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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 낮과 밤의 신부-47화 (47/95)

[47화]

이른 아침. 후학들이 머무는 명의당은 들뜬 분위기였다. 어의로서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기 전, 이틀간의 휴가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다들 소풍 가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어디 보자. 나는 있지,”

오정이 설레는 얼굴로 손가락을 꼽았다.

“고기 조금이랑, 생선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그리고 우리 순정이 줄 꽃신 한 개랑 머리 장식 하나 사 갈 거야.”

“그동안 모아 둔 돈, 다 거덜 나겠다.”

겸복이 기가 막힌 얼굴로 혀를 찼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평소보다도 밝았다. 겸복도 오랜만에 가족들을 볼 생각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뭐 어때. 이럴 때 쓰려고 모아 둔 건데. 그런 넌? 아무것도 안 사 갈 거야?”

잠자코 있던 겸복도 정해둔 게 있는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난 날 더울 때 입으시라고 어머니 드릴 여름옷이랑 금복이 줄 서책을 몇 권 사갈까 생각 중이야. 금복이가 책을 좋아하거든.”

“자식. 너야말로 거덜 나겠다.”

다들 의학도로 지내는 동안 지원비로 조금씩 나온 월봉을 야무지게 모아 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비의 월봉 주머니에도 어느새 돈이 착착 모여 꽤 묵직했다.

“은갑이 넌?”

오정이 물었다.

“넌 동생들 뭐 사 줄 거야?”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가비가 대충 얼버무렸다.

“글쎄? 난 일단 보고.”

“그래. 직접 보고 고르는 것도 재미지.”

그렇게 명의당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선학들을 대표하는 어의 한 명이 나와 후학들을 줄 세웠다.

“자, 후학들께선 외출증을 받아가시오.”

그 말에 한 명씩 질서 정연하게 외출증을 받았다. 직사각형의 작은 명패엔 서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이건 천자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하사품입니다.”

외출증에 이어 한지에 둘러싸인 길쭉한 상자가 나누어졌다.

뚜껑을 열어본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현의 이름이 새겨진 붓이었다. 장터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최상품이었다.

“와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연발했지만, 가비는 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분명 받지 않겠다던 붓을, 기어코 이런 식으로라도 전달한 현의 의중을 알 수 없어서였다.

“야, 은갑!”

오정이 가비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얘 완전 넋 나갔네? 왜? 저번에 네가 하사받았다던 붓보다 더 좋은 거라서 그래? 아무래도 임명식에 참석 못 하신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야. 그치? 역시 천자님께선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자애로우셔.”

오정이 감동한 얼굴로 붓이 든 상자를 소중히 가슴에 품었다.

“이거 임명장하고 같이 고이 모셔둬야겠어. 안 그래, 겸복아?”

“당연하지. 집안의 가보로 삼아도 될 물건이니.”

“맞다! 가보! 가보로 삼아야지!”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재우듯, 선학이 말을 이었다.

“후학들은 지금 나가면 내일 유시(酉時:17시~19시)까지는 반드시 환궁해야 하오. 또 어의로서의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 쓰고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안 그러면 어의 자격이 박탈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명심하시오!”

후학들이 점잖은 목소리로 ‘예,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줄을 맞춰 의궁을 나섰다.

마침내 태황궁의 성문을 넘었을 때, 가비는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었다. 비단 가비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어장에 갇혀 있다 자유를 얻은 것처럼,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올 땐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보장된 미래를 선물 삼아 그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러 가는 길이었다. 누구라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은갑아! 잘 다녀와! 오정이랑 겸복이도!”

성문 앞에서 합류한 연화와 그 무리가 인사를 건넸다. 서로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각자의 길로 멀어졌다.

잠시 우뚝, 서 있던 가비도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을 하며 메고 있던 봇짐을 추슬렀다.

가족은커녕 아무런 연고조차 없는 땅. 낯선 곳. 다른 세계.

그러나 이제는 가비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현실이었다. 이곳 태황국은.

그래서일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모든 게 막막하진 않았다.

그냥 가까운 주막 같은 곳을 찾아서 하룻밤 묵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또래보다 왜소하지만 선하게 생긴 눈망울도.

갈 곳을 정한 가비가 걸음을 서둘렀다.

* * *

태황국의 수도 ‘온’은 수십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각 마을마다 고유 장터가 있다고 했다. 가비는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가봤던 장터를 찾았다.

아침부터 장터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가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장터를 둘러봤다. 그땐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웠는데,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서문의 말대로 서문이 준 가리개는 탄성도 좋고 통풍도 잘돼서 얄팍한 옷을 걸쳐도 큰 부담이 없었다. 가슴을 세게 압박해도 기존의 무명천보다 훨씬 덜 답답했다.

“어? 저기는…!”

자신이 동냥 받은 동전으로 사탕을 사 먹은 노점상이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비가 노점상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십쇼.”

그때와 달리 행색이 말끔한 가비를 보고 주인은 반색했다.

“색깔별로 담아주세요. 노란색은 몇 개 더 주시고요.”

“예에!”

주인이 서둘러 종이봉투에 사탕을 담았다. 꼭 봉해진 봉투를 봇짐에 넣고 돈을 건넨 가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신발 가게가 보였다. 가비 불쑥 들어가 신발을 둘러봤다.

“나이는 열 너덧 살쯤 된 남자아이예요. 신발 좀 보여주세요.”

주인이 냉큼 신발 몇 개를 가져와 가비 앞에 놓았다. 자수가 들어간 남색이 깔끔하고 예뻤다.

“혹시 발에 안 맞으면 바꾸러 와도 돼요?”

“그럼요! 내가 자필로 영수서 한 장 써줄 테니까 안 맞으면 갖고 와요.”

