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반소님.”
서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반소를 불렀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그가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챙겨온 고약을 꺼내어 반소의 상처 난 몸에 발라주었다.
“어쩌자고 그러셨습니까. 대체 어쩌자고…….”
반소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서문을 바라봤다. 서문의 얼굴엔 걱정과 근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서문이 탄식과 함께 말을 뱉었다.
“천태비님께 간신히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서문을 향한 천태비의 각별한 총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천자 또한 그렇다는 것을.
그건 반소도 마찬가지였다. 태황궁에서 귀물경비대를 제외하고 사람으로서 상대했던 건 서문이 유일했다. 그는 적어도 태어의라는 직분으로 자신과 현을 차별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태황궁은 쑥대밭입니다.”
“그렇겠지.”
“반소님께서는 반역을 저지른 역적이 되었고요.”
“상관없다.”
“반소님-”
“그럼 지방 도시에 있는 원들에게도 소식이 전해졌겠군.”
반소가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다들 혈안이 돼서 찾고 있을 테고.”
어쩌면 이미 북쪽 땅까지 경비대들이 당도했을지도 몰랐다.
경계는 잘 넘었을지.
넘어서도 과연 괜찮을지.
귀물경비대를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반소를, 서문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원들이 파견한 경비대까지 태황국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습니다. 잡히는 건 시간 문젭니다. 아니, 잡히기 전에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반소가 고개를 들었다. 서문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은갑이 그 아이….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는 제가 아끼던 어의였습니다. 제 의술을 물려주고자 결심할 만큼. 허나 지금 그 아이가 곤경에 빠졌습니다.”
“곤경이라니?”
“활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독이 묻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해독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독입니다.”
반소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문이 심각한 얼굴로 남은 말을 쏟아냈다.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몰래 찾아가 해독제만 전해주고 올 테니.”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린 듯 보이던 반소의 눈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서문을 직시했다.
“이봐, 서문.”
“…예. 반소님.”
“날 살려두는 이유가 뭔가.”
“…예?”
“천태비가 날 살려두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냐. 넌 그걸 알고 있을 테고.”
“그게 무슨……,”
당황한 서문을 보고 반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그 어설픈 거짓말로 날 떠보라던가?”
“반소님!”
“생포하라는 자에게 독화살을 날리다니. 앞뒤가 맞지 않아.”
모순이 뚫리자, 서문의 표정이 굳었다. 이내 서늘해진 얼굴로 반소를 바라봤다.
“와중에도 정신이 온전하십니다.”
사람이란 무릇 궁지에 몰리면 넋을 잃고 혼이 빠지는 법이었다. 허나 반소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침착했다. 차라리 천자 현이 이런 성정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허나 말씀 해주지 않으셔도 짐작은 가능합니다.”
천태비의 닦달에 이미 태황국 전체를 쑤석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잡히지 않았다. 그럼 답은 하나였다. 아직 가지 않은 땅.
“혹 귀물의 땅으로 보내셨습니까?”
반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정조차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정말, 그곳으로 보내셨다고요?”
서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반소가 나직하게 뇌까렸다.
“왜. 가볼 텐가?”
“…하.”
서문이 경애 어린 눈으로 반소를 바라봤다.
“현명하십니다. 그곳이 최선이겠죠. 불로초님을 숨기기엔.”
그건 귀물경비대니까. 귀물경비대의 수장이니까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태황궁의 경비대는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기는 하나, 용기가 가상한 자들은 아니었다. 천태비가 뽑아 놓은 인재들이 충신보다 간신에 가깝다는 건, 이미 암암리에 퍼진 사실이었다.
허니 그런 자들이 명령을 받아 그 땅에 들어간다고 한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었다. 공포심으로 좀먹은 정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테니.
“허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대로 된 물도, 식량도 없는 곳이었다.
그나마 더운 계절은 낫지만, 혹한은 견딜 수 없는 곳이었다. 해서 귀물들이 경계를 넘는 것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말해봐라. 서문.”
어둡게 침잠된 반소의 눈이 서문을 응시했다.
“적어도 네 놈은 중도를 지킬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변한 것이냐.”
“변한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한결같았으니.”
그 말은 단 한 번도 천태비의 사람이 아닌 적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그래. 그랬군.”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씁쓸했다.
