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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그럼 자네 처음은 짐의 차지로구먼? (35/72)



〈 35화 〉그럼 자네 처음은 짐의 차지로구먼?

나는 입구 앞에서 머뭇거렸다. 그런 나와 다르게 마왕은 등까지 기른 은발을 살랑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익숙해 보이는 그녀는 문을 연 채 날 쳐다봤다.


“뭐 하는 겐가. 안 들어오고.”


“아니, 내가 여기 들어가도 돼?”


“괜찮지 않나. 처음도 아닐 터인데.”


“처, 처음인데?”

“뭣이?”


마왕은 인상을 약하기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날 보며 피식 웃고는 문을 놓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럼 자네 처음은 짐의 차지로구먼?”

그러더니  손목을 잡고 가게로 데려갔다. 강철 같은 악력에 난 힘없이 옷가게로 끌려가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경쾌한 여점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상쾌함을 가장한 인공적인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옷을 받았을 때와 같은 향이었다.

수많은 조명으로 인해 눈이 부신 내부가 부담스러워 마왕에게 말했다.

“잠깐만,  돈 없는데?”


“괜찮네. 짐이 대주지.”


“아니, 그래도……”

“그럼 빌린다고 생각하게. 어차피 하준 그놈 건으로 합의금이 꽤 많이 들어왔을 텐데.”


확실히 그녀 말이 맞았다. 날 차로 쳤으니 하준은 특수상해죄로 잡혀 들어갔다. 그놈 부모님은 자기 아들이랍시고 내게 그를 끌고 와 무릎 꿇리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상당한 금액이 적힌 수표와 함께.

“그런데 그게 다 내 돈이겠냐? 부모님한테 드렸지.”

“그걸  주는 겐가. 자네 깽값인데. 자네가 번 거잖나.”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내가 무슨 자해공갈범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마왕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천만원을 어떻게 관리해!”

“꺗!”

갑자기 마왕이 잡았던 손을 놓고 내가 속삭였던 귀를 가리듯이 덮었다. 그런 반응에 자기도 놀랐는지,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날 불렀다.


“자, 자네!”

“어?”

“다신 그러지 말게! 다시는!”


그러더니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등을 보였다. 하지만 은발 사이로 보이는 귀가 빨갛게 달아오는 걸 발견했다.

붉어진 귀를 보면서, 나는 내가 그녀보다 우위에 선 걸 알아챘다. 지금까진 마왕에게 휘둘리며 두근거리는 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녀를 두근거리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다.

그 사이, 나보다 앞서가는 마왕에게 점원이 다가갔다. 그녀는 훈련된 미소를 지으며 마왕에게 말걸었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뭐 필요한  있을까요?”

“괘, 괜찮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 테니 걱정 말게.”

“네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음.”

특이한 말투에도 점원은 가면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물러났다. 마왕을 처음 본  같지 않은 그녀를 보면서 난 마왕에게 물었다.

“너 여기 와본 적 있냐?”


마왕은 내게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누이와  번 왔지. 여긴 여성복도 팔고 있으니 말일세.”


 그대로  가게 왼편은 여성복, 오른편은 남성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마왕은 오른쪽으로 가면서 내게 말했다.


“이리 따라오게. 짐이 골라주지.”

그녀는 검정 슬랙스가 진열된 곳에서 하나를 골라 내게 내밀었다.

“자, 받게.”


그러더니 흰색 셔츠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 건네고,


“이것도 받게. 그리고 또…… 아!”

이번엔 슬랙스와 마찬가지로 검정 블레이저가 진열된 곳에서  하나를 건넸다.

마치 눈에 띄는 대로 건네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옷을 고르는 그녀에게 물었다.


“너무 아무거나 고르는 거 아니냐?”


“아무거나라니, 너무하잖나.”

드디어 마왕이 나와 눈을 마주쳐 줬다. 방금 있었던 귀 사건은 잊었는지 그녀는 ‘뭘 모르는구만’이란 표정으로 설명했다.

“자네 피부색이 쿨톤이니 검정과 흰색이  어울릴 걸세. 게다가 방금 짐이  것처럼 입으면 단정하면서도 세련되서 격식 있는 자리에 어울리는 차림이 완성되지.”


허구한  추리닝만 입는 여자가 패션에 대해 설명하다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왕을 쳐다보니, 그녀가 눈을 치켜뜨며 날 불렀다.


“잠깐만 자네.”


“응?”

