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밥상견례?
금요일 저녁. 마왕은 아버지가 출장에서 잠깐 돌아오신다고 해서 집에 갔고, 난 자취방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도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무슨 일인지 싶어서 생각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지헌아! 너 유리 찼다고?! 네가?
통화하자마자 엄마가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너 그렇게 유리 좋아했잖아! 나중에 유리랑 결혼한다고 했으면서!
“그건 그랬는데,”
-게다가 유리가 먼저 고백했다면서! 그런데 왜 차?!
아, 이래서 알리기 싫었는데…….
내가 유리를 좋아하는 건 내 부모님도 알고 계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고 친구 사이가 됐다 보니, 우리 부모님과 그녀 부모님이 아는 사이기도 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러면 질문이 길어질 걸 알았기에 빨리 인정했다.
“어, 찼는데.”
-찼는데, 가 아니잖아!
“아니 뭐 찬 걸 찬 거라고 하지. 안 찼는데 찼다고 할 순 없잖아.”
-그건 그래도! 뭐, 어쨌든.
핸드폰 너머로 길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너 내일부터 시간 되지.
생각하기도 전에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니, 안 되는데.”
-아 그래? 맞다, 너 바쁘지!
“내가 바쁘다고?”
-너 바쁘잖아! 내일 식당 일 도와줘야 해서!
“어?”
-알바가 갑자기 쉰다고 해서, 이번 주말까지만 도와주면 돼. 알았지?
“어? 아니, 엄마!”
-그럼 내일 봐, 우리 아들! 사랑해! 뚝
그런 이유로 난 오늘 식당에서 돼지 국밥을 나르게 됐다.
“여기 주문이요!”
“네, 갑니다! 잠시만요!”
“계산은 언제 해주시나요!”
“지금 가요!”
주말 저녁 국밥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주문받으려 하면 다른 테이블에서 계산한다고 하고, 계산 마치고 빈 상 치우려고 하면 손님이 들어오고, 기본 반찬 내오려고 하면 국밥 서빙하라고 엄마가 뭐라 했다.
“지헌아! 6번에 국밥!”
“알았어요! 가요!”
기본 반찬을 서둘러 담아 카트에 올리고, 그걸 국밥 내오는 곳으로 끌고 갔다. 너무 급하게 나르느라 국물이 조금 넘쳐 손에 닿았지만, 아파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아픔도 애써 무시하며 일하는 중인데 엄마가 말 걸었다.
“나중에 알바비도 줄 거니까, 열심히 하자?”
평범한 아줌마처럼 적당히 살이 붙고, 웃는 상인 우리 엄마.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귀밑까지 자르고 키가 작아서, 자칫하면 통통한 소년이라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난 천연덕스레 웃고 있는 엄마한테 투덜거렸다.
“얼마 안 줄 거면서.”
“최저 시급으로 맞춰 주잖아! 떠들지 말고 이제 가!”
“엄마가 먼저 말 걸었잖아!”
따지면서 카트를 끌고 서빙했다. 체력이 늘어서 그런지 몸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오는 주문에 정신력이 점점 갈려 나갔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거라도 하지 않았으면 마왕 아버지랑 만날 뻔했다.
갑작스레 알바가 결정된 직후, 난 바로 마왕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버지께서 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말했고, 난 이 일을 핑계 삼아 어색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주 뵈니까 괜찮은데, 아버지는 저번에 화상통화로 한 번 이야기 나눈 게 전부였다. 어머니면 모를까 아버지 만나는 건 좀 껄끄럽지.
“여기 계산이요!”
“네! 가요!”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일이 먼저였다. 난 머리를 비우고 식당일에 집중했다.
나 자신을 기계라 생각하고 식당 일이 들어올 때마다 기계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사람도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일행이 빠져나가고, 이제는 식당에 3팀밖에 남지 않았다. 이 정도 됐으니 이제 저 세 일행만 나가면 식당을 마무리 해도 될 것 같았다.
잠깐 숨 좀 돌리려 주방으로 향했다. 거기엔 설거지하는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그만큼 먹고 갔으니 설거짓거리가 꽤 많았는데도,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지헌아. 이제 숨 좀 돌릴 만하지?”
“응, 괜찮아? 나머진 내가 할까?”
“됐어. 상이나 마저 치워.”
“알았어.”
이제 좀 겨우 쉴 수 있는데 바로 일하고 싶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시간 끌려고 아빠한테 다가갔다.
