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91화 (91/95)

[91화]

빛 한 점 들지 않는 의궁은 암흑 속에 잠긴 듯 고요했다. 그러한 전경을 서문의 무감한 눈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태황궁에 오기 전, 제 어린 날들이 떠올랐다.

꿈 많고 생기 있었던 소년의 눈빛을.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되짚어 보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만큼 제 마음 또한 시커멓게 물들어 갔고.

…끝인 건가?

천태비궁과 양궁 쪽에서 들리던 소음과 굉음, 그리고 사납게 들썩이던 분위기가 일순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이유는 아마 하나일 것이다.

천태비, 아니 귀물의 죽음.

서문은 돌아서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발을 딛는 돌계단이, 곧 막을 내릴 자신의 인생 같았다. 그 끝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허나 마음만은 초연했다. 생각해보니 늘 그래왔다. 의술에 빠져 태어의가 되는 것을 욕망할 때부터.

언제나 무슨 일을 선택함에 있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게 순리였으며, 그 결과 또한 받아들이는 게 제 몫이라 생각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영생을 누리자던 귀물은 몰락했고 그 권세를 따랐던 자신 또한 무너질 차례였다.

막상 이리되고 나니 영생을 욕심낼 정도로 삶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걸 알았다. 순순히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사는 동안 뜻하는 바를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의술에 대한 집념, 연구. 그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

후회는 없다.

서문이 제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는 언제나처럼 서책과 도감들로 너저분했다. 그것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적어도 제가 머물렀던 곳은 깨끗이 정돈하고 경비대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마침내 이부자리까지 잘 개어두었을 때,

쾅쾅쾅!

누군가가 다급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서문이 놀란 눈을 치떴다.

“장곡….”

“서문님!”

장곡이 식은땀을 흘리며 방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의 품에는 황록색의 뭉텅이가 안겨 있었다. 장곡이 막 데리고 도망쳤을 때는 사람의 형상이라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반죽덩어리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번득이던 눈마저도 물컹이는 살 속에 묻혀 사라지고 없었다.

장곡은 어깨부터 허리춤까지 늘어져 있는 그 덩어리를 안간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었다.

“도와, 도와주십시오! 당장 천자님을 도피시켜야 합니다!”

이미 귀물들이 궁 둘레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나갈 방법이 없었다. 천태비가 귀물이란 사실을 알고 경비대는 모두 항복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지방 도시의 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외치는 장곡을 보며, 서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포기하게.”

“…예?”

“다 끝났어.”

장곡의 눈이 커다래졌다.

“끝났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곡이 외팔로 서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지금 그게 이 나라의 태어의가 할 소립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천자님만은 지켜야 하거늘!”

“누가 천자라는 건가?”

서문이 장곡의 손을 느리게 떨치며 물었다.

“자네 품에 안겨 있는 그 덩어리가?”

하. 서문이 짧은 웃음을 토했다.

“이제 그만 인정하게. 그건 천자가 아니라 귀물일뿐이라는 걸.”

서문이 냉정하게 돌아섰다. 장곡의 품에 안긴 현을 보는 게 괴로웠다. 마력의 한계가 다한 건지, 부작용인 건지. 그도 아니면 불로초 때문인지. 현은 이미 귀물로 변한 것 이상으로 무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이이잇, 서무운-!”

장곡이 벼락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서문을 외쳐 불렀다. 책상 앞에 서 있던 서문이 돌아본 순간,

푸욱-

날카로운 것이 복부를 찔렀다.

“…컥.”

서문이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봤다. 어른 손만 한 단도가 꽂혀 있었다. 장곡이었다. 그가 품에 넣고 다니던 단도로 서문을 찔렀다.

“…자, 장곡…,”

비틀거리던 서문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장곡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자위로 서문을 노려봤다.

“네가 뿌린 씨앗이다. 네 자식이란 말이다! 헌데 어찌하여…, 어찌하여!”

장곡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물 새끼도 키우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이었다. 가족이 되는 법이었다. 아프면 같이 아프고, 슬프면 같이 슬픈 법이었다.

하물며 생명을 준 이가 어찌하여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장곡이 현을 추슬러 안으며 말했다.

“어깨에 꼭 붙어 계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장곡이 그대로 서문을 두고 방을 나갔다. 그 모습을 서문의 눈이 좇았다. 이내 의식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사라졌다. 동공의 움직임이 멈추고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허망한 끝이었다.

