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수도를 정찰하고 온 귀물경비대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태황궁으로 돌아왔다.
목전에 봄을 두고 있어 그런지 묵직한 피갑(皮甲)을 두르고 돌아다니면 금세 땀이 솟았다.
“반소님, 계곡물에 시원하게 몸 한번 담그시죠!”
곤이 피갑을 벗어던지며 말했다.
“됐다.”
단칼에 거절한 반소가 처소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곤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댔다.
“요새는 왜 저리 칼같이 들어가신담?”
정찰이 끝나면 늘 저희와 함께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술과 고기를 먹던 대장이었다.
헌데 요새는 마치 퇴근 시간을 정해 놓은 것처럼 굴었다. 태황궁에 당도하기가 무섭게 처소로 들어가 버리니.
곤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에 뭐 꿀이라도 발라놓으셨나?”
“설마.”
곁에 있던 풍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인이라도 두었으면 모를까.”
“여인? 그거야말로 설마다.”
곤이 팽- 콧바람을 뿜었다.
귀물경비대의 우두머리, 그들의 대장이 누구인가. 지금껏 수절 아닌 수절을 지켜온 살아있는 목석이었다.
“반소님의 마음을 꾀려면, 적어도 태황국에서 제일가는 절세미녀는 돼야 한다.”
허나 그런 미녀는 태황국에 오직 한 명, 천녀인 천태비뿐이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쯧쯧. 생각이 저리 단순해서야.”
그 말에 곤이 버럭 화를 냈다.
“단순하다니! 그게 왜 단순한 생각이야! 사내라면 모름지기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이 돌아가게 돼 있거늘! 사내뿐이냐! 세상 모든 수컷이 그러하다! 그게 본능이라고!”
“알았다, 알았어.”
곤이 제일 싫어하는 건 자신을 무식하게 보는 거였다. 해서 누군가 자신을 그리 보는 것 같으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봤다.
곰 같은 덩치에 다혈질인 성격.
그런 곤을 다스리는 건 오래된 친우 풍뿐이었다.
“자자, 그만하고. 시원한 계곡물에 몸이나 담그러 가자고.”
“너 한 번만 더 내 생각이 단순하다면서 무시하기만 해봐. 아주 그냥 다리 몽둥이를…,”
“근데 오늘 저녁은 토끼를 먹는다고 했던가, 꿩을 먹는다고 했던가.”
“뭔 소리야! 돼지를 먹는다고 했지!”
“그래?”
“그래! 토끼는 그제 먹었고 꿩은 어제 먹었잖아. 오늘은 돼지야.”
“아, 그랬군. 깜빡했어.”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소중한 저녁밥을.”
먹는 거로 금세 화제를 돌린 풍이 곤의 어깨에 팔을 척 올렸다. 그리곤 힐긋, 뒤를 돌아보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들을 따라가던 귀물경비대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 * *
반소가 등장하자, 시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느 때처럼 휙휙 벗어 던지는 옷가지를 빠르게 주우면서 뒤따랐다.
반소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성가시다. 따라오지 마라.”
동작을 멈춘 시종들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간으로 들어간 반소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알몸에 끼얹었다. 시린 물줄기가 촘촘하게 짜인 근육 사이사이로 흘러내렸다.
풍덩-
욕통으로 몸을 던진 반소가 머리끝까지 물속에 밀어 넣었다.
태황궁에 돌아온 뒤, 귀물들의 흔적을 찾아서 수도 곳곳을 정찰했다.
귀물경비대가 나타나면 소란하던 장터도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귀물이나 귀물경비대나, 사람들에겐 매한가지였다.
“푸후-”
물 밖으로 나온 반소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서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내 잔잔해진 수면 위로 얼굴이 비쳤다. 싸늘하고 냉소적인 사내의 얼굴이 검은 물결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실은 나 태황국 사람이 아니야.’
가비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쪽 세계에 있는 다른 나라에서 왔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도.
거짓이라기엔 너무도 진심인 얼굴. 해서 비웃을 수조차 없었다.
“…읏.”
불현듯 가슴으로 통증이 느껴졌다. 반소가 왼쪽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조이는 것처럼 욱신댔다.
