까? 아까 들고 있던 금속 통에 음료가 담겨 있는 겁니까?”
버크가 중후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화들짝 놀랐다. 캔을 처음 보는 거라 못 딸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캔을 따주고서 마시라고 건네 줬다.
“차갑네요?”
편의점에서 아직 사온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 캔 표면에는 수분이 응결될 정도로 냉기가 남아있었다. 버크는 맥주캔을 볼에 살며시 대보더니 캔을 마치 보석처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와인애호가가 포도주를 음미하듯 맥주를 한 모금씩 나눠서 마셨다.
옆에 있는 여자는 맥주 CF를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호쾌하게 들이켰다.
“너만 먹지 말고 나도 한번 마셔보자!”
옆의 여자가 너무 안달이 난 것 같아서 난 목을 축이고 내가 마시던 맥주를 맛보라고 줬다.
“푸아! 맥주가 시원하니까 더 맛있다. 이런 맥주 맛은 처음이야! 버크! 이거에 비하면 드워프들이 마시는 맥주는 오줌이다. 오줌! 우와~~~~~~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맥주라니!”
“이거 맥주 맞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이렇게 부드러운 맥주는 처음 마셔보는 것 같아!!!”
4캔에 만원에 파는 행사상품에 너무 크게 리액션을 취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어깨가 살짝 으쓱해졌다.
‘엄선해서 고른 보람이 있군 그래.’
살짝 갈색빛이 감도는 피부의 단발머리 여자가 맥주를 마시는 소리가 호쾌했다. 여름에 호프집을 지나가다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서 야구나 축구 경기를 지켜보며 떠드는 아저씨들이 연상되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사운드만 음소거 하고 보면 미녀들이 맥주 마시는 CF인데, 더빙이 50대 아재들이네.’
그나저나 저 [동기화중]이라고 반짝이며 떠 있는 게 너무 신경 쓰인다.
아무것도 반응하지 않는 홀로그램이 신경 쓰이지만 무시했다. 앞에 앉은 이들과 맥주를 나눠 마시고 나니까, 피곤해서 누워 쉬고 싶어졌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휴양지같은 공간에서 수다를 떨다 보니, 내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친화력을 발동하여 잡담을 늘어놓았다. 덕분에 예전 동남아로 해외여행을 갔을 때 친해졌던 외국인친구들처럼 말을 놓을 수 있었다.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엘프가 처음 만난 인간 상대로 왜 그러냐. 니 나이면 인간식으로 해도 아줌마라고 불러도 감사할 나이야!”
아저씨라고 불린 버크가 수염을 씰룩이며 투덜댔다. 그러나 코엘 씨는 계속 아주머니나 아줌마 말고 ‘누나’라고 부를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딱히 손해 볼 일도 없다고 생각한나는, 원하는 대로 누나로 불러주기로 했다. 절대 이어지는 코엘 누나의 말에 쫄아서는 아니었다.
“뒤가 궁금하면 엘프 여성에게 아줌마라고 불러봐. 근데 슬슬 불을 피워야 할 것 같다. 버크, 에디나. 밤에 여기서 머물려면해가 더 이상 지기 전에 이젠 준비해야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