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2화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신혼여행을 떠나는 공작 내외를 배웅했다. 두 사람의 신혼여행에는 공작가의 기사 몇 명과 오스칼의 시중을 들 빠릿빠릿한 하녀 하나가 동행하기로 했다.
칼릭스 공작가의 문양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마차에 차곡차곡 짐이 쌓였다. 크고 단단한 장거리 여행용 검은색 마차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푹신한 안감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오스칼이 창문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레오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레오가 오스칼의 시선에 눈길을 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오스칼이 황급히 고개를 넣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내심 말을 타고 여정을 지휘할 레오가 부러웠던 터였다.
홀로 마차를 타고 이동할 일이 막막하기도 했고. 하지만 공작부인이 체통도 모르고 말을 타고 여행길에 올랐단 말은 듣기 싫었다.
“흠.”
오스칼의 눈빛이 어떤 의미였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레오가 그가 타고 갈 말과 마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스테카 경. 경이 선두에 서지. 난 부인과 함께 마차로 이동하겠네.”
“신혼여행이니, 그리하시지요.”
마차를 호위할 기사가 레오를 향해 싱긋 웃었다. 레오가 마차에 오르자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진 오스칼이 그를 반겼다.
“넌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게 아니었어? 난 괜찮은데….”
“부인을 홀로 남겨 둘 순 없지.”
좋아하는 게 눈에 빤히 보이는 데도 아닌 척하는 모습이 귀여워 오스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그가 창문 너머로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랴!”
비스테카 경의 구령과 함께 말과 마차가 출발하자 사용인들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사 몇이 커다란 마차를 호위하며 나아가자 공작 부부의 시중을 들 사용인들을 태운 작은 마차가 뒤를 따랐다.
꽤 순조로운 여행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릭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보고 덤벼들 정신 나간 습격자들은 없었다. 칼릭스 공작과 그 부인이 이교도와 북부 도적떼를 박살 내버린 장본인이란 건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스칼은 마차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아 연신 눈을 반짝였다. 라인하트의 남부로 향하는 여행길은 북부로 향하던 출정길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맑고 청명한 하늘과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길, 멀리 보이는 푸른 호수는 꼭 엽서에서 보던 풍경과 같았다.
“경치 정말 예쁘다! 나도 말을 타고 가고 싶은데.”
오스칼이 아쉬운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쉬자, 레오의 눈에 웃음기가 서렸다.
“공작 부인께서 기사들 틈에 꼈다간, 기사들이 불편해할 거다.”
“칫. 그래서 내가 드미트리와 애버트를 데려가자고 했잖아. 그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텐데.”
오스칼이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렸다. 신혼여행의 호위 기사 중 뤼미에르 기사단 소속이었던 청년들이 모두 빠졌다.
“그 녀석들은 칼릭스 기사단 정비와 훈련에 바빠.”
딱 잘라 말한 레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그건 핑계였다.
그 녀석들과 함께 신혼여행을 갔다간, 달콤한 신혼여행이 아닌 땀내가 폴폴 나는 전지훈련 분위기가 물씬 풍길 것이 눈에 선했다. 지금껏 오스칼을 형님으로 대하며 스스럼없이 지내던 녀석들이 아닌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오스칼이라면 신혼여행 내내 식사시간마다 그 녀석들을 불러대고, 밤새 술을 퍼마실지도 몰랐다.
“앗!”
아이처럼 창문에 손을 찰싹 붙이고 밖을 내다보다가,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와 눈이 딱 마주쳐 버린 오스칼이 탄식을 내질렀다. 공작부인이 교양 없다고 생각했으려나. 오스칼이 황급히 몸을 물리며 중얼거렸다.
“공작부인이란 거, 상상만 해도 어려워.”
“차차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있지 말고 이리와.”
레오가 팔을 뻗어 그의 단단한 몸에 오스칼을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오스칼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넌 어쩜 그렇게 공작 노릇에 금방 적응한 거야? 치사해.”
어이없는 타박에 레오가 푸스스 웃었다.
“뤼미에르 기사단의 훈련은 엄한 편이었어. 우리 기사단에 적응한 너라면, 공작부인 역할은 훨씬 쉽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꼭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래야 할 텐데….”
격려하듯 싱긋 미소짓는 레오를 바라보며 오스칼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불행히도 오스칼은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작부인으로 사는 것이 이교도와 마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
점심때가 조금 지난 오후, 공작가의 마차는 시에나 남쪽의 번화한 도시 몬탈치아노에 도착했다. 라인하트에서도 손꼽히게 유서 깊은 도시인 몬탈치아노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유산과 같았다.
하나같이 호화스럽고 멋진 건물들은 모두 벽돌로 지어졌는데,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빛을 띠어 어딘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레오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오스칼이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건물마다 도시의 상징인 검은 수탉이 수놓아진 푸른 깃발이 걸려있었다. 빛바랜 붉은 벽돌과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레오, 저기 좀 봐!”
