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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짐이 조금 사용감 있게 만들었다네 (18/72)



〈 18화 〉짐이 조금 사용감 있게 만들었다네

아침에 눈을 뜨니, 내 옆에 눈을 감고 있는 마왕의 얼굴이 보였다. 자느라 힘없이 풀린 입술 사이로 보인 하얀 앞니가, 참 귀엽게 느껴졌다. 눈만 움직여서 그녀를 살폈다. 마왕은 날 보다 잠든 것처럼 이쪽을 향해 몸을 돌린  자고 있었다.


바로 내 옆에서 자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같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그런 거리에서 그녀는 일정한 박자로 숨을 내쉬었다.


“스으…… 스으……”


부드러운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특이한 건 그녀 숨결에서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 흔히 나는 입냄새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양치한 것처럼 상쾌한 치약 향기였다.

“으무으무우으……”

갑자기 마왕이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이걸 보니 잠꼬대하는 새끼 고양이를 떠올랐다. 귀엽게 앵알거리면서 앞발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지금의 마왕과 닮아 있었다.


사랑스럽게 자는 얼굴을 하는 마왕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여기서 자는 거지?

잠이 덜 깨서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했다. 어제 자기 전, 마왕이 간병인 침대에 눕는  봤다. 게다가 잠이 들기 직전에 코고는 소리가 들렸으니 거기서 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분명히 간병인 침대에서 잔 걸 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나랑 이불도 같이 덮은  바로 옆에서 자고 있었다.


일단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왕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자동적으로 마왕을 덥고 있던 병원 이불이 내려갔다. 이불이 치워지자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볼 수 있었다.


자는 사이 답답했는지, 마왕은 항상 잠그고 다니던 지퍼를 완전히 내린 상태였다. 거기다 옆으로 돌아누운 바람에 왼쪽은 활짝 열린 거와 다름없었다. 커튼처런 내려간 검정 추리닝 아래로, 어제 내 자취방에서 봤던 흰색 민소매티가 보였다.

어제 볼   선정적으로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더 선정적이었다. 늘어진 목둘레 사이로 백인 특유의 하얀 살결이 가슴이 뛰었다. 게다가 옆으로 돌아서 자느라 팔뚝에 눌린 가슴살이 밀려서 살짝 부풀어 오른  인상적이었다.


똑똑

!

갑자기 병실 문에서 들린 노크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놀라서 몸을 움찔거리는 바람에 침대가 흔들렸고, 마왕이 깨고 말았다.

“으, 음? 자네 일어났는가?”

막 자고 얼어났으면서도 평소처럼 이상하게 말하는 마왕이었다. 그녀가 말소리를  직후, 노크했던 사람이 문을 열었다.

“실례할게요.”

피곤한 말투와 함께 간호사 누나가 들어왔다. 어제 조용히 하라며 주의 줬던 그녀는 내 옆에 누워있던 마왕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더니 다시  보면서 말했다.


“환자분, 소독할게요.”


누나는 스테인리스제 쟁반을 들고 내게 걸어왔다. 내 침대 바로 옆까지 와서, 아직까지 누워있는 마왕에게 말했다.


“환자분, 아니 간병인? 너 뭐라고 불러야 되니?”

 남녀가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  본 사람치고는 태평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묻자 마왕은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흐~암,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시게.”

“그럼 소희야. 비켜줄래? 환자분 소독해야 돼.”

“알았네, 하~ 암, 비켜주지.”

마왕이 계속 하품하면서 침대를 나갔다. 그러자 간호사 누나는 마왕이 누웠던 곳에 쟁반을 내려놨다.

“환자분, 소매 걷어주실래요?”

“아, 네. 잠깐만요.”

왼쪽 팔을 내밀면서 소매를 걷었다. 간호사누나는 거즈와 의료용 테이프로 덮힌 팔뚝을 한 손으로 잡고, 남은 손으로는 테이프를 뜯고 거즈를 치워서  상처를 살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로 찢어진 내 상처는 검고 뻣뻣한 실로 꿰매어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송충이같았다. 그녀는 가만히  상처를 보더니,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


“상처가  빨리 아무시는 편이네요. 이제 소독할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가져온 쟁반에서  집게를 들었다. 집게를 잡은 손으로 재주 좋게 은색 원형통을 열더니, 집게를 넣어 검붉게 젖은 솜을 꺼냈다.

“조금 따끔해요.”