“아빠, 뭐 도와줄 거 있어요?”
“…….”
“아빠?”
“…….”
내가 여러 번 불러도 아빠는 열심히 칼만 갈았다. 포근한 인상인 엄마와 달리, 아빠는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사나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삐쩍 말라서 살집 있는 엄마와 비교됐고, 안 좋은 눈초리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말수만 없지 좋은 사람인 걸 알고 있었기에 아빠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가서 일하라는 건지. 대답도 하지 않고 칼만 갈았다.
결국 난 주방을 나와서 홀로 이동했다. 그러니 내가 철들었을 때부터 보고 자랐던 국밥집 내부가 보였다.
여기는 내 부모님의 직장인 돼지 국밥집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식당을 운영하신 두 분에게선 항상 돼지 누린내가 났다. 초등학생땐 부끄럽기도 했지만 날 부족함 없이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증거이기도 했다.
식당 내부에 밴 돼지 누린내를 코로 깊게 들이마시며, 행주를 집었다. 이제 청소하기 위해 테이블로 가는데,
딸랑!
손님이 들어왔다.
출입문 위에 단 종이 울리자, 난 파블로프의 개처럼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그러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서 오지!”
뭔 개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출입문 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마왕이 있었다.
“아니, 너……!”
웬일인지 그녀는 추리닝이 아닌 다른 복장이었다. 청바지에 블레이져라는 깔끔한 차림인 마왕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자리 좀 안내해 줄래?”
게다가 말투도 평소와 달랐다. 마치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처럼 평범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그녀 뒤로 다시 출입문이 열렸다.
딸랑
“여기가 오빠 일하시는 데인가요?”
검은 슬랙스에 하얀 셔츠까지 입어 어른스러워 보이는 세희가 들어왔다.
그녀까지 들어오자 난 행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너네, 여긴 왜 왔냐?”
마왕은 날 향해 눈을 반짝이면서, 이 근처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오긴 왜 왔겠나? 자네 보러 왔지. 뭐,”
“다른 분들도 뵈러 왔지만요.”
자기 언니 말을 완성시킨 세희가 내 어깨 너머로 주방 쪽을 힐끔거렸다. 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채 물었다.
“아니, 어떻게?”
나는 지금까지 그녀들에게 부모님이 식당하신다는 것만 알려주고, 어딘지는 말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마왕은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넨 짐의 정보력을 너무 얕보는 경향이 있네.”
“어떻게 안 거야? 세희, 네가 알아낸 거야?”
내 핸드폰에 해킹 어플까지 깔았던 세희였다. 지금이야 폰을 바꿨긴 했지만, 바꾸기 전에 알아낸 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희는 고개 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요. 언니가 알아낸 거예요.”
그걸 증명하듯 마왕이 억울한 목소리로 내게 따졌다.
“방금 짐의 정보력으로 알아냈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어떻게?”
“이제야 짐이 한 말을 믿어주는 겐가.”
그녀는 후훗,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유리한테 물어봤다네.”
“뭐? 너 유리랑 알고 지내?”
“그건 아닐세. 유리와 알고 지내는 선아에게 연락한 것일 뿐일세.”
“아, 그런 거였냐.”
MT 갔을 적 선아에게 유리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둘이 같이 다니는 모습을 자주 봤고, 꽤 친해진 것 같았다. 유리가 이 가게를 알고 있는 것도 내 소꿉친구니까 당연했다.
생각보다 의문이 간단하게 풀리고, 난 다른 걸 물어봤다.
“여긴 왜 왔어?”
마왕은 흐뭇한 얼굴로 날 흘겨보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잖나. 자네 일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왔네.”
“저도요, 오빠.”
이 뻔뻔스러운 것들. 보나 마나 내가 일하면서 고생하는 모습 보고 싶어서 그런 거겠지.
“지헌아!”
너무 오래 이야기했는지 주방에 있는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너 거기서 뭐해! 빨리 손님 안내해!”
나는 몸을 돌려 주방 쪽을 향해 알았다며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마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 그 움직임을 막았다.
“왜?”
“잠시만.”
그녀는 날 지나쳐, 아직도 여길 보고 있는 엄마한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헌이 여친인 백소희라고 합니다.”
그 순간,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소리가 멈췄다.