장곡은 그 길로 궁의 뒤편으로 향했다. 현이 목욕재계를 하러 다니던 길이 있었다. 산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막혀버렸다. 먼저 온 귀물경비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말을 탄 풍이 칼을 뻗으며 장곡에게 경고했다.

“귀물 현을 내놓아라!”

장곡이 현을 감싸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천자님께 예를 갖추지 못할까!”

말은 그리하면서도 장곡은 이미 끝을 예감하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천태비가 나눠주는 혈담초를 마시며 잔병치레조차 없이 지금껏 건강하게 살아왔다.

“천자님…, 걱정마십시오. 이 장곡이 죽는 순간까지도 곁에 있어 드릴 테니.”

장곡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으로 궁에 들어와 선대 천자와 현까지 성심으로 보필해왔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일에 자부심도 컸다.

결국, 장곡이 영생으로 누리고 싶었던 건 자신과 함께 영생하며 살아갈 현의 모습을 지켜보는 거였다. 아기일 때부터 수족으로 살펴오며 현에게 애정, 그 이상을 주었다. 비뚤어졌을지언정,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풍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당장 귀물 현을 내려놓고 항복하라!”

“이놈들!”

장곡이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길을 비키지 않으면…!”

쉬익- 화살이 날아들었다.

퍽!

경고성 화살은 그대로 장곡의 다리로 날아가 꽂혔다.

장곡이 휘청하며 무릎을 꿇었다. 어쩔 수 없이,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나이든 몸이었다. 현을 안고 태황궁 여기저기를 누빈 것만으로도 이미 기력을 다했다.

“…천자님.”

장곡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현을 불렀다. 안겨 있던 덩어리가 꿈틀, 장곡의 품에서 움직였다. 인간으로서의 감각도, 생각도 서서히 사라져갔지만 장곡의 감정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미였던 천태비도, 아비였던 서문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장곡의 감정만은 느낄 수가 있었다.

꾸륵- 꾸르륵.

품에서 꿈틀대는 현을, 장곡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젠 눈코입도, 인간의 언어도 잃어버린 현이었지만, 그와 한 공간에서 한 몸처럼 지낸 오랜 세월 때문인지 그가 전하려는 뜻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커다랗게 홉떴던 장곡의 눈이 이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예. 뜻대로 하십시오.”

눈가에 잔주름을 보이며 다정한 손길로 현을 보듬었다.

“천자님을 보필할 수 있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생을 거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제 자식으로 태어나소서.

화륵-

현의 몸에 불이 붙었다.

“…허억!”

놀란 경비대가 뒤로 물러났다. 제법 큰 불길이었다. 현과 그를 안고 있는 장곡까지 덮칠 만큼.

“불을 꺼라, 당장!”

풍이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현이 제 몸에 남아 있던 천태비의 마력으로 자연 발화한 것이기에 쉽게 꺼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태우고자 결심한 모든 것들을 다 태울 때까지…….

한참을 타오르던 불은 어느 순간 서서히 그 불길을 줄여갔다. 마침내 작은 불씨만이 남았을 때, 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하나의 덩어리만이 남아 있었다.

장곡과 현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 * *

쾅!

“가비야!”

양궁의 문이 활짝 열리며 반소가 뛰어 들어왔다.

가비, 가비는 어디에!

반소가 미친 듯이 양궁을 헤집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비야!”

큰소리로 외쳐 불렀지만 사람이 모두 빠진 양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정적을 가르며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 나올 것만 같은데, 그 어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반소가 현의 침소로 향했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불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쾅!

문을 젖히며 걸어 들어가 방안을 휘둘러봤다.

“가…!”

반소의 눈이 바닥에 누워있는 가비에게 고정됐다.

“가비…….”

달려가서 미끄러지듯 그 앞에 주저앉아 가비를 안아 올렸다.

“가비야, 가비…….”

얼굴을 두드리고 어깨를 쓸어올리며 비볐다. 손을 끌어올려 제 뺨에 문질렀지만 가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숨이 막혔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또…….

“아니야…. 아니야!”

이건 사실이 아니었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그 긴 시간을 어렵게 돌아왔는데.

살을 에는 것만 같은 그리움을 참고 또 참으며 인내했는데.

봉인된 기억을 찾은 순간, 분명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모든 일이 그때와 다르게 흘러갔고, 그래서 다 괜찮을 거라고.

그런데…….

나는 또 너를, 지키지 못한 건가?

“……으.”

반소가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숨을 헐떡였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이 악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안 돼애애!”

절망에 찬 절규가 반소를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