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83화 (83/95)

[83화]

“엉망이 되었네요.”

천태비가 걸음을 떼며 현에게 다가갔다.

현이 휙, 고개를 돌리며 의자에 앉았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홀대였다. 허나 극도로 날카로워진 아들의 심기를 천태비는 백분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병증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는 곧 변태(變態)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말하는 것이었다.

불로초와 결합하지 않으면 인간의 겉가죽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해서 진실을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몰랐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계획한 일은 차질이 생기고 어긋나길 반복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사실을 밝히고 함께 힘을 보태는 것이 좋을 거란 판단이 섰다.

천태비가 현을 어르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자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때일수록 경거망동은 삼가야 합니다.”

“제 꼴을 보십시오. 썩은 내가 나는 듯합니다. 이건…, 제가 아니에요.”

현이 부들거리며 제 손을 바라봤다. 손등도 갈변한 듯 얼룩져 있었다. 그런 현의 손을 천태비의 손이 덮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천자. 모든 게 잘 될 테니. 본래의 모습도 이제 곧 찾을 수 있어요.”

“대체 언제요.”

“그 아이, 불로초를 찾으면요.”

“은갑이 그 아이가 제 병증을 낫게 하긴 하는 겁니까?”

이쯤 되니 원초적인 의문이 들었다.

대관절 불로초가 뭐길래.

이렇게 지독한 병증을 어떻게 낫게 한다는 건지.

“불로초는 말 그대로 만병통치, 영약이랍니다. 태황국의 초대 태어의 은수만이 발견하고 기록을 남긴, 실존하는 영약이에요.”

그 피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장기는 죽어가는 장기와 대체가 가능했다.

눈이 좋지 않으면 눈을 뽑아 넣고, 심장이 좋지 않으면 심장을 뽑아 심고.

장곡처럼 팔다리가 없는 이에겐 그것을 잘라 붙이면, 제 몸처럼 이식이 되는 기능을 지녔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귀하고 귀한 약.

“결합이란 건 한 몸이 된다는 뜻이에요.”

암수가 만나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는 건 자연의 이치였다.

“그렇게 불로초와 한 몸이 되어 병도 낫고, 새끼도 많이 낳으세요. 어미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랍니다.”

…새끼?

현의 귀에 유독 그 말만이 꽂혔다.

“지금 새끼를 낳으라고…, 하셨습니까?”

천태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천자. 그대가 앉은 그 자리를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현이 주입된 답을 뱉었다.

“그야 당연히 하늘이 내린…,”

“아니. 아니에요. 그 자린 내가 만들었답니다. 이 어미가 만든 자리예요.”

하늘의 혈통이라는 천족. 태황국에서 떠받드는 그 존엄한 자리를 천태비는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다. 수많은 사람의 뼈와 살을 먹고, 해서 괴이하긴 하나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을 때. 그때부터 그런 욕망을 싹틔웠다.

“그래요, 이 어미는. 그저 인간의 살가죽을 먹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외양을 유지할 수 있어요.”

어느 날 수십 년간 지켜온 껍데기가, 세월을 따라 퇴색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인간의 살가죽을 먹는 것만으로도 지탱이 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천자는 아니랍니다. 천자는 어미처럼 수백 년에 걸쳐 사람을 먹어온 게 아니니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현의 동공이 극심하게 떨렸다. 반대로 진실을 토하는 천태비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어미는 다른 귀물들과 격이 달라요.”

서열로 치면 제일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그동안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의 형상이 된 귀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백 년 동안 꾸준히 사람을 먹고, 그와 같은 욕망을 품으며,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경우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인간과 교미해서 천자를 낳았지만, 천자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어요.”

그건 사람의 형태로 태어나는 일반적인 반인반귀와는 달랐다. 천태비가 가진 기운이 너무도 강력한 탓이었다.

“천자의 그 아름다운 껍데기는 기간이 정해져 있답니다.”

천태비처럼 사람의 살가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해서 덮어씌운 껍데기가 녹아내리기 전에 불로초를 찾아내어 결합시켜야 했다. 주기적으로 결합해야만 병증이라고 말해왔던 변태(變態) 현상이, 탈피(脫皮) 직전의 상태로 머물 수 있었다.

덤덤하게 이어지는 그 모든 말을, 현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현이 어지러운 눈빛으로 뒤에 서 있는 장곡을 돌아봤다.

장곡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현의 눈을 피했다. 장곡은 현을 위해 존재했지만, 천태비의 시작과 끝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람을 낚아 살가죽을 벗겨서 혈담초와 진득하게 끓여 먹으면, 잔병치레 없이 보통 사람들보다 긴 수명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해서 조금씩 얻어 마셔왔다.

또 불로초를 찾으면 그 피를 제공 받아 함께 영생할 것을 천태비에게 약속받았다.

이는 장곡뿐만이 아니라 천태비의 시종관과 서문까지. 천태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모든 자가 연관된 일이었다. 지금껏 그 사실을 현 혼자만 몰랐다.

“천자.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요.”

천태비가 굳어버린 현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천자는 천자로서 살고, 이 어미는 천태비로서 살면 돼요. 지금처럼.”

그렇게 바라던 불로불사, 불로장생의 꿈이 코앞이었다.

귀물로 태어났지만 사람으로. 그것도 천족으로 군림하며 이 태황국을 완벽하게 지배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것도 영원히.

“어쩌면 운명인 거죠.”

