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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90화 (90/95)

[90화]

오늘 밤. 사람들이 무릉도원이라 말하던 태황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높은 궁 벽 때문에 그 소란은 민가에까지 쉬이 닿지 않았다.

자정을 넘긴 시각.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는 동안, 태황궁의 내부는 갈아엎어지는 중이었다.

가비가 말한 대로 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태황궁에 당도했다. 민가에 해를 끼칠 것을 염려해 태황국을 둘러싸고 있는 산길로 이동했다.

미리 선별한 귀물 중 뿔이 딸린 존재들이 궁 문을 부수었다. 딱딱한 등껍질을 가진 존재들은 귀물경비대의 든든한 방패가 돼주었다.

“누구도 궁 밖으로 나가게 해선 안 된다!”

모든 게 이 안에서 해결되어야 했다. 누구도 죽는 이가 없이, 다치는 이가 없게, 서로 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궁을 정복하는 게 이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꺄아아악!”

방을 뛰쳐나온 시종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태황궁의 모든 숙소의 문 앞은 귀물들이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여 보호하려는 방편이었다.

덕분에 궁 안은 귀물경비대와 태황궁의 경비대만이 어지럽게 엉켜있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소식을 전해 들은 천태비가 이를 부득 갈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 죽이거라! 당장 쓸어버리라고 해!”

“하, 하오나…,”

시종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귀물들이…, 귀물들이 한 패입니다!”

“뭐야?”

천태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겨, 경비대도 혼비백산 하여….”

“귀물이라니?”

천태비가 제 귀를 의심했다.

북쪽에 있어야 할 것들이 왜 여기 있단 말이야.

그곳은 죽음의 땅.

사람이 아니라 귀물들이 태어나고 사는 귀물의 땅이었다. 척박하고 황폐한 그곳은 먹을 것이 없었다. 다양한 것들이 함께 살지만, 결국 귀물이라는 하나의 동족으로 묶인 생명체들.

천태비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중에서 자그맣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매일이 지옥 같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허나 귀물들은 식량이 부족해도 끊임없이 새끼를 낳았다. 그 새끼들이 자라서 또 다른 새끼들을 낳고….

결국 아사(餓死)의 굴레 속에서 귀물들은 땅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족 간은 잡아먹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경계와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 사람들을 공격하고 가축들을 잡아먹었다.

그마저도 천태비는 불가했다. 그런 기회조차 자신보다 힘이 세고 강한 귀물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혹한이 불던 어느 날. 어미가 죽었다. 바싹 마른 나무뿌리도 겨우 구해서 제게 주고, 어미 자신은 굶은 지 보름이 넘어갈 무렵이었다.

죽어가는 어미가 말했다.

‘아가…. 날 먹어.’

동족을 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날 때부터 새겨진 본능이었다. 허나 그 본능을 꺾고 죽은 어미를 먹었다. 검은 눈물을 흘리며 한 톨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충만한 배부름이 기이한 욕구로 비틀렸다. 어미를 먹은 후 몸집도 힘도 전보다 커지고 강해졌다. 그때부터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세월을 백 년쯤 넘기자, 느리지만 조금씩 몸 안으로 무언가가 쌓이는 게 느껴졌다. 마력이었다. 더는 귀물의 땅에서 자신을 우습게 볼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제일 높은 서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건 당연했다.

그때부터 다른 것을 욕망했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런 추잡하고 더러운 귀물이 아니라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불가능은 없었다.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동족인 제 어미를 먹은 것이 그 시작이었듯이.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어떻게 귀물들이….”

천태비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무지한 것들을 어떻게 꾀어냈는지 몰라도, 아직까지 그들의 우두머리는 자신이었다. 그들에게 자신보다 강한 존재는 없었으니까.

“안됩니다, 천태비님! 당장 피하셔야…,”

“비켜라!”

천태비가 자신을 가로막는 시종관을 뿌리쳤다.

“천태비님!”

천태비가 위풍당당하게 천태비궁을 나섰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에 혀를 내찼다.

“이게 대체……!”

자신을 엄호하고 천태비궁을 지켜야 할 경비대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귀물들의 등장에 도망가고, 어떤 무리는 자빠져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귀물들을 부리는 건 다름 아닌 귀물경비대였다.

말도 안 돼…!

천태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대로 가면 끝이었다. 수를 써야 했다. 귀물들에게 제가 아직도 서열의 우두머리라는 걸 보여줘야만 했다. 허나 그러려면……,

이 껍데기를 버려야만 한다.

그동안 공들여 가꾼 인간의 외양을.

그것도 태황국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천태비의 모습을.