“혹시 자네, 허구한 날 추리닝만 입는 여자가 패션에 대해 설명하다니, 좀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어떻게 알았어!”


“자네 생각이야  뻔하잖나.”

마왕은 씨익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귀찮아서 입는 게 아니라 필요해서 입은 걸세.”


“무슨 필요?”

“저번 일을 생각해보게. 짐이 차려입었던 날 말일세.”

그 말을 듣고 차려입은 마왕을 기억했다. 저번에 하준을 꼬실  입었던 검은 원피스와 하얀 데님 재킷을 입은 모습은……


“엄청 예뻤지.”

“남자들이 그렇게, 뭣이?”


그녀는 순간 자기가 뭘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천천히 보석처럼 눈을 빛내며, 내 가슴팍을 후려쳤다.


뻐억!

“어헉!”

가슴을 울리는 충격에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 나와 다르게 폭력적인 마왕은 어느 때보다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그렇게 예뻤나! 음! 하긴 짐이  예쁘긴 하지! 우하하하!”

그녀는 가게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가슴을 부여잡은 내 손을 자기 손등으로 노크하듯이 두드렸다.

“아까 짐의 말을 기억해줘서 고맙네.”


“으으윽! 뭐가?”

“아무것도 아닐세. 어쨌든 너무 차려입으면 남자들이 꼬여서 말이지. 그래서 이런  입어서 짐의 매력을 최소화하는 것일세. 자! 가세!”


영문모를 소릴 지껄이던 마왕은 다시 내 손목을 잡고, 가게 구석에 있는 피팅룸으로 향했다. 그녀는 커튼이 걷힌  옷과 함께 쑤셔 박았다.

“한 번 갈아입어 보게나!”


“어, 야!”

항의하려 했지만, 커튼을 쳐서  말을 막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두근거리게 만들자고 결심했는데, 결국은 마왕 페이스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 사실에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었다.


갈아입는 도중, 저번처럼 훔쳐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하기도 하고 주의도 돌릴 겸, 커튼 너머에 있을 마왕을 불렀다.

“거기 있냐?”

“왜 그런가.”


“너 아까 여동생이랑 여기 몇 번 왔다고 했지.”

“그렇네만.”


“저번에 말하니까 나이 차가  된다며. 몇 살이야?”


“올해로 중3일세.”

“그럼 대충”

“5살 차이가 나네만. 근데 누이 나이는  물어보는 겐가?”

“그냥 궁금해서.”

“혹시 자네!”


갑자기 밖에서 마왕이 놀라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혹시 연하가 취향인 겐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했잖아! 그것도 방금!”


“하핫! 농담일세. 그러고보니 말일세……”


웬일로 그녀가 말을 흐렸다.

“자네 취향은…… 연상인가 아니면 연하인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근데 언제까지 갈아입을 겐가! 빨리 안 나오면 짐이 직접 갈아입히겠네!”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커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야! 그러지 좀 마라! 좀!”

챠라락!

마침  갈아입은 나는 화내며 커튼을 치웠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마왕이 보였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굳혔다.


“……호오오.”


내려갔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떨리는 듯한 감탄사를 뱉었다.


난 이런 복장을 한 게 처음이라 부끄럽기도 해서, 감탄하는 마왕에게 농담을 던졌다.

“왜, 멋있냐?”

“호오, 태가 사는 구먼. 태가 살아.”

“그래?”

“음, 추태가 살아.”

“야!”

“하핫! 농담이었네! 그나저나.”


마왕은 팔짱을 끼며 날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봤다.

“꽤 괜찮군. 자네 비율도 좋고 말일세.”

“내가 비율이 좋다고?”

“음, 뭐, 아주 좋은 건 아니고, 중상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일세.”

“이럴 땐 그냥 좋다고 해줘.”

“자네가 헛된 희망을 품을까 해서 말일세. 그런데 어떤가. 사이즈가  맞진 않나?”


“딱 맞더라? 너 내 사이즈 어떻게 알았냐?”

“후후후, 어떻게 알았겠나?”


마왕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기 시작했다. 그 불안한 웃음을 보면서, 난 오늘 오전 그녀가 내 방을 청소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너 설마!”


경악으로 가득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노려봤다. 하지만 마왕은 천연덕스럽게 내 가설을 부정했다.

“에이, 설마 어떻게 그러겠나. 짐은 허락도 받지 않고 타인의 짐을 뒤질 사람이 아닐세.”

“그렇지? 안 했지?”


“하핫! 그런데  말 아나?”


