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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48화 (48/95)

[48화]

곤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왜, 자신의 주군이 저 건방진 망아지 녀석을 따라다니고 있는 건지.

아무리 눈치 없고 둔감한 곤이라도 지금의 암행은 쉬이 납득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수도 정찰이라니.

같은 시간 수도를 정찰하고 있을 주경대나 야경대의 경비대원들과 맞닥트리면 난감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 중 곤의 우락부락한 외모를 몰라볼 사람은 없을 테니.

때문에 곤은 따뜻한 봄날 시커먼 흑립으로 얼굴을 최대한 가렸다. 그와 반대로 풍은 머리까지 곱게 틀어 올려 부잣집 도령 같은 꼴로 다녔다.

“지랄하고.”

“나보고 하는 말이야?”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어허, 상스러운 말본새하고는.”

부채를 촥- 펼친 풍이 끌끌끌 혀를 차며 말했다.

“명심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린 지금 암행 중이니.”

“근데 왜 난 네 놈이 신나 보이지?”

“신나니까.”

“이게 신날 일이냐? 귀물경비대가 이런 몰골로 수도를 활보하고 다니는 게?”

“다른 경비대에서도 암행은 종종 있는 일이야. 되레 우리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기피할 일도 없으니 좋잖아. 안 그래?”

풍이 나풀나풀 부채를 흔들며 장터에서 파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불만 있는 얼굴로 그 모습을 노려보는데, 저만치서 여인 두 명이 쭈뼛쭈뼛 곤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

곤이 휙, 여인들을 돌아봤다.

“저분이 네가 모시는 주인이 맞느냐.”

여인들이 풍을 힐끔거리며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허면 어디 사는 누구신지 궁금하다고 말씀 좀 여쭙거라. 혹 시간이 되신다면…,”

“아니거든!”

곤이 흑립을 들어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딜 봐서 내가 저놈 시종처럼 보이냐! 엉!”

“꺅!”

여인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곤에게 쏠렸고, 곤이 씩씩대며 흑립을 푹 눌러썼다. 그 모습을 보던 풍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사이 가비와 함께 있던 반소를 놓쳐버렸다. 곤이 화가 난 짐승처럼 콧김을 뿜었다.

“네 놈 탓이다! 네 놈 때문에 놓쳤잖아!”

“어차피 만나기로 한 주막이 있으니 괜찮아. 그나저나 왜 이렇게 성이 난 게야? 혹 아까 그 여인들이 널 내 시종으로 봐서 그래?”

“아니거든!”

“맞고만 뭘.”

“아니라고!”

“그 목청 좀.”

풍이 면박을 주며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곤이 성질을 사그라뜨렸다.

“네 놈 때문에 장터 구경은 물 건너갔다. 가자.”

더 시선을 끌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풍을 따라 곤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동네는 지극히 소박하고 정겨웠다. 낡은 울타리를 가진 초가집이 대부분이었고, 유달리 잘 사는 집은 없는 듯 보였다. 그래도 사람 간에 정이 있고 웃음이 있는 소탈한 곳이었다.

머리를 쫑긋 묶은 아이들이 지푸라기 몇 줌을 손에 쥐고 꺄르륵 웃으며 가비와 반소를 지나갔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 아낙네들의 수다 소리와 저 멀리 빨래터에서 들리는 맑은 물소리.

수도를 정찰 다녔지만 이렇게 마을, 그것도 동네 깊숙이에 들어와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 났을 때 빼고는.

하물며 사건이 났을 땐 이런 분위기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때문인지. 반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게 보였다. 그렇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조금 어색할 뿐.

마치 가비를 처음 만나 정이라는 것을 알고, 실은 그 정에 굶주린 자신을 발견하고 방황했을 때와 흡사한 감정이었다.

“여기에 네가 아는 사람이 있다고?”

“응. 내가 여기 처음 와서 장터에서 만난 아이야. 윤이라고. 윤이 아니었으면 서문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태황궁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거야. 널 볼일도 없었을 테고.”

마치 그 모든 게 인연처럼 느껴진다는 듯 가비의 갈색 눈은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내 기억이 맞으면 저 집인데….”

가비가 긴가민가 하는데, 울타리 문이 열리더니 윤이 나왔다. 가비를 발견한 윤이 놀란 얼굴로 입을 벌렸다.

“형님-!”

윤이 부리나케 달려와 가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윤아. 잘 지냈어?”

“형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윤이 귀인이라도 만난 얼굴로 가비를 반겼다.

“그때 태어의님과 함께 가신 후로, 전 다신 못 볼 줄 알고….”

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그 반나절의 만남이 어린 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던 모양이었다.

“어머님은? 잘 계셔?”

“네. 요새 고정으로 일자리를 얻으셔서 그곳으로 매일 출타하세요.”

“다행이다.”

“들어오세요, 형님! 들어와서 얘기 나눠요. 예?”

가비의 손을 잡아끌던 윤이 뒤늦게 반소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반소가 팔짱을 낀 채 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한겨울의 서리처럼 싸늘했다.

“여기 이분은….”

“아, 인사해. 내 친우. 절친이야.”

“절친이요…?”

도무지 곱상한 가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흑요석 같은 검은 눈이 차갑고 매서워 보이기도 하고. 윤이 눈치를 살피며 함께 오라는 눈짓을 전했다.

