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23화 (23/95)

[23화]

노을이 내린 무렵, 가비가 서고를 빠져나왔다. 오늘 살펴본 약초도감에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럼 저 가볼게요.”

“그래.”

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낯빛이 어쩐 일인지 아까와 달랐다.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에 다정한 말투였지만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드린 건강인형은 잘 있죠?”

혹시나 병증이 올라온 것은 아닌가 하여 걱정이 되었다. 건강인형의 안부를 묻자 현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내 침상 맡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지.”

“녀석이 사서님의 우환을 가져가 줄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보기엔 그래도 제가 좋은 마음으로 만들었거든요.”

“고맙다.”

“제가 더요.”

가비가 꾸벅 인사를 전한 뒤 돌아섰다. 손을 들어주던 현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걷혔다.

마침내 가비의 모습이 사라지자,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장곡.”

“예. 천자님.”

숨어있던 장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의학도들의 실습자 명단이 잘못되었던가?”

“아닙니다. 분명 서문에게 받은 그대로입니다.”

“허면 후에 바뀐 모양이로군.”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가비를 콕 찍어 양궁으로 실습을 보내라 명을 내릴 걸 그랬다.

그랬다면 후에 바뀌는 일조차 없었을 텐데.

“허나 그것은 어의들의 소관입니다.”

마치 천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 장곡이 말했다.

“그래. 그렇지.”

“오늘은 목욕재계가 있는 날입니다. 가시지요.”

천자가 원해서 갖지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천자의 마음을 흐트러트리거나 난잡하게 홀려서는 아니 되었다.

하늘과 닿아있는 천족이라 해도,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천족 또한 인계에 사는 존재일 뿐이었다.

허니 그런 천자의 마음을 ‘천자’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늘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바로 최측근 장곡의 일이었다.

하여 그 의학도에게 사소한 재미는 찾을지언정, 그 의학도로 인해 천자가 선을 넘는 행동을 하게 둬선 안 됐다.

그 마음을 현 또한 아는지라, 이내 가비에게 향해 있던 고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가자.”

현이 지체없이 돌아섰고, 그 뒤를 장곡과 시종들이 빠르게 따랐다.

오늘은 목욕재계가 있는 날. 티끌 한 점 없는 계곡물에 육신을 담가, 그 마음까지 깨끗이 하는 정화 의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 천자가 원해서 갖지 못할 것은 없었다. 허나 그것은 깨끗해야 하고 성스러워야 하며 탁한 기운이 스미지 않는 맑은 것이어야 했다.

알면서도 현은 가비가 준 건강인형을 그냥 받았다. 알면서도 현은 가비가 음궁으로 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알면서도. 이런 자신이 별스럽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 * *

드륵-

숙소로 돌아온 가비가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실습을 나간 모양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온 가비가 빼꼼, 복도 밖을 내다봤다. 개미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문을 걸어 잠근 가비가 겉옷을 벗었다. 안에 입은 상의까지 벗어젖히자, 둥근 어깨와 무명천에 꼭꼭 감추어진 가슴이 드러났다.

가비가 양 가슴에 손을 얹고 살짝 눌러봤다.

“아….”

뭉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최근 들어 가슴이 조금 커진 것도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초경만 안 했다뿐이지, 이미 육체적인 성장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근데 왜 이러지…?

무명천을 너무 꽉 동여맨 게 아닐까 싶어 조금 느슨하게 묶어보았다. 그러자 통증도 덜하고 숨을 쉬는 것도 한결 편해졌다.

“휴우….”

크게 숨을 내쉰 가비가 서책과 필기구를 봇짐에 챙겨 넣었다. 음궁에 갈 채비를 끝냈지만, 시간이 좀 남았다.

책을 좀 볼까?

벽에 기대앉아 서고에서 빌려온 책을 펼쳤다. 이번엔 대충 넘겼던 부분들을 꼼꼼히 찾아 읽었다. 내용을 눈으로 훑던 가비의 시선이 어느 대목에서 멈췄다.

천족의 특징?

책에는 천족의 외모적 특징이 적혀 있었다. 단 한 줄로 명료했다.