천태비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현이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달래기 위해 천태비는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들어봐요, 천자. 그 은갑이라는 아이가 불로초였다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인연이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우연? 인연? 운명…?

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천태비가 부드러운 손길로 구겨진 얼굴을 다독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결국 천자가 연모하는 그 아이가 천자의 반려였으니. 평생 그 아이 하나만 사랑하고 아껴주면 되잖아요.”

“피를 뽑아 먹으면서요?”

현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천태비를 바라봤다.

“우리가 그 아이의 피를 마시면서 영생을 누리면. 그럼 그 아이는요? 그 아이는 어찌 삽니까.”

“그래서 새끼를…, 아니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거예요. 그 아이들 역시 불로초의 피를 받아 둘도 없는 영약일 테니. 그럼 천자가 연모하는 그 아이에겐 더이상 손댈 필요가 없답니다. 아이들을 쓰면 되니까요.”

“…하.”

“은갑이 그 아이도 제가 낳은 아이들의 피를 먹으면 영생할 수 있을 테고요.”

아쉽게도 불로불사의 영약인 불로초의 수명은, 보통 인간과 같았다. 허나 그 불로초 역시 같은 불로초의 피를 먹으면 수명을 원하는 만큼 연장할 수 있을 터였다.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천자. 생각해봐요. 천자는 연모하는 그 아이와 함께 영원히- 이 태황국을 다스리는 거예요.”

인간과 귀물들을 통틀어 먹이사슬의 가장 위. 그 꼭대기에서.

“…하. 하하.”

현이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현듯 머릿속으로 가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고 있는 거야? 네 어머니 천태비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그래, 은갑아.

네 짐작이 맞았다.

‘네 어머니가 사람을 잡아 가뒀어. 귀물 사건도 네 어머니랑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태황국의 천녀라고 믿었던 내 어머니가…, 사람을 잡았다.

사람을 잡아 살가죽을 벗겨 먹는 귀물이었어.

“…하하하하!”

현이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크크크큭.”

기괴한 웃음소리가 목구멍을 긁고 흘러나왔다.

“아니, 그럼-”

현이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단 채 천태비를 돌아봤다.

“그럼 내 아비는 누굽니까?”

현이 뒤를 휙 돌아보며 장곡을 가리켰다.

“설마 저 외팔이 놈이 씨를 준겁니까? 그도 아니면…,”

“…….”

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서문.

서문이 생각났다. 늘 저와 제 어미에게 살갑고 따뜻하게 대하던. 정성으로 약을 달여 보필해 오던 그 얼굴이.

그러한 생각에 쐐기를 박듯, 천태비가 느린 어조로 말했다.

“서문은, 귀물인 나에게 거부감이 없었어요.”

서문을 만날 때쯤엔 이미 정상적인 여인의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욕망과 욕정을 나누기에 아주 적합한 인간이었죠.”

물론 중간에 과욕을 부린 건 사실이었다. 가비가 여인인 걸 숨겨주었지만 그쯤이야. 어쨌든 그도 자신의 씨를 받고 태어난 현이 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현을 위해서라도 천태비와 뜻을 함께할 인간이었다.

“말이…, 됩니까?”

현이 비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제가, 귀물의 자식이라는 게?”

천태비가 입을 다물고 현을 빤히 바라봤다.

현이 다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크크큭-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은, 지금 제가 반인반귀라는 건데…,”

인간 중 간혹 귀물과 정을 통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반인반귀로 불렸다. 그런데 그게 자신이라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 헛웃음만 터져 나왔다.

어떻게 내가. 하늘의 후손인 내가.

천족의 혈통인 내가…!

그런 괴물이라는 건지-

순간 웃음을 뚝 그친 현이 무서운 눈으로 천태비를 노려봤다.

“…허면, 그놈은요.”

현의 뇌리로 반소의 얼굴이 스쳤다.

“그놈은 뭡니까.”

제 어미가 귀물에게 겁탈을 당해 생겼다던 그놈은.

해서 어미의 뱃속에 잉태되어 쌍둥이의 운명처럼 한날한시에 태어났다던 그놈은.

그놈은 대체…….

“말했잖아요. 천자의 그 자리도 껍데기도 어미가 만든 거라고.”

천태비의 서늘한 눈동자가 현을 직시했다.

운명 같은 건 없었다. 하늘의 후손이나 혈통 같은 것도.

욕망과 그걸 이룰 의지만 있다면, 그딴 건 얼마든지 재정립되고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반인반귀가 천자가 되고, 천자가 반인반귀가 된 것처럼.

실로 모두가 그리 믿고, 그리 대하며, 그리 살아왔다.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인 채.

“아니…. 아니야.”

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아!”

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이 터지게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반인반귀라니!

내가 괴물이라니!

……놈이, 놈이 천자라니!

“아니야아아아!”

악다구니를 내지르던 현이 휘청거리더니 이내 픽 쓰러져버렸다.

“천자님! 천자님…!”

장곡이 급히 다가와 쓰러진 현 앞으로 주저앉았다. 늙은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외팔로는 현을 제대로 추스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천태비가 혀를 끌 찼다. 아무튼 인간이란 정에 약한 종족이었다. 어릴 때부터 품에 끼고 돌더니 꼭 제 자식처럼 구는 꼴이란.

그러니 저리 심약하게 자랐지.

장곡을 향해 조소를 날리던 천태비가 매몰차게 방을 나갔다.

불로초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서문을 만나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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