그걸 느꼈는지, 서문이 어두운 낯빛으로 반소에게 다가섰다. 지척에서 마주친 서문의 눈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폐부 깊숙이에 숨겨둔 진실을 토로하듯, 반소의 귓가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동안 반소님을 뵈며 부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
“내 아이가 갖지 못한 성정을 타고 나셨으니까요.”
“……!”
반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서문이 한발 물러났다. 다시 반소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주술력은 쉽게 회복되지 못할 겁니다. 몸에 스며든 고약이 정화되지 않는 이상.”
“…무슨!”
“그리고 귀물의 땅을 선택하신 건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현명한 처사였으나,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반소의 눈썹이 꿈틀댔다.
서문이 천천히 눈을 치뜨며 반소를 바라봤다.
“귀물은 동족을 먹지 않는다. 또…, 서열에 따라 움직인다.”
서문이 뱉은 느릿한 말에, 반소의 눈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 말은 곧, 이 태황궁에 그런 자가 있다는 소리였다. 귀물에게 먹히지 않을, 귀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그건 아마도…….
“…서문!”
철컹-!
반소를 포박한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허나 반소의 몸부림은 부질없었다. 이내 사지를 마비시키는 고약이 스며들어 반소의 정신을 흐리게 했다.
안 돼…, 안…….
가물거리는 시야 끝으로 서문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가시는 길은 이곳에서, 편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베푸는 마지막 온정입니다.”
이내 뚝, 의식이 끊겼다.
* * *
가까스로 정리된 양궁은 또다시 엉망진창이었다. 현이 광분한 얼굴로 침소의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수었다. 석반을 가지고 들어갔던 시종이 현의 얼굴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꺄아악!”
그대로 명경을 깨어 시종의 목을 그었다. 왈칵, 솟는 피를 보며 흉이 진 제 손바닥을 바라봤다. 참지 못하고 그곳을 그어봤다.
거무죽죽한 피가 떨어졌다. 마치 검은 엿가락을 녹이기라도 한 듯, 바닥에 고인 피는 불쾌할 만큼 걸쭉했다.
“천자님!”
안으로 들어온 장곡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종의 시체를 보고 눈짓했다. 이윽고 다른 시종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시체를 치웠다.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모두 죽은 목숨이리라.
무언으로 전한 협박에 시종들이 부리나케 모습을 감추었다.
“여봐라, 장곡.”
현이 서슬 퍼런 눈으로 장곡을 돌아봤다. 외팔이가 된 장곡의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열이 끓는 와중에도 저를 챙기겠다고 문밖에 서 있다니. 참으로 눈물겨운 충성심이었다.
“내 피가 왜 이 모양이냐?”
“천……,”
“더럽고 추하지 않느냐.”
현이 손을 높이 들어,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네 몸에서 흐른 피도 새빨갛고, 저 시종의 피도 새빨간데, 어째서 내 피만 이런 것이야.”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자 산산이 부서진 명경 속으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내 얼굴도.”
아름답던 금백색의 머리칼이 푸석하게 변모하고 있었다. 마치 제 어미 천태비의 것처럼. 끄트머리부터 밝은 잿빛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뿐인가. 눈부시던 금안도, 그 빛을 잃고 탁해졌다.
하얗고 고귀하던 피부는 하루 새에 병증이 돋아 얼룩덜룩, 아니 그보다 심하게 울룩불룩하였다.
“너도 눈이 있으면 보거라.”
이게 사람의 몰골인지.
“대답을 해보란 말이다!”
현이 장곡의 멱살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장곡이 말을 잃은 채 공포에 질린 눈으로 현을 바라봤다.
“…하하.”
자신을 어릴 때부터 보필해 오던 장곡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래. 끔찍하겠지. 나도 이리 소름이 끼치는데.”
현이 탁자 위에 놓인 혈담초를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몇 번을 그릇째 들이부어도 나아질 기미는커녕, 더 흉측해질 뿐이었다.
쨍그랑-!
그릇을 집어 던진 현이 입가로 흐른 검붉은 혈담초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것이 뺨으로 번져 더욱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시도 했으나 주술력은 올라오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허나 그건 차치하더라도, 제 모습이 이렇게 망가졌다는 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서문을 불러오라.”
“태, 태어의는 지금 밀궁에…,”
“불러오란 말이다!”
사나운 일갈에 장곡이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천태비가 들어왔다. 난장이 된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