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에렌의 지시에 따라 알랭은 인쇄소를 방문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오스칼을 붙잡아 마차에 구겨 넣은 후,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푸른 들판에 내려 주는 것으로 제 의무를 다했다.
오스칼이 마차에서 내리자, 세련된 승마복을 차려입은 에렌이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금사가 수놓아진 순백의 승마복은 그의 금발과 퍽 잘 어울렸다.
가을 하늘빛을 닮은 청아한 그의 눈동자가 오스칼을 바라보며 반짝였다.
“그대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걸.”
“여긴 어딘가요? 설마 정산금을 가축으로 주려는 건 아니죠? 전 무조건 돈으로만 받아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빠져나오던 오스칼이 에렌을 발견하곤 톡 쏘아붙였다.
“하여간 그대처럼 성미가 급한 마드모아젤은 처음이야. 인사도 생략하고 용건부터 들이대는 거 말야.”
에렌은 서운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리고는, 오스칼에게 투정 섞인 목소리를 냈다.
“흠흠.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갑자기 알랭 씨가 절 마차에 태우길래 납치라도 하는 줄 알았다고요. 하마터면 너무 놀라서 알랭 씨 목을 베어버릴 뻔했잖아요.”
농담 같지만, 그녀라면 정말 그 말대로 했을지도 몰랐다.
에렌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하마터면 알랭을 떠나보낼 뻔했다. 그에게 따로 보너스를 좀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에렌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내 소유의 농장이야. 기분 전환할 겸 나왔지.”
이야, 이제 농장까지. 이 양반 돈 자랑은 끝이 없구먼?
“그럼 경 혼자 올 것이지, 왜 나까지 데려와요?”
“교외는 위험하잖아. 혹시 날 암살이라도 하려는 자가 있으면 그대가 내 호위라도 해주려나 했지.”
에렌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암살은 아무나 당해요? 이런 한적한 농장이 뭐가 위험하다고…. 여기 농장의 말은 암살 기술이라도 배우나 보죠?”
오스칼이 툴툴거렸다. 사람보다 가축이 많아 보이는 이곳에서 일어날 위험이란 소똥이나 말똥을 밟을 일뿐인 것 같은데 바쁜 사람을 불러내고 난리람!
“하하하, 사용인들에게 일러둬야겠군. 앞으로 말들에게 암살 기술을 가르치라고 말야. 아주 유용하겠어.”
웃음이 많은 건지 사람이 좋은 건지, 자신의 빈정거림에도 농담을 하며 웃는 에렌을 바라보다가 결국 오스칼도 웃어버렸다.
“기왕 온 김에 함께 승마라도 하는 게 어때. 그대의 검술 실력을 보면 승마 실력도 당연히 수준급일 것 같은데.”
에렌이 싱긋 웃었다. 살롱에서 확인한 오스칼의 검술엔 고급 교육을 받은 티가 났다.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에서 딸에게 호신용 기사 교육이라도 시킨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기사 교육엔 승마도 포함된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오스칼에 대해 제대로 맞혔을 것이라 기대했다.
“음… 사실 그렇진 않아요. 그럭저럭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다는 정도?”
“정말? 그대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물론 그 점이 흥미롭지만.”
또 예상을 빗나간 대답에 에렌이 허탈한 듯 웃었다.
“말을 잘 타고 싶긴 하죠. 말을 타는 건 아직 좀 무섭긴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대는 오늘 아주 제대로 찾아왔어. 난 왕국에서 말을 제일 잘 타는 사람 중 하나거든.”
노이어에서 낙마한 기억을 떠올리며 아찔한 듯 몸을 잘게 떠는 오스칼을 향해 에렌이 미소 지었다.
그는 귀족 중에서도 뛰어난 기수였다. 몇 년 전 마상 대회에 출전한 그의 모습에 한눈에 반한 외국의 공주가 그에게 청혼했다가 단숨에 차여 버린 일은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회자 될 정도였다.
알랭이 오늘의 데이트를 준비하며 얼마나 많은 욕을 중얼거렸든, 제 주인의 매력 발산 포인트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훌륭한 집사였다.
어느새 농장의 마구간지기가 두 사람 앞으로 흰 말과 검은 말을 끌어왔다.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털과 탄탄한 근육을 가진 두 마리의 말은 한눈에 보아도 명마였다.
“두 마리 말 모두 최상급입니다. 특히 검은 말은 아주 뛰어나 주인님을 위해 특별히 훈련한 놈입니다.”
마구간지기의 말에 에렌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스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 위로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는 건 처음이야. 나의 처음은 다 그대 거라고.”
어딘가 야릇하게 들리는 그의 언사에 마구간지기가 마치 못 들을 걸 들은 것처럼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오스칼이 투덜거렸다.
“제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오해할 만한 말 좀 하지 말아요.”
“그럼 둘만 있을 땐 해도 되나?”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오스칼이 눈을 흘겼다. 에렌은 재촉하듯 거듭 손을 내밀었다. 오스칼이 마지못해 살짝 그의 손을 잡자, 그는 오스칼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어 검은 말의 안장 위에 앉혔다.
흰 말에 올라타려던 오스칼은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말이 놀랄걸?”
“누구 때문인데요! 그리고 검은 말은 경의 것이라면서요?”
오스칼이 씨근거리자 에렌이 윙크하며 흰말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대에게는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뿐이니까.”
“윽.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살짝 얼굴을 붉힌 오스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에렌이 말을 잘 탄다는 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오스칼은 에렌의 가르침 아래 부지런히 말을 몰았다. 그는 꽤 자상하고 실력 있는 스승이었다.
