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의 시험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학당도 학도당도, 아니 어쩌면 의궁 전체가 물에 잠긴 듯 조용했다. 모두 틈만 나면 두꺼운 서책을 펼쳐보기에 바빴다.
밥을 먹을 때도, 세수할 때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며 다들 한 자라도 더 외우기 위해 노력했고 수업도 자율학습으로 진행됐다.
가비는 점심을 먹고 난 후 학우들과 다과방의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십수 개의 평상이 마련돼 있었다. 시험을 목전에 두고 의학도들은 이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험에 관한 정보를 나누고 함께 공부했다.
저쪽 세계로 따지면 스터디그룹 같은 거라고나 할까?
“은갑아, 여기.”
연화가 서책 한 권을 내밀었다.
“너무 잘 봤어. 고마워.”
“생각보다 빨리 봤네?”
“응. 밤낮으로 모여서 같이 봤거든. 진짜 중요한 것만 쉽게 정리 잘해놨더라.”
서책은 가비가 만든 요약정리본이었다. 시험에 나올만한 중요 약초들과 그에 따른 효능과 부작용 그리고 응용법까지 고르게 적혀 있었다.
만든 가비야 진작에 다 외웠고 그걸 함께 공부하는 학우들과 공유했다. 그렇게 엿새 만에 모두를 돌아 다시 주인인 가비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예상 문제지는 다들 만들어 왔어?”
가비가 서책을 봇짐 안에 넣으며 물었다.
“응. 문제 만들면서도 공부할 수 있어서 좋더라.”
기다렸다는 듯이 준식이 종이 몇 장을 꺼냈다. 그러자 다들 자신이 만들어온 예상 문제지를 꺼내어 서로 교환했다.
“우리 이거 다 풀고 확인하자.”
“응.”
이내 말이 끊기고 다들 문제 풀기에 집중했다. 사각거리는 종이 소리와 필기 하는 소리만이 평상 위를 오갔다.
학도당에 들어가서 따로 공부하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함께 하면 뭔가 시간도 빨리 가고 지루하지 않았다.
문제를 다 풀고 답을 맞추는 가비와 학우들의 얼굴로 웃음이 어렸다. 마치 수다라도 떠는 듯 가볍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그 모습을 다른 평상에서 바라보던 오정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댔다.
“쟤들은 대체 뭘 보는 거야? 교본은 아닌 것 같은데.”
“은갑이가 만든 요약정리본이래.”
“요약정리본?”
“어. 시험에 나올만한 것만 추려서 정리했다나 봐.”
“그런 걸 만들었다고?”
놀라는 오정을 보며 학우 한 명이 별것 아니라는 듯 응수했다.
“저게 뭐가 도움이 되겠어. 시험에 나올 만한 건지 아닌지 지가 어찌 안다고. 그럴 바엔 그냥 교본 한 번 더 보는 게 낫지. 안 그래?”
“어…. 그건 그렇지.”
애써 대답을 하면서도 오정의 눈은 계속 가비가 있는 평상 쪽을 바라봤다. 옆에 앉은 겸복은 아무런 대꾸 없이 교본만 볼 뿐이었다. 허나 오정은 알고 있었다.
겸복의 신경 또한 가비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해가 기울 무렵, 가비가 공부하던 것을 접고 서둘러 봇짐을 챙겼다. 연화가 물었다.
“벌써 가려고?”
“응.”
“음궁 가려면 아직 이르지 않아?”
“학도당에 들렀다가 이것저것 챙겨가야 해서.”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시간이 남아돌 텐데 뭐가 급한지, 가비는 벌써 평상을 내려와 신발까지 신고 있었다. 지켜보던 다른 학우가 기막힌 얼굴을 했다.
“놀러 가냐? 누가 보면 좋아서 가는 줄 알겠다.”
“싫지 않은데?”
“뭐?”
그 말에 학우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비가 입꼬리를 올렸다.
“음궁 괜찮아. 약방도 얼마나 깨끗하고 편한데.”
“야, 거긴 야왕님이……,”
“야왕님도 괜찮고.”
가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번에 나 감옥소에 끌려갔을 때 야왕님께서 도와주신 거 알지? 생각 외로 속정이 있는 분이야. 아님 의학도인 나를 왜 도와주셨겠어? 나 그때 좀 감동이었거든.”