가비가 주인의 자필이 들어간 영수서 한 장과 봉투에 넣은 신발 한 켤레를 받았다.

신발 가게를 나온 가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버선을 파는 노점상이 보였다.

“버선 세 켤레,”

주머니 안에 돈을 확인한 가비가 숫자를 줄였다.

“아니, 두 켤레만 주세요.”

간절기에 신을 수 있는 것 한 켤레와 여름에 신을 수 있는 것 한 켤레를 골라 담았다.

어느덧 빵빵해진 봇짐을 메고 가비가 다른 노점상으로 향했다.

“나야말로 거덜 나겠다.”

자꾸만 비어가는 주머니를 보며 가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쩌지. 돈 쓰는 재미가 너무 쏠쏠한데.

가비가 가판대 위를 살폈다. 자수 팔찌와 머리 장식이 모양을 뽐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왠지 살 것 같은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가비에게 주인이 서둘러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거 보시게? 팔찌? 머리 장식?”

“음…….”

“딱 보니까 정인 주려고 사시는 거고만!”

“정인이요?”

가비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주인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서 이 장사만 십 년을 넘게 했어요. 사람들 얼굴만 봐도 누구 주려고 사는 건지 답이 딱 나온다니까!”

이 아저씨 웃기네?

가비가 크흠, 헛기침하며 자수 팔찌 하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이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다.

“이거 인기 많아요! 가운데 자수정까지 박혀서 여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여자 줄 거 아닌데.

“그럼 이건요?”

가비가 눈에 띄는 다른 팔찌 하나를 가리켰다.

주인이 조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사내들이 하는 건데. 여인들이 주로 많이 사가요.”

“흐음….”

가비가 그것을 손으로 들어 유심히 바라봤다.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여기 있는 물건 다 우리 집 안사람이 직접 만든 거요. 정성이 얼마나 들어가 있게? 지금 손님이 들고 있는 건 삼색 실로 짠 거고.”

“삼색 실이요?”

“전생, 현생, 후생까지의 인연을 기원하며 만든 정표라고나 할까? 똑같은 의미로다가 여기 여인들이 하는 것도 있고. 보통은 같이 사서 나눠 갖고들 해요.”

은근슬쩍 두 개를 팔아볼 심산으로 주인이 눈을 빛냈다.

가비가 고민하는 얼굴로 들고 있던 걸 내려놨다.

어울릴까?

팔짱을 낀 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과소비 성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깜짝이야!”

놀란 가비가 뒤를 돌아봤다. 반소가 서 있었다.

“반…,”

저도 모르게 이름을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태황국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다는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름을 말하면 이름을 들은 자들이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보겠지.

반소에겐 익숙한 일이겠지만, 가비는 굳이 그런 일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반소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반소의 차림새는 평소와 달랐다. 피갑을 걸치지 않은 모습은 그저 장터를 오가는 평범한 사내 같았다. 하긴. 평범이라고 하기엔 좀 뭐 했다.

보통의 사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키에 넓은 어깨. 완벽한 비율과 균형을 자랑하는 다부진 몸은 단순히 서 있기만 해도 눈에 띄었다.

특히 사내답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지나가는 뭇 여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정찰.”

그 말에 가비가 반소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피갑도 안 걸치고 반월도도 없이?”

야왕 반소가 한 몸처럼 들고 다닌다고 소문이 자자한 반월도도 보이지 않았다.

“암행 같은 거라고나 할까?”

“혼자?”

가비가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귀물경비대처럼 보이는 무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도 반소처럼 존재감을 과시하는 집단인데. 아무튼,

“설마 나 따라다닌 거야?”

“어쩌다 보니.”

굳이 이 넓은 수도에서, 굳이 이 장터를, 그것도 어쩌다 보니 자신을 발견했다는 반소의 말이 썩 믿기지는 않지만 가비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쨌든 엄청 반가웠으니까.

좋아. 이렇게 된 거-

가비가 가판대 위를 가리켰다.

“하나 골라봐.”

“뭘?”

“팔찌.”

“왜?”

“너 줄 거니까.”

반소가 짐짓 커다래진 눈으로 가비를 돌아봤다.

가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휴가일을 받아 장터까지 왔는데, 절친한테 줄 선물 하나 안 살 수가 있나.”

가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돈이 든 주머니를 빼꼼 보여줬다.

“시험 합격한 기념으로 내가 쏜다.”

“쏜다니.”

“내가 산다고.”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주인이 소비를 부추겼다.

“자자, 친우분이 산다는데 하나 골라요! 인물이 아주 훤칠하신 게 이게 딱이네!”

주인이 반소에게 잘 어울릴 만한 팔찌 하나를 골라 들었다. 사내들이 하기에 적당히 화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무심히 시선을 돌려 다른 것을 골랐다.

“어?!”

가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골랐던 삼색 실로 짠 자수 팔찌였다.

반소가 말없이 그것을 가비에게 내밀었다. 사 준다는 걸 전혀 마다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안 사 주면 서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걸로 주세요.”

가비가 주인에게 값을 치렀다. 값을 치르는 동안 반소가 팔찌를 착용했다. 뼈마디가 굵은 손목에 찰떡처럼 잘 어울렸다. 마치 주인이라도 만난 듯이.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주인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참. 희한하네.”

친우라는데 친우 같지 않았다. 특히 가비를 바라보는 반소의 눈빛이.

꼭 연정을 품은 것처럼 가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팔찌를 고를 때에도, 값을 치를 때에도.

다른 곳을 보는 듯하면서도 온통 가비에게 향한 반소의 눈빛을 주인은 정확하게 보았다.

참, 별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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