“그럼 이제 좀 빨리 달려볼까? 이 길을 따라 쭉 달리면 내 별장이 있어. 거기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야.”
에렌이 어느새 제법 능숙하게 말을 타는 오스칼에게 제안했다. 그 말에 오스칼이 눈을 반짝 빛냈다.
명마라 그런지, 속도감이나 안정감이 기사단에서 타던 말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왕국 최고의 말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을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좋아요!”
오스칼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차를 가해, 냉큼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대단한 행동력을 가진 마드모아젤이야.”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오스칼의 뒷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린 에렌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았다.
신나게 말을 몰던 오스칼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속도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이, 이게 왜 이래?”
오스칼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속력을 높이며 흥분한 말은 어느새 오스칼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에렌이 가르쳐 준 대로 고삐를 채고 말을 달래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안장 위에서 허둥거리는 오스칼의 모습에 에렌은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오스칼을 바짝 따라잡아 흑마의 모습을 확인한 에렌의 등골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말은 불규칙하게 호흡을 내뱉으며 초점 없이 풀린 눈으로 마냥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마드모아젤! 말을 세워!”
“안 돼요! 도통 말을 안 듣는다고요!”
이제 말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말의 안장이 덜그럭거려, 오스칼의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중심을 잡기 어려워진 오스칼이 말 위에 바짝 엎드려 말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히이잉!
갈기를 붙잡는 자극에, 검은 말이 거세게 투레질했다. 고르지 못한 돌길을 내달리는 말발굽에, 작은 돌멩이들이 튀어 올라 오스칼의 뺨을 스쳤다. 에렌은 필사적으로 오스칼을 쫓았다. 이 길의 끝에는 깊은 협곡이 있었다.
“오스칼!”
오스칼이 간신히 말의 목덜미를 붙든 채 고개만 돌려 에렌을 바라보았다. 파랗게 질린 낯빛은 곧 울 것 같았다.
“그대로 가면 낭떠러지야! 말에서 뛰어 내려야 해!”
“여, 여기서 어떻게 뛰어내려요?”
오스칼이 반쯤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렸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붙잡을 테니까 이쪽으로 뛰어!”
“놓치면 어떡해요?”
“날 믿어. 난 그대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니까.”
에렌은 간절한 눈으로 오스칼과 숲길 너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러다 곧 낭떠러지였다.
오스칼이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몸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에렌이 노련하게 말 사이의 간격을 좁혔다. 사정거리 내에서 그가 한 손으로 고삐를 쥔 채 오스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꼭 잡아야 해요! 지금 뛰어내릴 거니까!”
“지금이야!”
“에렌!”
오스칼이 기도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에렌은 그의 품으로 뛰어드는 오스칼의 몸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오스칼이 그의 팔과 어깨에 단단히 매달렸다.
“윽!”
오스칼을 온몸으로 받아낸 에렌이 이를 꽉 깨물었다. 오스칼의 허리를 감싸 안은 에렌의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오스칼이 뛰어내린 검은 말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곧 비명 같은 말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에렌은 오스칼의 몸이 자신의 팔에 완전히 들어온 것을 확인한 후 재빨리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흰 말은 에렌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걸음을 멈추곤 여유롭게 투레질했다.
오스칼은 마주 앉은 에렌의 몸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었다. 에렌의 허리를 감아 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오스칼이 진정이 되지 않는 듯 몸을 떨었다. 에렌은 그의 품에 안긴 오스칼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스칼의 떨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에렌이 오스칼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난 계속 그대와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계속 이렇게 있다간 피차 좀 불편한 상황이 생길 거 같아서 말이야.”
에렌이 오스칼을 감싸던 자신의 팔을 떼어낸 후 장난스러운 눈으로 오스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아랫도리 부분을 한번 바라보고 먼 산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오스칼은 자신이 에렌의 하반신에 지나치게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꺄악!”
소스라치게 놀란 오스칼이 에렌의 허리를 감고 있던 자신의 팔을 화들짝 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오스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렇게 질겁을 하고 도망가라는 말은 아니었어.”
오스칼을 따라 말에서 내린 에렌이 짐짓 능글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뒷덜미 역시 붉어져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 어쨌든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당황한 오스칼이 말까지 더듬어 대며 말했다. 하지만 이내 에렌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아냐…. 내 덕분에 그대가 산 게 아니라, 나 때문에 그대가 죽을 뻔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스칼이 눈을 동그랗게 뜬 그때,
후둑, 후두둑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렌이 한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는 눈을 찡그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나기인가 보군, 다 젖기 전에 얼른 이동해야겠어.”
말 위에서 에렌이 손을 내밀었다. 오스칼이 잠깐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았다. 오스칼이 다시 자신의 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에렌이 말을 달렸다.
어느덧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를 뚫고, 그들은 숲 어귀에 있는 에렌의 별장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별장 안은 냉기가 감돌았다.
“최근엔 좀처럼 사용한 일이 없어서 삭막하군. 일단 체온이 내려가기 전에 불부터 피우자고.”
에렌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한 손으로 털어내며 별장으로 들어섰다. 그의 금빛 머리칼에 반사된 물방울이 반짝거리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비로 흠뻑 젖은 오스칼의 몸에 커다란 수건을 둘러 준 에렌이 응접실의 벽난로로 향했다.
응접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 있던 오스칼이, 어쩐지 익숙한 듯 친근한 전개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자, 잠깐. 이거…. 설마….’
혹시, 아무도 없는 숲속의 별장에서 젖은 남녀가 비를 피하는 클리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