반소가 느리게, 가비와 윤을 따랐다.

울타리 문을 열자 못 보던 평상이 보였다. 윤의 말로는 이웃집 아저씨가 남은 목재가 있어서 만들어주었다고 했다. 가비가 평상에 올라가 앉고, 반소는 그저 엉덩이만 걸쳐 앉았다.

윤이 ‘잠시만요!’하더니 곧 깨끗한 물 두 잔을 들고 나왔다.

“드릴 게 딱히 없어서….”

“물이면 됐지 뭐.”

가비가 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윤이 평상 위로 훌쩍 뛰어올라 무릎을 착 꿇고 앉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간 어찌 지냈는지 물었다.

가비의 이야기를 들은 윤의 눈이 커졌다.

“그럼 형님 어의가 되신 거예요?”

“어.”

“와! 진짜 대단하세요!”

“운이 좋았지. 네 덕분에 태어의님도 만나게 된 거니까.”

“운이 좋았던 건 저죠. 그때 형님이 아니었으면 그 사기꾼한테 돈도 떼이고 어머님도 완쾌되지 못하셨을 거예요.”

윤이 그때 일을 떠올리듯 여전히 고마운 얼굴로 가비를 응시했다.

“형님은 정말…, 제 인생에 둘도 없는 은인이세요.”

“은인은 무슨.”

가비가 생각난 듯 봇짐 속에서 사 온 것들을 꺼냈다.

“이건 어머님 드려. 버선이야.”

“버선이요? 우와,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감사해요, 형님!”

“그리고 이건 너 입 심심할 때 먹을 사탕이랑, 고기 조금. 그리고 생선 몇 마리랑 제철 과일 좀 사 왔어.”

“예에? 이걸 다 저 주신다고요?”

“어. 많이는 못 샀어. 두고 먹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소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돈을 펑펑 써댔는지 고기와 생선, 그리고 과일은 반소의 주머니에서 지출된 것이었다.

‘돈 좀 빌려줘. 다음 월봉 타면 갚을게.’

뻔뻔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던 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이제 어의잖아. 그것도 음궁 약방에서 일하는 어의. 신분 확실하겠다, 빌려준 김에 좀 팍팍.’

그리고는 반소의 안 주머니를 당당히 털어 그 돈으로 윤이라는 녀셕에게 줄 생필품을 저렇게나 많이 샀다.

그게 참 기가 막히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건, 제 손목에 자리한 팔찌 때문이었다.

노점상에서 기웃거리며 신중을 기하던 모습, 눈빛.

이쪽 세계에 와서 모아 둔 돈의 일부를 제게 썼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반소는 충분했다.

윤이라는 녀석보다 더 값지고 좋은 걸 받은 기분이었다. 가비가 채워준 건 손목의 팔찌가 아니라 마음의 충만함이었다.

가비가 기뻐하는 윤을 향해 마지막 선물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건 네 신발.”

“신발이요?”

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비가 종이봉투에 들어있던 남색 신발을 윤에게 전했다.

“그때 보니까 신발이 많이 해졌길래.”

“형님…….”

윤이 앞에 놓인 신발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때 해졌던 신발을 윤은 아직도 기워서 신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머니가 이번 품삯으로 제 신발 한 켤레 사 주신다고 했거든요….”

윤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가비를 바라봤다.

“정말 고맙습니다. 형님.”

그저 감사함과 감동으로 범벅된 순수한 눈동자가 어찌나 착하고 예쁜지.

가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 콧등을 찡긋댔다.

“신어 봐. 치수를 몰라서 맞을지 모르겠어.”

괜스레 눈물이라도 솟을까 봐 가비가 화제를 돌렸다.

윤도 코밑을 훔치며 평상 아래로 발을 내렸다. 땅에 가지런히 놓은 신발 위로 발을 넣었다.

“어쩌지? 좀 크네?”

신발 뒤가 조금 남았다.

“괜찮아요, 형님! 한해 가면 딱 맞을 거예요.”

“그래도……. 아!”

가비가 생각난 듯 바지 주머니에서 잘 접어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장터 신발 가게에서 써준 영수서야. 가져가면 치수 맞는 거로 바꿔준댔어.”

윤이 그것을 고이 받았다. 그러면서도 바꿀 생각이 없는 듯 말했다.

“근데 그냥 신을래요. 형님이 직접 골라서 주신 건 이것뿐이잖아요.”

윤이 방에서 신발을 기우고 남은 천 조각을 들고 오더니 그것을 접고 접어 제 발꿈치 뒤에 댔다.

“봐요. 이렇게 신으면 돼요.”

“불편할 텐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옷이든 뭐든, 조금씩 큰 거 입고 신는 게 좋아요.”

그런가? 가비가 작게 속삭였다.

하긴. 윤이 나이 때는 하루가 다르게 금방금방 클 테니까.

“참, 형님! 점심 드셨어요? 찬은 없지만 금방 차려드릴게요!”

괜찮다는 말을 하려 했는데 윤이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어갔다.

가비가 ‘어떡하지?’ 하는 얼굴로 반소를 돌아봤다.

평상에 걸터앉아 있던 반소가 신발을 벗고 평상 위로 아예 올라오며 말했다.

“호응해주는 수밖에. 안 먹고 가면 울 것 같으니.”

그 말에 가비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윤의 말을 따라주는 반소가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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