그녀는 내게 검지를 들어 보였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야!  경찰에 신고할 거야!”

“어디 한번 그래 보게. 남자가 여자 서랍을 뒤진 것도 아니고, 그 반대잖나. 과연 경찰이 그걸 수사할지 의문이 생기는군.”


“너, 치사하게!”


“치사하면 자네도 여자로 태어나게.”


“더럽네! 진짜!”

 말을 들은 마왕은 통쾌하게 웃었다.

“하핫! 원래  세상은 더러운 걸세! 아직도 몰랐는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젠장!”

나는  세상에 대해 불평하면서 입고 있는 블레이저 옷깃을 매만졌다. 마치 정장을 차려입은 감각에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내 반응을 보고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런가. 이상한 거라도 있는 겐가?”


“그건 아닌데, 너무 차려입는 것 같아서.”


“뭣이? 짐의 부모님을  때 입을 옷이잖나. 자네는 짐의 집에 올 때 후줄근하게 입고 올 겐가?”

“그건 아니지만.”

“그러고보니 좀……”


마왕이 내게 몇 걸음 떨어지면서 바라봤다.  게슴츠레 뜨며 평가하는 듯한 푸른 눈을 보며 물었다.

“왜?  이상해?”


“이렇게 보니 좀 밋밋한 것 같군. 니트라도 입어보는 게 어떤가? 잠깐만 기다려보게!”

“니트? 어, 야!”

내가 물어볼 틈도 없이 그녀는 피팅룸 앞을 떠났다. 은발을 휘날리며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마왕을 보다가, 그녀를 두근거리게 할 방법이 떠올랐다.


아까 마왕은 내게 연상 취향인지, 아니면 연하 취향인지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그녀를 볼 때, 난 사실 네가 취향이야, 라고 하면 선머슴 같은 그녀도 두근거릴 거 같았다. 푸른 눈을 크게 뜨며 두근거릴 얼굴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피팅룸 앞에 아무도 없었기에, 난 조금 앞으로 나와 매장 안을 둘러봤다. 남성복 판매대에 남색 니트와 회색 니트를 들고 고민하는 마왕이 보였다.

왠지 자기 몸에 니트를 대어보는 그녀의 은발 너머로, 가게 입구로 누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들어오자 점원들은 입구를 향해 인사했다.  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했다.

방금 들어온 사람들은,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었다. 키가 작은 거로 보아 중학생인 것 같았다. 그런데 들어온 여중생들 4명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시끄럽게 떠드는 친구 중에서도 무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따돌림받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걔네들이 그 여자애를 둘러싸고 신처럼 떠받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여자애의 외모였다.


마치 얼음 같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강철같다고 해야 할까 고민할 만큼 차갑고 냉철한 표정이  어울리는 미녀였기 때문이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 때문에 중학생이 아니라 성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중학생인 것부터가 내 시점에선 아웃이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애를 봐도 드는 생각은 ‘남자애들한테 인기 많겠구나.’ 정도가 다였다.


이제 그만 봐야겠다 싶어서 천천히 시야를 돌렸다. 그러다 여중생들 뒤에서 수상한 그림자가 기웃거리는 걸 발견했다. 그 사람은 가게 안에 들어오지 않고, 회색 후드를 머리에 쓴 채 쇼윈도 너머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회색 후드티, 이상하게 낯이 익은데? 어?

내가  걸 눈치챘는지 후드티를 입은 사람은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가게를 나가려 발걸음을 디뎠다. 그때 날 막은 건 마왕이었다.


“자, 자네!”


남색 니트를 손에 든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매우 당황한 모습이었다. 밖에 숨은 후드티가 신경 쓰였지만, 혹시 그 사람과 관련됐나 싶어서 물었다.


“왜 그래. 이상한 거 있어?”

“잠깐, 잠깐만 안으로 들어가세!”


“어? 야, 여기서 더 들어가면 피팅룸이야!”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가게!”

마왕은 황급히 소리치면서 남색 니트를 든 손으로 강하게 날 밀쳤다. 마치 트럭에 밀리는 것처럼  다시 피팅룸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날 안으로 들여보낸 그녀는 따라 들어오고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커튼을 쳤다.

나는 겁먹은 듯한 마왕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뭐야.”

“자네……!”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평소 보석 같다고 생각했던 푸른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마왕은 마른침은 삼키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짐이, 전에 누이와  가게로 온 적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어, 그랬지. 근데 왜?”


“그 누이가 여기로 들어왔단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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