광장 한가운데에서 힘차게 물줄기를 뿜어내는 하얀 대리석 분수대를 향해 뛰어가려던 오스칼이 흠칫 멈추어 섰다.
뒤따라오던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전담 하녀, 비앙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냉큼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오스칼의 이마 위로 받쳐 들며 자연스럽게 오스칼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
“고, 고마워.”
겨우 예법을 차린 오스칼이 비앙카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들 테니, 조금 떨어져 뒤따라 오도록.”
비앙카에게서 양산을 받아든 레오가 오스칼의 손에 깍지를 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것도 예법에 어긋난다고 들었는데. 시무룩한 눈으로 슬그머니 손을 빼어낸 오스칼이 속삭였다.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건 결례랬어.”
“손을 좀 잡는다고, 대체 누구에게 결례라는지 모르겠군.”
레오가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나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레오는 예법대로 손 대신 팔을 내밀어 오스칼을 에스코트했다.
“역시 귀족이란 거, 쉽지 않은 것 같아. 솔직히 방금도 방정맞게 광장을 구경하러 뛰어나갈 뻔했다고.”
“좀 뛰어다닌다고 해서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울적할 것 없어.”
“하지만 칼릭스 공작부인이 천방지축이란 소문이 나면 네게도 좋지 않을 거 아냐.”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평판에 비하면, 천방지축 부인이 있다는 소문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지.”
레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오스칼은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가 출신이 불분명한 평민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가 카탈리나의 백작 영애, 세레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경위도,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오스칼의 험담에 분개한 에렌이 의도적으로 사교계에 알린 일이라고 했다.
국왕이 나서 오스칼의 신분을 보증하자, 결혼을 반대하던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장을 하고 평민들 틈에 섞여 살아온 공작부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귀족들은 오스칼의 일거수일투족에 입을 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조심조심 예법을 갖춰 걷는 오스칼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레오가 속삭였다.
“얼른 점심부터 먹으러 가지. 배가 고파 우울한 게 분명하군.”
***
두 사람의 점심 장소는 몬탈치아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정해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열두 개의 커트러리와 크기별로 석 장씩 겹쳐 올려진 금테를 두른 접시를 보자, 오스칼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에겐 식사용 나이프보다는 검투용 검이 더 다루기 쉬울 게 분명했다.
오스칼이 앞에 앉은 레오를 흘끔거렸다. 그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관자를 곁들인 엔다이브 샐러드를 알맞은 크기로 썰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 매력적인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그와 달리 어설픈 제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낡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울퉁불퉁하게 빚어진 커다란 접시 위에 고기와 야채, 그리고 빵을 한꺼번에 올려서 먹었는데.
힘없이 관자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은 오스칼이 속삭였다.
“넌 정말 나로도 괜찮은 거야?”
“그게 무슨 소린가?”
레오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냐….”
식사를 마친 오스칼은 부쩍 말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레오가 마차에 앉아 초조한 듯 뺨을 쓸었다. 오스칼이 무려 스테이크를 남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가 잔뜩 미간을 구긴 채 골몰하는 사이 마차는 칼릭스 공작령의 아름다운 영지, 이스키아에 도착했다. 대대로 칼릭스가의 충성스러운 가신이었던 이스키아 자작 가문에서 다스리던 작은 항구도시였다.
칼릭스 가문이 몰락할 때, 함께 작위를 박탈당한 이스키아 자작은 영지에 대한 애정으로 성에 남아 사용인의 신분으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영지를 위해 일했다. 덕분에, 아르투아가 임명한 무능력한 소영주가 도시를 완전히 망쳐버리는 일을 막아냈다.
아르투아가 몰락한 뒤, 칼릭스 공작가와 함께 복권된 이스키아 자작은 그의 아내와 함께 성문 앞까지 나와 젊은 칼릭스 공작 내외를 맞이했다.
“신, 이스키아 자작이 칼릭스 공작 전하와 비전하를 뵙습니다.”
“환대해 주어 감사하오, 이스키아 자작.”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두 사람을 향해 레오가 온화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신이 진작 혼자 되신 공작 전하를 모셨어야 했는데, 이 몸이 불충하여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자작께서도 힘드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자작은 촉촉하게 젖은 눈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비전하께도 인사 올립니다.”
큰아버지뻘은 되어 보이는 자작 부부가 저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자 오스칼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황했지만 비앙카의 도움을 받으며 오스칼이 가까스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예를 갖추었다.
“바, 반갑습니다.”
“긴 여정으로 힘드셨을 텐데, 편히 머무르시다 가시길 바랍니다. 저녁 만찬을 준비했으니 짐을 푸시는 대로 식사를 하시지요.”
이스키아 자작이 인상 좋게 웃었다. 그러나 오스칼은 어정쩡하게 미소지었다. 귀족 내외와의 첫 식사 자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긴장할 필요 없어.”
레오가 오스칼의 손을 말아쥐었다. 마른 입술을 한번 쓸어낸 오스칼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