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언제부턴가 반소는 처소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약방 쪽을 바라봤다. 오늘도 그랬고. 해서 문가에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가비와 눈이 마주쳤다.
시종들은 당연히 반소가 목간으로 향할 줄 알고 옷을 줍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소의 행동은 의외였다. 팔뚝을 감싼 피갑을 툭, 툭, 벗어내더니 그것을 저만치에 서 있는 가비를 향해 던졌다.
턱-
가비가 저도 모르게 제게 날아오는 피갑을 받았다. 시종들의 눈이 전부 가비에게 쏠렸다. 가비가 피갑을 든 채 반소를 향해 물음표 어린 눈짓을 보냈다. 그러다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알고 얼른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따라오너라. 오늘 내 목욕 시중은 네가 들어라.”
뭐어?
가비가 놀란 눈을 들어 반소를 바라봤다.
가볍게 손가락을 까닥해 보인 반소가 목간으로 향했다.
“아, 저기….”
주저하던 가비가 시종들의 눈을 의식하며 얼른 반소를 쫓았다. 그 모습을 시종들이 빤히 바라봤다. 뭘 잘못 보고 잘못 들은 표정들이었다.
세상에. 야왕님께서 목욕 시중을 받으시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런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학도에게.
그건 곧 두 가지를 의미했다.
저 의학도를 특별히 맘에 들어 하시거나, 특별히 싫어하시거나.
물론 후자일 거라고들 생각했다.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누굴 가까이 두거나 총애하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그렇게 결론이 나자 결국 쯧쯧, 다들 혀를 차며 목간으로 들어가는 가비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
쿵-
목간 문을 닫은 가비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귀물이…, 엇!”
또 다른 피갑이 날아왔다. 가비가 그것을 받자마자 버리듯이 휙 던져버렸다. 피갑에 묻은 피가 제 손에도 묻었다. 질색한 얼굴로 재빨리 옆에 있는 양동이에서 물을 퍼 올려 손을 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반소가 낮게 웃었다.
“사내놈이 겁은 많아서.”
첨벙!
반소가 욕통으로 몸을 던졌다. 따뜻한 물이 사방으로 출렁이며 넘쳤다.
가비가 가까운 곳에서 세숫대야를 찾아 엎었다. 그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고 반소가 들어앉은 욕통 쪽을 바라봤다.
살다 살다 남자가 목욕하는 걸 관전하다니.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건 뿌연 김 때문에 반소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쨌든 밖에는 보는 눈도 많고 시중을 들라 명을 받았으니,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나갈 참이었다. 궁금한 것도 있고.
“다쳤어?”
그 말에 물이 잘게 첨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질문을 들은 반소가 가비가 앉은 쪽을 바라본 듯했다.
“전혀.”
“그럼 이 피는 뭐야?”
아까 반소를 본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냈더랬다. 다친 줄 알았다. 이내 피갑을 던지는 그를 보며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내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의 피다.”
“피해자들?”
그건 곧 죽은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말처럼 이른 새벽, 수도 어느 마을에서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여인 세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친구였고 그 밤 한 집에 모여 수를 놓고 주전부리를 하며 놀고 있었다. 나이는 셋 다 올해 성년을 맞은 스물이었고.
“진짜 귀물의 짓이야?”
“확신해.”
“어째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람의 살가죽을 그리 깔끔하게 벗겨 갈 재주가 사람에게 있을 리 없으니까.”
가비가 놀란 입을 막았다. 저쪽 세계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사건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잡았어?”
반소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 그렇다는 건 보통 귀물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럼?”
“지능을 가진 놈이라는 거지. 사람처럼.”
처음엔 추측이었지만 사건 현장을 직접 보고 나서는 그렇게 확신했다.
기록서에 보면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귀물 중 제일 위험한 존재였다. 보통은 몸에 묻어 있는 점액이라도 남기거나, 입에 고인 침이라도 한 방울 흘릴 텐데 마치 형체 없는 그림자처럼 현장이 깨끗했다.
게다가 젊은 여인이나 어린아이의 살가죽이 필요한 귀물이라.
그 의도가 필시 먹잇감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반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튼 안 다쳐서 다행이야.”
가비의 말에 반소가 퍼뜩 상념에서 나왔다.
“나는 네가 다친 줄 알았거든. 피갑에 피가 잔뜩 묻어 있어서.”
반소가 뿌연 김 너머를 바라봤다. 가비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설마. 내가 너처럼 맞고 다니려고.”
“맞고 다니다니! 그건 내가 누굴 도와주려다…!”
“누굴?”