말이 끝나는 동시에 빨간약으로 적셔진 솜을 내 상처에 문질렀다. 송충이 주변이 검붉게 물들어가는 걸 구경하는데, 간호가 누나가 입을 열었다.


“환자분, 아침은 드셨죠.”


“네? 아침이요?”

내가 아침을 먹었던가?


“소희가 식판 받아가지 않았어요? 아줌마가 그렇게 말하던데.”

그걸 듣고 마왕을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마왕이 빙그레 웃었다.

 웃음을 보고 왜 그녀에게 치약냄새가 났는지 알아챘다. 멋대로 내 아침을 먹고 양치까지 한 다음에 내 침대에 기어든 것이었다.


내가 아침을 못 먹었다고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누나는 쟁반에서 약봉투를 꺼내고 있었다.

“이거 지금 바로 드시고, 다른 건 식후 30분 뒤에 드시면 되요.”


“네?”

“상처 부위에 물 닿게 하지 마시고, 상처에서 피 나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간호사 누나는 말을 끝내는 동시에 집게와 솜을 쟁반에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상처에 거즈와 테이푸를 붙이더니, 내가 말할 틈도 없이 쟁반을 들어서 마왕을 쳐다봤다.


“소희야.”

“음? 왜 그런가?”


“병원에선 그러지마. 나가서 해, 나가서.”

“무슨 소린가?”

“환자분도 그러지 마세요.”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뜨거웠다.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는 사이, 간호사는 들고 왔던 쟁반과 함께 방을 나갔다.


 아침  먹었다고 얘기도 못했는데.

“자네는 혹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마왕이 날 향해 물었다. 하지만 난 대답하기보다는 다른 걸 물었다.


“너 내 아침밥 먹었냐?”


“그렇네만?”

그렇네만, 이라고? 남의 밥을 먹은  치고는 뻔뻔한 모습이었다.

“왜 네가 그걸 먹어?”

“자네가 자고 있지 않았나.”


“깨웠어야지!”


“너무 기분좋게 자고 있는 바람에 그러질 못했네, 미안하네.”

“근데 왜 먹었냐?”

“식으면 맛없지 않나. 버리기도 아깝고. 그래서 먹었지.”

“그러냐? 잘했다, 잘했어.”

“칭찬 고맙네.”


“칭찬 아니야!”


“후훗.”


마왕은 웃으면서, 내려 놨던 지퍼를 올렸다. 그리고 병실 안에 있는 작은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짐이 사왔네. 열어보게.”

 말을 듣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로 가서 열어보니, 마왕이 사준 음료수 옆에 샌드위치가 보였다.


“샌드위치 사왔냐?”

“당연하지 않나. 자네 아침을 먹었는데.”

아까 화냈던 것에 미안함을 느끼면서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런데,


“이거 왜 이러냐.”

원래라면 이 샌드위치는 이등변 삼각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건 한쪽 모서리가 사라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사올 때 한 입 먹은 것처럼.


“아, 그것 말인가?”


그걸 들어보이자, 마왕은 천역덕스럽게 말했다.


“환자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뭐?”


“게다가 너무 말끔하면 자네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싶었네. 그래서 짐이 조금 사용감 있게 만들었다네.”


“그게 말이 되냐!”

“서, 설마, 짐이 손댄 건 입도 대기 싫다는 말인가?”


“손이 아니라 아예 입을 댔잖아!”

“아니면 자네, 혹시 짐과 간접키스를 의식해서,”

“그건 아닌데!”

그 말을 듣자 마자 바로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었다. 그것도 마야가 먹었던 곳을. 게다가 어제 그녀가 입대고 마셨던 주스 병을 들었다. 마왕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마셨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는, 몸을 배배 꼬면서 말했다.


“자, 자네가 그렇게 짐을 열정적으로 원할 줄은 몰랐네만.”

“컥! 콜록!”


뿜진 않았지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입가에 흘러내리는 주스를 닦았다.

“말을 무슨, 콜록! 무슨 그렇게 하냐?”

“하핫, 짐의 장난이 조금 심했나 보군!”

“시끄, 콜록! 시끄러!”


배고팠기에 일단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입가심으로 음료수까지 마시고 병을 비웠다. 빈 병을 냉장고 옆 쓰레기통에 넣고 마왕에게 다가갔다.

“샌드위치  먹었다. 고마워.”

“괜찮네. 그런데 자네 퇴원은 언제인가?”

