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은 어의를 데리고 왔습니다.”
장곡이 고개를 조아리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가비가 얼른 장곡이 비켜선 자리로 한 걸음 다가가 예를 갖추었다.
“은갑이라 합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비가 저도 모르게 천태비를 힐끔댔다. 말로만 듣던 천태비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가히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도무지 장성한 아들 둘을 둔 어머니 같지 않았다.
“……!”
눈이 마주친 가비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천태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요, 은 어의. 인사는 그쯤 해도.”
천태비가 고갯짓을 하자 장곡이 방을 나갔다.
“이리 가까이 와보지 않겠어요?”
목소리가 마치 상냥한 소녀의 그것 같았다. 가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천태비와 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보는 현의 얼굴은 역시나, 병증이 돋아 엉망이었다.
이미 한번 봤던 터라 가비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천태비는 그것이 몹시도 흡족한 모양이었다.
“더 가까이.”
천태비가 거리를 좁힐 것을 요구했다.
“더요, 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자 천태비가 화악,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가비가 두 눈을 깜빡였다. 바로 코앞에 천태비의 하얀 얼굴이 있었다.
천태비가 실긋, 입술 끝을 올렸다.
“내가 시력이 좋지 않아요. 이렇게 지척에서만 얼굴이 잘 보인답니다.”
과거에는 금안이었을 천태비의 혼탁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가비가 숨을 멈춘 채 천태비를 빤히 바라봤다.
천태비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어쩜…. 여인만큼이나 고운 피부를 가졌네요. 아기 같아.”
천태비의 손이 부드럽게 가비의 뺨을 쓸어내렸다.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냉기가 가비의 등줄기를 훑었다.
뭐지? 왜…….
뒤로 물러나지 않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었다.
천태비가 고개를 살짝 틀어 가비의 귓가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흐음…. 냄새도 무척이나 좋고요.”
믿을 수 없게도 아주 단내가 났다. 꼭 잘 익은 복숭아처럼.
천태비의 눈이 일말의 의구심을 품은 채 가비를 살폈다.
매끄러운 얼굴선과 도톰한 귓불, 이어지는 목선까지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목구비가 절세미녀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기운이 아주 맑아요. 마음이 평온해져. 그래서 우리 천자가 그대를 좋아하는군요. 충분히 이해가 돼.”
얼굴을 물린 천태비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자, 은 어의와 좋은 시간 보내요. 이 어미는 이만 물러갈 테니.”
예를 갖추는 가비와 현을 뒤로하고, 천태비는 유유히 침소를 빠져나갔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천태비가 대기 중이던 장곡에게 물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겠죠?”
“예. 천태비님. 수도에 있는 마을 절반을 돌았습니다.”
“속도를 더 내봐요. 천자의 병증은 이제 불로초를 찾기 전까진 돌아오기 힘들 거로 보이니. 곧 여름이 오면 갖가지 연회에 행사도 많고, 하늘에 제(祭)도 올려야 하잖아요?”
“예. 보름 내로 남은 마을을 모두 돌고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장곡을 두고 천태비가 걸음을 옮겼다. 기둥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천태비의 시종관이 따랐다. 천태비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시종관이 냉큼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은갑이라는 저 아이 말이야. 한동안 천자의 좋은 장난감이 되어 줄 듯하구나. 눈여겨보거라.”
“예, 천태비님.”
말의 속뜻을 알아챈 시종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천태비가 나간 후 침소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두 손을 모든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가비를 향해 현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보다시피 병증이 다시 돋았구나. 한동안 잠잠하더니….”
잠시 뜸을 들인 가비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제게 던져진 관심이 반가운 듯 현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나마 혈담초를 먹고 통증은 사라진 참이다.”
혈담초. 수업시간에도 배운 적이 있는 귀한 약초였다.
쉽게 구할 수도 없는 희귀한 약초여서 얻는 족족 천태비를 위해 쓰인다고 했다. 요새 운 좋게 혈담초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니. 그래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던 천태비가 저리 활동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혈색 하나 없는 얼굴은, 꼭 아름다운 밀랍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통증이라도 사라졌다니.”
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난 듯 침상 맡의 인형을 가리켰다.
“참, 네가 준 건강인형은 여기 잘 있다. 늘 머리맡에 두고 있었어.”
가비의 눈이 건강인형을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그러네요. 잘 있네요. 근데 녀석이 게으름을 부리나 봐요. 천자님의 우환을 가져가 달라고 부탁했더니….”
“아니. 충분히 가져가 주고 있다. 그나마 몸져눕지 않고 이리 버티고 있는 것도 이 인형 덕분인지도 모르지.”
“그 정도로 안 좋으셨어요?”