되묻는 반소의 말에 가비가 ‘헙’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 발갛게 부었던 가비의 뺨을 보고, 반소는 누구의 소행인지 추궁하듯 물었다. 가비는 대답하지 않았고.
왠지 말을 하면 반소가 어떤 식으로든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염려스러우면서도 안심됐다. 누가 뭐래도 반소만큼은 제 편인 것 같아서.
“치. 뺨은 진작 나았는데 정강이는 아직도 시퍼렇거든?”
괜히 정강이를 들먹거리며 답을 회피하자 반소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봐서 아니면.”
솔직히 그 정도로 차진 않았다. 힘을 다해 찼으면 멍이 아니라 뼈가 상했을 테니.
“보긴 뭘 봐!”
본다는 소리에 가비가 식겁하며 정강이 부분을 두 손으로 가렸다.
“나 이제 나가도 되지?”
그리곤 성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이 서서히 걷히자 욕통 안에 들어앉은 반소가 잘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등 밀어주고 가.”
“뭐?”
반소가 휙, 물에 젖은 무명천을 가비에게 던졌다. 가비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반소가 느른한 얼굴로 욕통 가장자리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친우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해줄 수 없는 게 아니라, 못 해주는 거였다.
“혼자 해. 그동안 혼자 했을 거 아냐.”
그 말에 힐끔, 반소가 가비를 돌아봤다.
“그럼 정강이를 보여주고 가던가.”
“그놈의 정강이는 왜 자꾸…,”
“궁금해서.”
반소가 아예 가비 쪽으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네 이런 태도.”
“…….”
반소의 회색 눈이 가비를 꿰뚫을 듯 바라봤다. 그 눈빛에 가비는 숨을 멈췄다.
그가 말하는 친우 사이가 된 후로, 둘의 관계는 확실히 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소의 변화였다. 그는 궁금한 건 주저 없이 물었고, 확인하려 들었다.
“내가 보기에 넌 참 묘한 구석이 있거든.”
반소가 제 팔뚝에 턱을 괸 채 가비를 직시했다.
“뻔뻔한데 염치는 있고, 대범한데 겁은 많고, 성깔 있는 살쾡이 같으면서도 무른 성정도 있으니.”
“뭐? 살쾡이?”
가비가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가비를 반소가 가는 눈으로 응시했다.
“또 허물없이 굴다가 몸을 사리지. 지금처럼.”
촤악-
반소가 욕통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란 가비가 고함을 질렀다.
“야, 야! 너 지금 뭐 하는…!”
급히 두 눈을 가리다 말을 삼켰다.
저벅-
젖은 발이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놀란 가비가 문 쪽으로 달아났다.
턱!
반소의 굵직한 팔이 가로막았다. 가비가 뒷걸음질 쳤다.
천천히,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반소가 다가왔다.
“왜, 왜 이래.”
가비가 뒤를 힐끔거리며 계속해서 물러났다. 마치 맹수에게 내몰린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새 목간을 가득 채웠던 김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대로 눈을 들면 반소의 전라를 목전에서 보게 되는 셈이었다.
“참 이상하지?”
반소가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불쑥 내게 손을 대고 얼굴은 들이밀면서, 정강이 하나는 보여주지 못한다는 게.”
“봐서 뭐해! 나는 그걸 본다는 네가 더 이상해!”
가비가 애써 침착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언제 얼굴을 들이밀었어? 들이민 게 아니라 그냥 올려다본 거겠지. 네 키가 좀 커? 나도 너 한번 쳐다보려면 목이 다 아프다고.”
분명 아무 말이었지만, 최대한 아무 말 같지 않게 굴었다.
반소가 팔짱을 낀 채 제 앞에 선 가비를 빤히 바라봤다. 당황한 것을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내리뜬 눈의 속눈썹이 가늘게 파들거렸다.
“대체 왜 내외를 하는 거지? 사내끼리.”
반소로선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친우끼리 두터운 정을 쌓으려면 생사고락 하거나, 술친구가 되는 것. 또 함께 물속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생사고락은 극한의 상황을 함께 하는 것이었고, 술은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있으며, 목욕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상대에게 내보이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든 것을 반소는 가비와 해보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친우니까. 헌데 녀석은 결정적인 순간 늘 자신을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반소는 그것이 몹시도 못마땅했고.
“왜 내 눈을 안 보지?”
반소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항상 그 눈에 나를 담으라고 했잖아.”
반소의 손이 가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가비가 반소의 손을 쳐냈다.
“소, 손대지…, 으악!”
풍덩-!
황급히 물러나던 가비가 발이 미끄러지며 욕통 안으로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