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59화 (59/95)

[59화]

가비가 하던 것을 멈추고 현을 바라봤다.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저는…….”

“알다시피 내 주치의가 태어의 서문이다. 양궁에서 일하면 서문의 곁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이야.”

생각지도 못한 현의 제안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고민이 되진 않았다. 가비는 양궁이 아닌 음궁에 있고 싶었다. 단순히 반인반귀인 반소가 안쓰럽다거나, 병증이 있는 현이 안타까운 마음과는 상관없었다.

그냥 반소 옆에 있어 주고 싶어.

그 마음엔 동정이나 연민 따윈 없었다. 그저 곁에 있어 주고픈 마음. 그게 다였다.

“말단 어의인 제가 양궁에서 일하다니요. 그런 전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전례가 없다면 이제라도 만들면 될 일.”

현은 진정 그렇게 생각했다. 서문이 원리원칙을 들이밀며 반대한다 해도, 장곡이 그런 일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간언한다 해도. 이번만큼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작정이었다.

“시험도 재수 좋게 붙은 것뿐입니다.”

“아니. 네가 총명하고 배움이 남보다 빠르다는 건 서문을 통해 이미 들었다.”

“태어의에게 배움을 얻고 싶어 하는 선학들이 줄을 섰는데 제가 새치기를 할 순 없어요.”

“새치기가 아니라 내가 주는 기회다. 영특한 어의에게 천자가 주는 특별한 기회.”

어떻게 말을 해도 현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가비는 둘러댄 모든 말을 포기하고 솔직한 마음을 토로했다.

“전 음궁이 편합니다.”

“음궁이…, 편해?”

“예.”

가비가 가감 없이 말했다.

“말 그대로 운이 좋아 태어의 눈에 띄고 궁에 들어와 시험까지 붙었지만, 아직은 태황국에서 나는 약초 이름을 절반쯤 외운 것이 고작입니다. 실제로 병자를 돌볼 군번도 아니고요.”

그건 의궁에서 수년간 일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음궁 약방에서 일하는 게 좋습니다. 제 실력으로는 그게 딱 맞고요.”

“허나 음궁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음궁이야.”

현의 미소에 균열이 생겼다.

“다른 이들은 두려워하는 곳이다. 발을 들이기도 꺼리는데 넌 어째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불운이나 액운 같은 거요.”

현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믿지 않으니 두렵지도 않습니다. 귀물경비대도 반소님도.”

“…하.”

현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안 좋은 일을 겪지 않았느냐.”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귀물이 사람의 살가죽을 벗겨간 걸 봤다면서. 하물며 네 가까운 사람이 당했다.”

가비가 움찔했다. 현이 멈추지 않고 내쐈다.

“그 끔찍하고 흉측한 현장을 보고도. 그러고도 형님 곁에, 음궁에 있고 싶은 것이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현의 표정에, 가비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현이 태황국의 천자인 걸 알지만, 해서 그런 신념과 관념을 가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금 그의 언사는 반소를 향한 적개심에 가까웠다.

그가 뿜어내는 기운과 말투가 그랬다.

“그게 반소님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액운을 몰고 다니는 형님이다.”

“그건 그냥 사건일 뿐입니다.”

“형님이 그 근방에 없었다면 피해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을 테고,”

“말도 안 돼요.”

“그럼 네가 아우처럼 생각했다던 그 아이도 죽지 않았겠지.”

“아닙니다.”

가비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윤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랬다.

“이미 수도는 그 일로 떠들썩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걸 반소님 탓으로 돌립니까?”

“형님은 반인반귀야.”

“반인반귀여도 태황국을 위해 일 년의 절반을 경계에 나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요. 그렇게 경계를 지키는 거로도 모자라 천자님의 부름에 바로 달려온 분이세요. 반인반귀라는 이유로 귀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허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비가 반소의 입장을 헤아려주면 줄수록 더욱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아집이 곤두섰다.

“귀물과 정을 통하는 인간이 있다더니 네가 그 짝이냐?”

“예에?”

“아니면 모두가 기피 하는 형님을 어찌 그리 편드는 것이야.”

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설마…, 형님을 좋아하느냐?”

현은 서고에서 봤던 반소와 가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혹 그건 거부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였을까? 수줍었기 때문에?

순간 명치에서 뜨거운 불길이 올라왔다.

“반인반귀를 마음에 품는 건 미친 짓이다. 알고 있겠지?”

“그게 무슨…,”

“하물며 비역질이라니. 구역질이 올라올 일이야.”

“천자님!”

참지 못한 가비가 소리 질렀다.

“왜 그렇게 비약하십니까? 비역질이라니요!”

가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현의 행태에 대해.

방금까지 온화한 얼굴로 미소짓던 그가 심사가 뒤틀린 사람처럼 입술 끝에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마치 두 얼굴의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형님이시잖아요.”