“…….”
“아무튼 나 먼저 갈게. 내일 보자!”
“…….”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가비를 학우들이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쟤 지금 제정신 아니지?”
“…그르게.”
음궁과 야왕에 대해 호의적이라니. 지금껏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별난 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학도당으로 돌아온 가비는 방에서 추가로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연습장으로 쓸 서책도 담고 부족한 먹물도 통에 잘 넣어 새로 말린 붓과 함께 봇짐에 넣었다.
막 준비를 끝낸 찰나, 문이 열리고 오정과 겸복이 들어왔다.
“음, 음궁 가는 거야?”
오정이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
짧게 대답한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갔다 와….”
여전히 쌀쌀맞은 가비의 태도에 오정이 시무룩하게 인사를 건네며 책상에 앉았다. 겸복도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방을 나서려던 가비가 문가에서 우뚝 멈춰 섰다. 하여튼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놈들이었다.
그날 이후, 오정과 겸복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행동했다. 이래저래 가비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 마음 불편하게.
가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봇짐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야, 오정.”
“어, 어?”
오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겸복도 조심스레 가비를 곁눈질했다.
“이거 내가 만든 요약정리본인데, 볼래?”
“요약, 정리본?”
오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우리 보여준다고?”
“싫음 말고.”
“아, 아니야! 볼게! 보여줘!”
오정이 다급히 손을 내밀었다. 가비가 서책을 오정의 손에 넘겼다.
“솔직히 내 맘대로 정리한 거라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몰라. 보고 별 볼 일 없다 생각하면 내 서안 위에 두고.”
“어, 알았어.”
오정이 좋아하는 기색을 참으며 자리로 가 앉았다. 가비가 돌아서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
겸복이었다. 인사를 건넨 겸복은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겸연쩍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런 겸복의 정수리를 빤히 바라보던 가비가 툭 내뱉었다.
“알면 됐고.”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의궁을 나와 음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도착한 음궁에 반소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처소로 들어오는 길에 늘 배경처럼 있던 귀물경비대도 못 봤다.
“아, 저기 시종관님.”
지나가던 시종관이 가비를 돌아봤다.
“반소님과 귀물경비대는 어디 갔습니까?”
“새벽에 사건이 생겨 아직 출타 중이십니다.”
“사건이요?”
이제는 낯이 좀 익어 친밀감이 생긴 시종관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잠잠하던 귀물이 출몰했거든요.”
시종관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가비가 약방으로 향했다.
봇짐을 내려놓은 가비가 의자에 풀썩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귀물이라니….
가비가 기억하는 귀물은 북쪽, 귀물의 땅에서 봤던 녀석들이 다였다.
괴물 같았지만 가만 보면 가비가 알고 있는 동식물이나 곤충들의 변형된 모습 같기도 했다.
근데 새벽에 나갔다면서 아직도 안 돌아온 거야?
직감으론 그때 가비가 봤던 귀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반소와 귀물경비대는 저쪽 세계로 따지면 이쪽 세계에선 핫이슈 같은 존재였다.
두려워하고 꺼리면서도 제일 많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이라던데.
그런 면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반소와 그 집단은 늘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가비가 교본과 서책을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아직 실질적으로 약방 업무를 보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붓대의 끄트머리를 입에 물고 교본의 같은 부분을 외우고 또 외우다가 고개를 들었다.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설마 뭔 일 난 건 아니겠지?
문 쪽을 빤히 보다 교본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다시 문 쪽을 힐끔.
신경 쓰이네.
그동안 학우들에게 간간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귀물경비대가 왜 귀물경비대인지.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난 그들의 육체적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면 반소를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제 위로 커다란 새가 날아오른 줄 알았다. 저쪽 세계 그 어떤 운동선수도 그 정도의 점프력은 불가능했다.
기네스북에 등재되는 게 아니라 연구대상이 될 거야. 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생각을 떨치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시종들이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였다.
왔다!
반소가 온 모양이었다.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동태를 살피듯 문짝에 귀를 대고 있다가 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봤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며 문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처소로 들어선 반소의 피갑이 피투성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