동료와 간단히 술자리를 갖던 아저씨들도, 함께 식사하러 나온 가족도, 혼자 스마트폰을 보며 밥 먹던 남자도. 모두 행동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봤다. 문제는 곧이어 남친이라 소개한 날 쳐다봤다.
난 독심술이 없어도 그들 머릿속에 든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건 단 한 글자였다.
왜?
그들 생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신비스러운 은발에 인형 같은 외모, 북유럽 미인상 같은 여자가 평범한 나랑 사귄다니, 겉모습만 보면 내가 과분해 보였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어쨌든 그 시선 속에는 손님만이 아니라 엄마도 섞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침묵은 세희의 인사로 깨졌다.
“어머나!”
엄마는 서둘러 주방에 나오면서 끼고 있던 빨간 고무장갑을 벗었다. 그렇게 벗은 맨손으로 마왕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이 놈 엄마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헌이 여친이에요.”
마왕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엄마와 악수했다. 악수를 나눈 엄마는 주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좀 나와봐! 지헌이 여친이 왔어!”
그 말에 아빠가 주방 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날카로운 그의 눈이 마왕을 발견하자, 놀라움으로 커졌다.
“……!”
그리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걸 같이 본 엄마는 아빠가 한 행동을 변명하며 자리로 안내했다.
“미안해요, 우리 그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요. 일단 앉으세요.”
“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그런데 이 분은 누구……?”
엄마가 세희를 쳐다보자, 마왕이 소개했다.
“제 여동생이에요.”
“아! 그래요! 왠지, 너무 예쁘더라!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름은 백세희라고 해요.”
세희는 여전히 도도한 표정을 지은 채 엄마한테 인사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마왕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예요? 지헌이 보러 왔나?”
“아니요. 식사하러 왔어요.”
“식사요?! 아이고, 어쩌지. 여기가 국밥집이라 국밥밖에 없어서요.”
“괜찮아요. 저 국밥 좋아해요.”
“알았어요! 제가 금방 맛있게 말아 드릴게요!”
엄마는 함박 웃음으로 말하다가, 날 향해 돌아보며 따졌다.
“넌 뭐하는 거니! 국밥 드신다잖아! 어서 밑반찬 가져다드려!”
“어?”
“지헌아, 부탁할게?”
마왕은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봤다. 입가엔 예의 바른 웃음이 걸려 있더라도, 저 눈꺼풀 사이에 보이는 파란 눈인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헌아!”
내가 가지 않자 엄마가 한 번 더 재촉했다. 일단 난 마음이 찜찜하면서도 기본 반찬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서 반찬들을 담으며 은근슬쩍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주문이 오지도 않았는데 수육을 준비하고 계셨다.
아무래도, 마왕이 와서 기쁜 건 엄마뿐은 아닌 것 같았다.
아빠 등을 보면서 담은 반찬을 쟁반에 담아 가져갔다. 그러니 그새 이야기 마치고 온 엄마와 마주쳤다.
마왕이 내 여친이란 걸 알자마자 걸린 웃음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날 보며 웃는 입으로 말했다.
“유리 찰 만했다, 얘!”
그러더니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복잡한 마음으로 마왕에게 걸어갔다.
마왕과 세희가 앉은 테이블로 가니, 세희가 수저를 놓고 있었다. 난 그녀 손을 피해 밑반찬을 내려놨다. 마왕은 그런 날 장난스럽게 올려봤다.
“손님에 대한 서비스가 별로구먼?”
“시끄러워. 그럴 거면 나가.”
“에이, 농담이지 않나. 근데 여기 맛은 있는가?”
“맛없으면 진작에 망했지. 얼른 먹고 나가. 어?”
밑반찬을 다 내려놓고 가려는 도중, 눈에 띄는 걸 발견했다.
마왕과 세희는 4인석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막내인 세희는 수저통에서 수저를 언니와 자기 앞에 놓았고, 그 뿐만 아니라 각자 옆에도 하나씩 놓았다.
왠지 모르게 든 불안함에, 난 마왕에게 물었다.
“또, 누구오냐?”
“그렇네만?”
“누, 누구?”
“어머니하고 아버지일세. 아버지께서 자넬 보고 싶어 하신다고 했잖나.”
딸랑!
그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출입구에 달린 벨이 울렸다. 거기엔 항상 여신님 같은 자태를 뽐내시는 어머니, 그리고 화상통화로만 봤던 마왕의 아버지가 서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