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작의 외전이 좀 이상합니다 (56)화 (56/138)

56화



 

오스칼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거 완전 그거잖아?’

실전 경험은 없지만, 로맨스 소설은 질릴 만큼 읽었다.

동굴에서, 오두막에서, 빈집에서…. 로맨스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독하게도 비를 피해 오지 않았는가.

비를 피한 그곳에서 은근히 벌어지는 스킨십은 특히 클리셰의 정수였다. 풋풋하게 손을 잡는 수위에서 불타오르는 고수위까지 말이다.

제 손등에 닿았던 에렌의 부드러운 입술과 뜯겨 나간 셔츠 안으로 보이던 그의 조각 같은 가슴 근육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오스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에렌의 나른한 음성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오스칼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일단 젖은 옷부터 벗는 게 어때. 갈아입을 옷이라도 줄까?”

“아, 아니! 돼, 됐어요!”

옷을 벗으라는 말에 오스칼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치며, 푹 젖어 너절해진 재킷을 허겁지겁 여미었다.

오스칼이 급하게 동여맨 재킷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에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감기 걸릴 텐데.”

그 말을 하며 에렌이 질척해진 자신의 승마복 재킷을 벗었다.

“꺄악! 버, 벗지 말아요!”

눈을 가리며 호들갑을 떠는 오스칼을 본 에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드모아젤, 지금 혹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 경이 갑자기 오…옷을 벗으니까.”

“바지라도 벗으면 아주 기절을 하겠군.”

“자꾸 그 버…벗는다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그 말에 에렌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멀쩡한 드레스를 칼로 베고, 내 셔츠를 손으로 뜯던 사람은 어디 갔어?”

“그, 그건….”

자신의 전적을 떠올린 오스칼이 민망함에 눈알만 도로록 굴렸다.

그 모습에 에렌이 한번 피식 웃고는, 젖은 재킷을 벗어 의자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벽난로 앞 카펫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바지에서 느껴지는 축축함에 에렌이 눈을 찡그렸다.

“그대가 옷도 못 갈아입게 한 덕분에 바지가 묵직해.”

에렌이 응접실 한가운데 뻣뻣하게 서 있는 오스칼을 장난스러움이 묻어있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가 앉은 카펫 위로 물기가 흥건했다.

“그대도 여기 와서 앉지, 그래.”

에렌이 그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들겼다.

“아, 아니….”

한사코 거절하려던 오스칼이 말끝을 흐렸다. 젖은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날뛰는 말 위에서 긴장했던 몸이 후들거리며 떨려왔다.

결국, 오스칼은 쭈뼛거리며 에렌과 한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꼼지락거리며 무릎을 당겨 앉았다.

만일을 위해서 에렌과 자신 가운데에 마치 선이라도 긋는 것처럼, 검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 모습에 에렌이 실눈을 한번 뜨고는, 한쪽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려 오스칼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오늘도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아, 아니요. 거, 거리 두기가 중요하니까요.”

평소답지 않게 그를 의식하는 오스칼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지 에렌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에 착잡한 감정이 서렸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대가 죽을 뻔했어.”

“그게 왜 경 때문이에요? 제가 말을 잘 못 다뤄서 그런 건데…. 오히려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할 일이죠. 자칫 경도 위험했을 거예요.”

“아냐, 그대의 탓이 아니야. 분명 그 말,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 자세한 건 조사를 해야 알겠지만, 아마 흥분제 같은 걸 먹었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스칼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말은 원래 내가 탔어야 할 말이야. 누군가 내가 그 말을 타고 잘못되길 바란 거지.”

에렌은 죄책감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최근 자신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오스칼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그는 변변한 호위도 없이 무리해서 교외로 나오기를 고집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가 멋대로 말을 바꾼 탓에, 오스칼이 죽을 뻔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대를 그 말에 태우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대를 이곳으로 불러내지 말았어야 했나 봐. 정말…. 미안해.”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오스칼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가만히 할 말을 고르던 오스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책하지 않아도 돼요. 덕분에 다친 곳도 없고….”

에렌이 고개를 돌려 오스칼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눈이 예뻤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친 곳이 없긴. 여기 상처가 났는데. 마드모아젤 얼굴에 이게 뭐야.”