[ 보통은 금백색의 머리카락을 타고나며, 그 눈동자의 색깔 또한 금안으로 구분된다. ]

불현듯 방금 보고 왔던 현의 머리카락 색깔과 금안이 뇌리를 스쳤다.

…뭐지?

그와 동시에 천족이면서도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회색 눈을 지닌 반소가 떠올랐다.

전혀 다르잖아.

찜찜한 생각에 서둘러 책장을 넘겼다. 오늘따라 유독 짤막한 글귀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추가된 내용을 새로이 편찬한 것인지 글자를 쓴 먹의 빛깔이 미세하게 달랐다.

거기엔 반소가 약관을 넘기며 귀물경비대의 경비대장으로 임명받은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반인반귀?

가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반소를 비롯한 귀물경비대가 반은 사람, 반은 귀물이었다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꺼리는구나.

그제야 반소를 향한 사람들의 배타심이 제대로 이해됐다.

반소(半宵).

이름조차도 ‘깊은 밤’을 의미하는 그의 호칭은 야왕. 거처는 태황궁의 모든 음기(陰氣)가 모여있는 음궁이다.

그건 어찌 보면 봉인과도 같은 의미였다. 강력한 음의 기운을 한곳으로 몰아넣어, 양의 기운을 침범할 수 없게 만드는.

몰랐던 사실을 알아서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탄생 비화가 놀라워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이상해. 여기가 아파.

가비가 욱신거리는 심장 부근을 어루만지며 책장을 넘겼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또 한 줄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야왕 반소에 이은 천자에 대한 설명이었다. 하늘이 선택한 새로운 천자. 그 귀한 이름은……,

[ 어질 현(賢). ]

가비의 입술이 벌어졌다.

[ 태황국이 곧 천자이며 천자가 곧 태황국이라, 천자의 어진 성정이 태황국을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이끌고 백성들은 고복격양(鼓腹擊壤)할 것이 자명하여 그 이름을……, ]

“…현으로 명명한다.”

가비가 멍한 얼굴로 속삭였다.

설마 그 사서 현이…, 천자 현이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왜 자신에게 신분을 밝히지 않았단 말인가.

가비가 ‘사서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현이었다.

하지만 금백색의 머리카락과 금안, ‘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제가 알고 있는 사서 ‘현’이었다. 이게 다 우연으로 겹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럼 그 서고는 대체….

물음표가 복잡하게 머릿속을 휘도는데 쾅쾅쾅!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가비가 퍼뜩 눈을 들었다.

“누구세요?”

그제야 문을 잠가 두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얼른 빗장을 풀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마자 경비대가 들이닥쳤다.

“네 이름이 은갑이 맞느냐?”

“예. 제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경비대가 가비의 두 팔을 포박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네 놈이 도둑질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예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경비대가 가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잠깐만요! 도둑질이라니요! 제가 뭘 훔쳤다고 이러세요!”

한바탕 소란이 일자, 의궁에 있던 어의들과 실습 중이던 의학도들이 튀어나왔다.

어의 중 나이가 제일 지긋한 자가 경비대를 가로막고 물었다.

“정숙해야 하는 의궁에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자가 도둑질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소.”

“도둑질이요?”

“증거품이 명백하다 하니 일단 가서 조사를 받아보면 알 일이오.”

경비대의 확고한 말에, 어의들도 손을 쓸 수 없었다. 하필이면 태어의 서문도 오늘은 볼 일이 있어 수도로 나간 참이었다. 구경하듯 몰려 있던 의학도들이 수군거렸다. 그 틈으로 고개를 내민 연화가 사색이 된 얼굴로 가비를 바라봤다.

“은갑아….”

가비를 둘러싼 소란스러움이 점차 커졌다. 더 버티고 있는 건 여러모로 민폐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가비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앞을 막고 있던 어의들도 자리를 비켰고 경비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술을 굳게 다문 가비가 경비대와 함께 의궁을 나섰다. 당장 그 증거품이라는 것부터 확인해야 했다.

* * *

태황궁에서 포청은 총 두 군데로 나뉘었다. 주경대가 있는 주포청과 야경대가 있는 야포청이었다. 그 중 가비는 주경대의 주포청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다시 심문관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조사가 이뤄지는 모양이었다.