가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피부의 병변으로 인한 고통은 짐작했지만, 몸져누울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가비가 뜻밖의 반응을 보이자 현은 대답을 주저했다. 사실 그냥 해본 말일뿐, 병증으로 드러누운 적은 없었다. 헌데 자신을 걱정하는 가비가 보기 좋아 거짓말을 했다.
“한동안 그랬다. 일어나질 못했어.”
가비의 얼굴로 안타까움이 스쳤다. 아픈 걸 아프다 알릴 수 없고 힘든 걸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천자의 직책이 현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반소도, 현도, 나라와 관념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을 본다면야 모든 걸 가질 수 없는 반소보다 모든 걸 가진 현이 조금 더 나아 보일 수 있지만, 어쨌든 제삼자는 모르는 나름의 고충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현의 마음을 가비 역시 다 헤아릴 수는 없었다.
“그럼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요?”
해서 가비는 오늘 밤을 현에게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군것질이나 하면서 수다나 떨까요?”
마음을 살피는 일. 아마도 그건 병증으로 괴로운 현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주라는 뜻일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정도라면 못 해줄 게 없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은갑이 네가 피곤하지 않을까?”
현이 기쁘지만 우려되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친구들하고 밤새 논 적도 있고 공부한 적도 있거든요.”
“그래?”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얼굴로 말했다.
“허면 무얼 할까. 서고에서 보고 싶은 책을 가져와도 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어도 된다. 얘기를 나눠도 좋고.”
“그냥 다 할까요? 시간도 많은데.”
“좋다.”
그 길로 두 사람은 침소를 나가 서고로 향했다.
“우와-”
양궁과 서고를 잇는 비밀 통로를 걸으며 가비가 신기한 듯 눈을 굴렸다. 투명한 원통이 다리 형식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현만 오갈 수 있는 통로였다. 그곳을 가비와 함께 지났다.
서고에서 보고 싶은 책을 고른 두 사람은 다시 침소로 돌아왔다. 바닥에 넓은 사각형의 푹신한 깔개를 깔고 그곳에 앉았다.
“책 볼 땐 입이 심심한데.”
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비가 말한 것을 침소 밖을 지키는 장곡에게 전달했다.
잠시 후. 깔개 위에 커다란 쟁반이 놓였다. 얼음이 동동 띄어진 시원한 차와 온갖 주전부리가 담겨 있었다.
가비가 한과 하나를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아삭아삭 씹어 삼키며 감탄했다.
“음, 맛있다.”
이어 약과도 타래과도 차례대로 맛봤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현을 향해 타래과 하나를 내밀었다. 현이 머뭇거렸다.
“안 좋아하세요?”
“그게 아니라…….”
어릴 때 이후로 단것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단것뿐만이 아니라 맵고 짠 것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을 위해서는 자극적인 맛을 삼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맛을 모르는 게 아니라 찾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버린 행동 양식을 깨려니 망설여졌다. 허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향해 타래과를 내미는 가비를 보자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타래과를 받은 현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달큼한 맛이 혀를 녹이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너무 맛있어서 미간이 좁아졌다.
“하하. 진실의 미간이네요.”
가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도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가비가 다른 것을 권했고, 현은 이제 주저 없이 먹었다. 한 개, 두 개, 끝도 없이 들어갔다. 이 맛있는 걸 잊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그리고 다시 먹어보니 왠지 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장곡이 뭐라 해도, 또 찾아 먹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비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책을 펼치는 가비를 따라 현도 책을 펼쳤다.
적막한 공간으로 드문드문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은 이 침묵이 좋았다.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천자가 아닌 그저 ‘현’으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계속 한 자세로 있는 게 불편했는지 가비가 슬쩍 현을 바라봤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엎드려도…,”
“물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비가 냉큼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보니 가비의 머리카락이 처음 봤을 때보다 제법 길었다. 가느다란 목덜미로 머리카락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파스락 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가늘고 곱다. 분홍빛 손톱도 예쁘고.
오금을 접은 채 발목은 까딱까딱.
고개를 힐끗 기울여 보자, 책을 읽는 가비의 옆얼굴이 보였다. 내리뜬 시선을 따라 긴 속눈썹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었다.
불쑥 턱을 괸 얼굴을 바라보다 눈길이 입술에 머물렀다.
입술은 손톱보다 조금 더 진한 분홍이었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던 반소가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무릎 위의 손을 주먹 쥐었다.
“은갑아.”
“예?”
가비가 현을 돌아봤다. 인자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궁이 아니라 양궁에서 일하는 건 어떠하냐.”
현은 어질고 자애로운 천자의 가면 뒤로 자신을 숨겼다. 그리고 제 뜻대로 가비가 끌려오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