튀어 오른 작은 돌조각이 남긴 붉은 생채기가 아직 오스칼의 흰 뺨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에렌이 오스칼의 상처 난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뺨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뜨거워 오스칼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푸른 눈이 오스칼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이 정도는 금방 나아요.”

황급히 그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떼어낸 오스칼이 말을 더듬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요함이 어색한 듯, 먼저 입을 연 것은 오스칼이었다.

“그럼…. 정말 누가 경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예요?”

이 한적한 농장에 무슨 암살자가 오겠냐며 그를 타박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아무래도 자신의 입이 방정인 모양이었다.

“아마 날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나 보지.”

말을 마친 에렌이 손바닥에 피가 맺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냉정한 표정이 떠올랐다.

누군가 그가 오늘 이곳에 방문하리라는 것을 알고 일을 꾸몄다.

만약 오스칼이 오늘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자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였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오스칼이 무사한 지금도 당연히 그자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사채 같은 거 쓰고 안 갚았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푸흡. 하하하.”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던 에렌이 크게 웃어댔다. 마드모아젤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사채라니!

“왜요…. 기껏 걱정돼서 하는 소린데….”

에렌이 자신의 말을 비웃는다고 여긴 오스칼이 볼을 부풀렸다.

“하하, 내가 빚쟁이한테 시달리고 있었을까 봐 걱정돼?”

“사업가가 암살을 당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은 암살 위기에 처하지 않는다고요.”

오스칼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사실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거든.”

에렌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내며 오스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심상치 않은 태도에 잔뜩 몰입한 오스칼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맞아. 외모나 재력 모두 평범하지 않지. 분명히 이 사람에겐 뭔가 있어!

어느새 오스칼의 몸은 에렌에게 바짝 다가가 다음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그럼요?”

“사실, 나는….”

에렌이 문득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오스칼이 안달 난 듯 그를 닦달했다.

한국인은 말을 하다 마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사실…. 그다음은 뭔데요?”

에렌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오스칼은 그의 입술만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오스칼의 시선을 느낀 에렌이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한번 쓸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아까 그대가 날 이름으로 부르니까 좋던데. 이제부턴 경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내 이름만 부르는 건 어때?”

에렌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그의 이름을 외치던 오스칼을 떠올렸다.

“싫어요. 평민 남자가 귀족을 이름으로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둘이 엄청 깊은 사이인가 보다, 생각하겠지.”

“남자랑 그런 소문 나면 좋아요?”

오스칼이 질색하는 표정을 했다.

“오히려 좋아. 적어도 그대를 남자로 알고 있는 한, 딴 놈들이 접근하진 않을 테니까.”

“난 싫거든요?”

오스칼이 불만스러운 눈을 했다. 그 모습에 에렌이 살짝 웃었다.

“어쨌든, 그대는 내게 특별하니까.”

오스칼의 뺨에 열이 올랐다.

어쩜 이 남자는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당황을 숨기려는 듯 오스칼이 화제를 돌렸다.

“아, 아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요. 경이 사실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뭔데요?”

“그렇게 계속 ‘경’이라고 딱딱하게 부를 거면, 안 가르쳐 줄 거야.”

에렌이 자신은 아쉬울 게 없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오스칼이 당황한 눈으로 에렌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어, 어쩌라고요?”

“날 에렌이라고 부르란 거지.”

오스칼이 너무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줄곧 높임말을 썼던 탓인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기가 민망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오스칼이 초조한 기분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래, 잠깐의 민망함보다는 궁금증을 해결하는 일이 우선이지.

오스칼이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에렌은 그런 오스칼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오스칼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른 가르쳐 줘요. 에, 에, 에렌.”

에렌의 푸른 눈동자가 짙어졌다. 고작 이름 하나 부르면서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말까지 더듬어 대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오스칼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망울, 발그레한 뺨, 그리고 제 이름을 부르는 입술.

아, 이런.

가슴에 불을 지핀 것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에렌이 순식간에 오스칼의 팔을 잡아채 그의 몸을 향해 당겼다. 그의 뜨거운 손이 오스칼의 머리를 감싸 쥐며 부드러운 머리칼 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오스칼의 입술 위로 에렌의 달뜬 숨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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