가비가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둘도 없는 형제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세요.”

하해와 같다던 천태비, 그리고 천자마저 반소를 경시하고 하대한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감정이 솟구쳤다. 현을 향한 실망감과 분노 그리고 반소를 향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형제라….”

가비의 말을 곱씹던 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날한시에 태어났다고, 그자와 내가 같은 사람이더냐?”

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차갑게 변한 금안이 가비를 응시했다.

“나는 하늘이 내린 고귀한 혈통이고, 그자는 귀물의 씨로 생겨난 괴물일 뿐이다.”

“어떻게 그런……,”

충격을 받은 가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

그런 가비를 향해 현이 오만한 말투로 명령했다.

“허니 너 역시 처신을 잘해야 할 것이야.”

그가 바라는 답은 하나였다.

“지금이라도 내가 하란 대로 해라. 업무지를 양궁으로 바꾸고 서문 곁에서 내 시중을……,”

“싫습니다.”

가비가 말을 끊었다. 더는 참아줄 수도, 들어줄 수도 없었다. 현의 본심이 이렇게까지 바닥인 줄은 몰랐다. 모두가 칭송하는 모습과 판이해 더욱더 깊은 배신감이 들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천자님이 아니셨습니까? 그 누구보다 높지만 그 누구보다 낮은 곳을 살핀다는 분이 아니셨습니까? 가지고 계신 권력을 칼처럼 휘두르는 게 아니라, 그저 태황국을 위해 쥐고 계실 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어왔던 현의 모습은 이토록 빈틈없이 완벽한 군주의 상이었다. 그런데…….

“형제를 괴물로 여기시다니요. 궁 안의 원칙과 형평성을 마음대로 깨시겠다니요. 이건 제가 아는 천자님이 아닙니다.”

낮게 일갈한 가비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손을 현이 거칠게 잡아당겼다. 단번에 가비를 쓰러트린 후 그 위를 덮쳤다.

“……!”

가비가 놀란 숨을 삼켰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현의 눈이 섬뜩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형형한 기운이 감돌았다.

“놔주십시오!”

벗어나려 했지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다리를 옥죄는 허벅지와 손목을 찍어누른 손아귀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천자님…!”

현의 서늘한 눈동자가 가비의 얼굴과 목줄기를 느리게 훑었다.

“그러니까 형님이…, 널 마음에 두고 있다 이거지.”

순간 천태비의 손이 닿았을 때처럼, 가비의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을 메웠다. 애써 숨을 고르며 현의 눈을 마주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말하는 입술 위로 현의 입술이 떨어졌다.

“…읍!”

피하려는 가비의 입술을, 현의 입술이 집요하게 쫓아가 삼켜 물었다.

“……흡!”

현이 신음하며 입술을 뗐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옅은 피 맛이 났다. 가비가 제 입술 안쪽을 깨문 것이었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현이 입가를 훔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가비가 재빨리 현에게서 도망쳤다. 그와 떨어진 곳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파들거렸다.

무슨 짓을 당한 건지 깨달은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미친 건 제가 아니라 천자님입니다.”

험한 말이 튀어 나갔다. 가비가 이를 악물며 입술을 문질렀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닦고 또 닦았다.

그 모습을 현이 감정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똑같이 입을 맞췄는데…, 그 반응은 사뭇 달랐다.

가비의 눈에 깃든 것은 부끄러움도, 수줍음도 아니었다.

혐오. 공포. 경멸.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현이 차츰 낯빛을 굳혔다.

지금에야 비로소 제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질투.

현은 반소를 질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반소에게 자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이 세상에 그가 가질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그를 사랑해줄 사람도, 인정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헌데 그걸 가비가 깨트렸다. 가비가 그에게 마음을 주고 애정을 주고 있었다. 그를 괴물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서 인정해주고 있었다.

현은 그것이 싫었다.

모두 가졌다는 천자인데.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천자인데.

그럼 가비마저 제 사람이어야 하는데.

현은 그렇지 못한 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현이 무표정한 눈을 들어 고조 없는 목소리를 냈다. 마치 이게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선택권이라는 듯이.

“은갑아. 내가 널 아낀다. 내 사람이 되어 줄 수 없겠느냐.”

“두 번 다시 제게 손대지 마십시오.”

하지만 가비는 그에 대한 대답은커녕 분노를 쏟아냈다.

“불경죄로 잡혀가서 고초를 겪더라도, 천자님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입술을 세차게 문지르며 방을 걸어 나갔다.

그러다 문득 들어온 방안 풍경에, 가비는 어지럼증을 느껴야만 했다.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화려하게 놓인 장식품.

독특한 문양의 벽지와 섬세하게 조각된 천장까지.

가비가 천천히 눈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뒤로 금장을 두른 침상이 보였다.

현을 뺀 방 안의 모든 것이,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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