깨끗이 찢어발기고 제 본모습을 보여야 했다.

…이런 빌어먹을!

허나 그것 외에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그 한계가 분명했다.

“……으으으으!”

천태비가 온몸에 터질 듯이 힘을 주었다. 목줄기와 이마 위로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끄아아악!”

뿌직-

옷이 터지며 기괴한 모양의 척추가 튀어나왔다.

“아, 아아악!”

뒤를 따라 나온 시종관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귀물의 모습을 한 천태비는 처음이었다. 서문과 장곡 그리고 자신과 일을 작당할 때도 정상적인 사람,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시종관이 뒤로 엉금엉금 물러나 도망가려 할 때였다.

갈기갈기 찢긴 옷자락 사이로 구척의 장신이 된 천태비가 시종관의 앞에 섰다. 도무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골격에 황록색의 흉측한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악!”

천태비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팔을 뻗어 시종관의 목을 잡았다.

“크헉!”

그대로 아귀처럼 입을 벌려 머리를 삼켰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영양분이 필요했다.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아아!”

목격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며 줄행랑을 쳤다. 시종관의 몸뚱이를 바닥으로 내팽개친 천태비가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태비궁의 입구를 막고 있는 귀물들을 공격했다.

켁! 끄엑!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며 무자비하게 밟아버렸다.

“이, 이런 염병할…!”

말에 올라 광경을 지켜보던 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버렸다. 귀물경비대의 좌대장으로서 지금까지 이런 흉악한 귀물은 본 적이 없었다.

저것이 천태비의 실체라니…!

그때, 가까운 지방 도시의 원들과 함께 풍이 나타났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을 보고 모두 하얗게 질려버렸다. 주경대와 야경대의 경비대장들은 이미 항복한 상태였다.

천태비가 뚜두둑, 괴이한 모양새로 목을 꺾으며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귀물경비대와 귀물들을 바라봤다. 희한하게도 귀물들이 제게 굴복하지 않았다. 되레 얻어맞고 밟히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가로막았다.

설마…….

서열에 변화가 생긴 건가? 의심할 때,

후우웅-

밤하늘을 가르며 섬광이 날아들었다. 천태비가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했다.

턱-

눈앞으로 누군가 내려앉았다.

“반소님!”

곤이 놀라 소리쳤다. 곤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있는 모두가 놀란 얼굴로 반소를 바라봤다.

금백색의 머리칼과 번득이는 금안.

반월도의 칼날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을 한 반소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천자의 모습으로.

“…끄으으으.”

천태비가 분노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소가 천자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건, 제 아들이 망가졌다는 뜻이었다.

“끼아아아악!”

천태비가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반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소가 날아드는 손톱을 피하며 공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시간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악하고 추잡한 존재에게.

후아앙-!

허공에 뜬 반소를 따라 반월도가 높게 치솟았다. 자신을 찢어발기려는 천태비의 손아귀를 피해 몸을 틀며, 아래에서 위로 반월도를 휘갈겼다.

쩌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천태비의 몸통에 반월도가 찍혔다. 그대로 힘 있게 위로 끌어올렸다.

쩌어어억-

푸학!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처덕, 처덕-

끈끈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몸이 반으로 갈린 천태비가 그 위로 쓰러졌다. 그곳으로 귀물들이 모여들었다. 아직 채 감각을 잃지 않은 천태비의 동공이 제게 다가오는 귀물들을 바라봤다.

…너희들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누구냐.

서열의 제일 꼭대기를 차지한 자.

귀물들이 답을 전했다. 답을 들은 천태비가 눈 하나를 부릅떴다.

놀란 것도 잠시.

귀물들이 아그작아그작 천태비를 씹어 삼켰다. 귀물들에게 천태비는 더이상 동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우두머리인 가비를 노리는 ‘적’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해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두 번 다시 재생조차 될 수 없도록.

“우욱, 우웩!”

그 모습을 본 곤이 헛구역질을 했다. 풍을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천태비의 참혹한 최후를 지켜보던 반소가, 덤덤한 얼굴로 뺨에 튄 핏방울을 훔쳤다. 그리고 귀물경비대를 향해 말했다.

“귀물경비대는 현과 서문을 찾고, 원들은 이곳을 정리하라.”

“예!”

명령을 받은 귀물경비대가 서둘러 천태비궁을 벗어나 궁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원들도 급히 반소의 명을 받들었다.

…가비야!

반소가 즉각 양궁으로 향했다.

아비규환이 된 곳에서 제발 무사하기를.

그렇게 바라며 가비를 찾아서 바람처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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