도대체 왜….
날 때부터 타고난 흉터에서, 근래 들어 통증이 올라왔다.
마치 무언가를 알리는 듯, 반소의 신경을 야금야금 긁어댔다.
이 또한 귀물의 피 때문인가.
입술을 꾹 물고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사라지자, 굽었던 어깨를 펴며 짧은 숨을 토해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은갑이, 그 맹랑한 녀석이 왔을 텐데.
촤악-
몸을 씻어낸 반소가 서둘러 욕통에서 일어났다.
대충 물기를 닦아내며 목간을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관이 다가와 물었다.
“석반은 어찌할까요.”
“닭 몇 마리 푹 고아서 올려라.”
“예.”
“몸에 좋은 약재도 듬뿍 넣고.”
“예.”
“아,”
깜빡했다는 듯 반소가 돌아서며 말했다.
“뜨거운 국과 생선, 그리고 송이랑 삼도 내오고. 두 명이 먹을 것이니 수저도 밥도 모두 두 개씩 준비해라.”
“예.”
시종들이 서둘러 부엌으로 물러갔다. 방 앞에 선 반소가 약방 쪽을 바라봤다.
오늘도 과제를 잔뜩 안고 왔겠군.
사내놈치고는 가늘고 마른 몸이었다. 그 몸으로 일정을 소화하려면 늘 든든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방으로 들어간 반소가 창문을 활짝 열고 침상에 누웠다.
남청색을 띤 밤하늘이 보였다. 총총 박힌 별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겠군.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가비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아롱거리는 초롱불 밑에서 열심히 과제를 하던 가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와중에도, 향이 다 타면 잊지 않고 새로운 향을 태웠다.
그건 아주 사소했지만, 반소에겐 겪어보지 않은 생소한 일이었다.
누구도 반소를 그렇게 살뜰히 챙기지 않았다. 간섭하거나 권유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를 뿐.
태황궁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어쩌면 당연했다.
반인반귀에게 줄 마음 한 자락 따위 누구에게도 없을 테니.
허나 익숙한 감정의 부재는, 반소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했다.
어차피 어미 배 속에 있을 때부터 그래왔던 일.
더해질 것도, 덜어질 것도 없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석반이 준비되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들라.”
허락이 떨어지자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시종들이 들어왔다.
금세 군침 도는 음식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저녁상을 차렸다.
반소가 탁자 중앙에 놓인 백숙을 바라봤다. 보얀 국물에 온갖 약재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보양이 되는 것 같았다.
시종들이 나가자마자 침상 맡의 줄을 당겼다. 실은 아까부터 녀석을 불러다 놓고 싶었다.
떡 벌어지게 차려진 저녁상을 보고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맛있게 먹는 얼굴도.
하지만 반소의 부름에 달려온 사람은 가비가 아니라 자신의 주치의였다.
“왜 네 놈이 들어와?”
반소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그 의학도 녀석은.”
주치의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그, 그것이 문제가 생겨….”
“문제?”
주치의가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으나,”
의자에 꼿꼿하게 앉아 있던 반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눈치를 살피던 주치의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한참 조제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바깥이 시끌벅적했습니다. 해서 냉큼 나가보니……,”
“사설은 집어치우고, 핵심만 말해라.”
나지막한 경고에, 주치의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쳤다.
“그게 저, 은갑 군이 물건을 훔쳤답니다.”
“뭐?”
반소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기세에 주치의가 휘청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도, 도둑질을 했다며 끌려갔는데….”
도둑질?
반소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아무리 간 큰 놈이라도 태황궁에서 도둑질이라니. 그것도 의학도라는 신분으로 시험을 앞둔 녀석이.
‘그럼 나 과제 좀 해도 되나?’
진지한 눈으로 묻던 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당초 도둑질이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할 리 없었다. 훔치자마자 태황궁을 빠져나갔겠지. 계속 머물 리가 없었다. 목숨이 두 개이지 않은 이상.
필시 오해가 있는 듯했다.
“해서.”
“예?”
“주포청이냐, 야포청이냐.”
표정을 굳힌 반소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이 끌려간 곳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