싸늘한 분위기가 자못 위압적이었지만 가비는 애써 침착하게 굴었다. 잘못한 일이 없으니 떨 이유 또한 없어야 했다.

경비대가 가비를 거칠게 꿇어 앉혔다. 그제야 단상 위, 상석에 앉아 있던 경비대장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놈이 의학도, 은갑이가 맞느냐?”

“예. 맞습니다.”

가비가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오늘 네 놈이 도둑질을 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한 자가 누굽니까?”

“익명을 요청하였으니 말해 줄 수 없다.”

익명…?

가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제가 도둑질을 했다는 증거가 어딨습니까? 증거품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가비가 당당히 증거품을 요구했다.

요 맹랑한 것 봐라?

보통은 경비대에 끌려와서 꿇어앉으면 죄가 있든 없든 벌벌 떠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헌데 눈앞에 있는 녀석은 전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경비대장이 픽, 입꼬리를 올리며 옆에 선 부하에게 눈짓했다.

부하가 처소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고운 비단보를 펼치자 그 안에 들어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가비가 놀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붓이었다. 현이 제게 주었던. 그저 쓰지도 않고 서안에 놓아두기만 했던 물건이었다.

이게 왜…….

“네 녀석이 뭘 훔쳤는지 이제 알겠느냐?”

경비대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감히 의학도가, 그것도 태황궁에서,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천자님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아, 아닙니다! 이건 천자님 것이 아니라…,”

가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서 현이 천자 현임을…,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책을 보며 심증을 굳혔지만 정확한 건 아니었다.

잠시 말을 잊은 듯 붓만 노려보고 있자, 경비대장이 의기양양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왜. 막상 보니까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게냐?”

뚜벅뚜벅.

바로 앞까지 걸어온 경비대장이 비단에 놓인 붓을 조심스레 들어 글자 ‘현’이 새겨진 부분을 보여주었다.

“천자님께서 쓰시는 물건에는 모두 천자님의 존함이 새겨져 있다. 이 붓 역시 그러하고. 이 귀한 걸 한낱 의학도인 네 놈이 갖고 있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지.”

필시 훔친 것을 비싼 값에 암거래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내 당장 너의 죄를 묻고 판결을 적어 올릴 것이다.”

“서고……,”

가비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서고에 계시는 사서님께 받은 물건입니다.”

“뭐?”

“그분이 이 붓을 주셨다고요.”

이참에 확실하게 확인해야 했다. 제가 알고 있던 현이 정말 사서 현이 아닌지.

“그러니까 사서님을 불러 주세요.”

경비대장이 바로 사람을 시켜 사서를 불러오도록 명했다. 가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둑질에 가담한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모두 색출 해내야만 했다.

허나 포청으로 불려온 사서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물며 가비를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사실이었다. 가비도 사서의 얼굴을 처음 봤으니. 하물며 남자도 아닌 여자였다.

곧장 사서는 서고의 방문자 명단을 그 증거로 내밀었다. 정말 당연하게도 가비의 이름은 없었다.

사서가 물러간 뒤, 가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럼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정말…….

“네 이놈! 감히 거짓을 고해 혼란을 주다니!”

경비대장이 호통쳤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내 단단히 고쳐놔야겠다!”

정신을 차린 가비가 다급히 말했다.

“천자님을 불러 주십시오!”

“뭐라?”

“천자님을 불러 주세요. 이건 천자님이 제게 주신 겁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경비대장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하다하다 천자님을 입에 올리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놈이 분명했다.

“여봐라! 이놈을 당장 지하 감옥소에 있는 냉옥에 가두어라!”

“예!”

자리를 지키던 경비대들이 가비의 양팔을 붙들었다.

“자, 잠시만요! 전 진짜 훔치지 않았어요!”

가비가 몸부림을 치며 외쳤다.

“이건 정말 천자님이 주신 거라고요! 믿어주세요!”

하지만 부질없는 외침이었다. 이미 경비대에 있는 누구도 가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탁입니다! 천자님을 불러 주세요! 제발 천자님을……!”

가비의 절박한 목소리가 지하 감옥소의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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