“왜, 계속  아침밥 훔쳐먹으려고 그러냐?”


“들킨 겐가?”


마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언제 퇴원하는지 알려줬다.


“월요일에 하지, 왜?”


“뭣이? 그 정도 상처에 사흘식이나 입원하는 겐가?”

“원래는 입원도 필요 없었거든? 그런데 너네 아버지께서 입원시킨 거잖아.”

“그럼 오늘 해도 괜찮지 않나?”

“주말에 무슨 퇴원이야.”


“주말엔 퇴원을 못하는 겐가? 미안하게 됐네.”

“아니야, 주말에 공짜밥 먹게 됐으니까 좋지 뭘.”


자취방에 있으면 뭘 먹을지 고민했을 건데, 차라리 입원한 게 다행이었구만. 삼시세끼를 이렇게 쉽게 해결했으니. 아니, 한끼는 이미 마왕이 먹어버렸지.

“근데  집에 안 가도 괜찮냐?”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다. 어제 저녁에 와서 오늘 아침까지 나와 계속 있어준 마왕이었다. 같이 있으면서 부모님한테 전화 오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가족관계가  좋은 건 아닌지 궁금했다.

무심하게 물어봤지만,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마왕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음? 괜찮네. 자네가 퇴원할 때까지 여기서 자고 갈 거라고 미리 말해놨네. 그래서 게임기랑 챙겨왔지 않은가.”

“나 퇴원할 때까지 있을 거냐? 너 옷이랑 씻는 건 어떻게 하고?”


“여기 일인실이지 않은가. 방마다 화장실이 붙어있는. 당연히 여기서 씻을 거네만.”


“뭐? 잠깐만.”


딸이 남자랑 단둘이 일인실을 쓰는데, 부모님이 신경을 안 쓴다고?


“너 내가 누구인지 부모님한테 말했냐?”

“당연하지 않은가! 짐을 구한 영웅아닌가!  개잡놈이 아니라.”

마지막에 욕을 한 걸 보니 과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영화관에서 있던 일을  놈이 했다고 알려졌으니까. 당연히 마왕 부모님도 날 과대라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얘네 부모님이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건데.
혹시 몰라서 마왕에게 물었다.

“너네 부모님은 내가 남자인 거 알고 계시지?”

“음~”


“너 왜 고민하냐. 설마 모르시냐?”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네! 잠깐만 기다려보게!”

마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나는 못 참고 그녀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뭘 하는 건지 지켜봤다. 그녀는 부모님께 보냈던 메신져를 확인하고 있었다. 대화창을 올리던 그녀가 갑자기 손가락을 멈췄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지현이랑 재밌게 놀아.’

 이름은 지현이 아니라 지헌이었다. 어렸을 때도 가끔씩 여자 이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렇게  줄은 몰랐다.

마왕 부모님은 내가 남자인 걸 알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 검도장을 통째로 줄 정도로 아끼는 딸이, 남자애랑 단둘이 밤을 보낸 걸 알면. 게다가 자신들이 준비한 일인실에서 보낸 건데.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들 눈엔 다르게 보이겠지.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힘없이 앉으며 물었다.


“너 어쩌려고 그러냐.”


“괘, 괜찮을 걸세.”

“괜찮은 게 아니잖아, 지금. 날 완전히 여자로 알고 계시는데.”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죽이신 않으실 걸세. 아마도.”

“죽이다니?”

“짐이 실언했군. 아무 것도 아닐세.”

“죽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해줘, 제발!”

“아무 것도 아니라 하지 않았나.”


마왕이 내게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불안감이 들어서 일어나려는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또 간호사 누나가 시끄러워서 찾아온  같았다. 일단 물어보는 건 나중에 하기로 했다.

“네,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자 마자 병실 문이 열렸다. 그런데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건, 간호사복 차림에 피곤에 쩔은 누나가 아니었다.


“지헌아, 너 왜 일인실에 있는 거야?”


찾아온 사람은 유리였다. 검은 슬랙스에 정사이즈보다 더 큰 베이지색 니트를 입어서, 꾸민  같지 않으면서도 꾸민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깨에 내가 사줬던 가방을 메고, 다른 손엔 병문안 선물인지 하얀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유리는 문을 열 때 복도 쪽을 보고 있어서 안에 있는 마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문이 완전히 열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그녀는 마왕을 발견했다.

“어?”


웃고 있던 유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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