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누군 좋-겠네!”
서둘러 저녁을 먹고 음궁으로 갈 채비를 하는데, 방 한쪽에 앉아 있던 겸복과 오정이 가비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태어의님의 눈에 들어, 의궁 어의님들께는 칭찬받아, 이제는 연화의 관심까지. 세상 남부러울 게 없겠어.”
“그것도 재주지. 사람 후리는 재주.”
“그러게 말이야. 그럴 거면 의궁에 왜 들어왔나 몰라. 돈 많은 여인이나 한 명 홀려서 장가나 가지.”
“장가도 아무나 가는 것은 아니지. 힘 좀 써야 가능하지 않겠나. 딱 봐도 대물은 아니니.”
“하하! 그런가? 하긴…. 뭔가 자신 없으니까 늘 목간도 혼자 쓰고 빠지는 거겠지. 크기가 요만 한가 봐.”
오정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비꼬자 겸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자.
가비가 봇짐에 책과 종이, 필기구를 넣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날 이후, 겸복과 오정은 가비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 대신 귀 따갑게 입으로만 털었다.
저쪽 세계나 이쪽 세계나 먼저 때리는 사람이 손해야. 암. 그러니까 참아야지.
겨우 마음을 다잡는데 겸복의 말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용감무쌍하게 지원은 했는데 가서 오줌이나 안 지릴까 모르겠군.”
“지려도 별수 있어? 잘됐지 뭐. 이참에 혼쭐이나 봐야 꼴값을 안 떨지.”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벌떡-!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겸복과 오정이 움찔했다.
가비가 봇짐을 꽉 움켜쥐며 겸복과 오정에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들고 있는 봇짐으로 두 사람을 후려 팰 기세였다.
긴장한 두 사람이 애써 큰소리를 냈다.
“어허! 이거 왜 이래!”
“우리가 뭐 없는 말을 했는가!”
둘이 붙어서 가비를 경계하는 모습이 자못 우스웠다.
가비가 들고 있는 봇짐을 팡팡!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물렸다.
가비가 두 사람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피곤해. 할 수만 있다면 좀 나눠줄 텐데.”
그리고 아쉽다는 듯 잘난 척을 했다.
“그러니까 우리 좀 적당히 하자. 응? 부러우면 지는 거야.”
겸복과 오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가비가 방을 나섰다.
문을 닫자마자 ‘아오! 성질나!’ 하는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발을 껴 신은 가비가 의궁을 빠져나갔다.
해가 진 저녁. 음궁으로 향하는 가비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달이 참 밝네.
일찌감치 뜬 달이 태황궁을 비추고 있었다.
문득 저쪽 세계에서 보는 달과 이쪽 세계에서 보는 달이 같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비슷하지만 완벽하게 다른 세계.
저쪽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이쪽 세계에 적응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전생이 있다면…, 어쩌면 내 전생도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
한참을 걷고 걸어 당도한 음궁은 양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건물의 크기나 형태도 흡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음궁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건물 한 채였다.
의궁과 비슷한 규모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투박하고 삭막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
험악하게 생긴 문지기가 가비에게 물었다.
뭐지? 이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왠지 낯이 익었다. 사내도 그러한지 가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궁에서 온 의학도입니다.”
“아, 의학도.”
사내가 재깍 옆으로 비켜섰다. 가비가 음궁의 대문을 넘으며 뒤를 휙 돌아봤다. 사내 역시 마찬가지로 가비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짠 듯이 금세 시선을 돌렸다.
느낌이 왜 이렇게 싸하지?
꺼림칙한 기분에 가비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런 가비를 사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경비대 처소에서 나온 곤과 풍이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방금 들어간 자는 누구냐.”
“의학도랍니다.”
안 그래도 의궁에서 실습할 의학도를 보낸다고 전갈이 왔었다.
“헌데 왜.”
“그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착각이겠지.”
듣고 있던 풍이 일축했다. 이번에 들어온 의궁의 의학도들을 어디서 봤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실습이 아니면 볼 일도 없거니와 수개월 동안 경계에 나가 있었으니 봤다 해도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렇겠죠?”
머리를 긁적인 사내가 가비를 향한 궁금증을 지워버렸다.
“우린 태황궁 주변을 한번 돌고 올 테니 보초 잘 서고.”
“예!”
멀어지는 곤과 풍을 보며 사내가 꼿꼿한 자세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 시간. 가비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자신이 머물러야 할 약방과 그 안에 있는 숙직실을 안내받았다.
약방은 관리가 매우 잘된 듯 깨끗하고 정갈했다. 숙직실 역시 마찬가지였고.
“침상에 이부자리는 새로 깔았고, 자리끼가 필요하면 방을 나가서 왼쪽으로 직진, 부엌으로 가면 됩니다. 그 맞은편이 목간, 거기에서 삼십 보 정도 더 가면 뒷간이고요.”
친절하지만 사무적인 말투로 음궁의 위치를 설명한 시종이 머리맡에 달린 종을 가리켰다.
“종이 울리면 바로 옆 방, 야왕님의 침소로 가면 됩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시종은 쌩하니 사라져버렸다.
마치 이곳을 빨리 벗어나 자신의 침소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이.
“여기가 그렇게 싫은가? 난 괜찮은데.”
가비가 침상 위로 벌렁 누웠다. 폭신한 이불에 몸이 쑥 꺼지는 것만 같았다.
“아, 좋다-”
오랜만에 제 방 침대에 눕는 기분이었다. 깃털처럼 편안한 베개에 얼굴을 비비다 눈앞에 있는 은색 종을 바라봤다.
안 울렸으면 좋겠다.
야왕의 존재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안락한 잠자리가 우선이었다.
그렇게 까무룩, 봇짐을 풀기도 전에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 *
벌써 며칠째, 반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궁으로 돌아온 뒤 잠시 잠들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건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더디다 못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이 비칠 정도로 얄팍한 자리옷의 앞섶을,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이 궁이, 제 방이.
긴 시간 불면에 시달리면 성질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활짝 열었다. 찬바람이 쌔액- 하고 불어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절정을 찍던 수도의 겨울이 한풀 꺾였다. 곧 봄이 오겠지.
온풍이 풀고 화사한 꽃이 태황궁 전체에 만발하는.
그 아름다운 광경은 차가운 얼음성 같은 음궁과 어울리지 않았다.
역시 궁보다는 북쪽 땅이 편하다.
반쪽은 귀물이라 그런가.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침상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창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뽀얀 속살을 드러내듯, 휘영청 뜬 달 주변으로 유독 별들이 반짝였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욱신-
한쪽 가슴으로 통증이 왔다. 반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십(十)자 형태의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날 때부터 있던 흉터라고 했다. 원인도 모르는, 알 수 없는 흉터였다.
사람들은 이 흉터를 불길하다 하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귀물의 씨를 받은 어린 핏덩이의 몸에 있는 흉터가, 괴이하고 흉측하기도 했겠지.
흉터는 반소와 함께 자라 지금은 손바닥만 한 크기를 하고 있었다.
잠이 안 오니 별 거지 같은 생각을 다 하는군.
더는 안 되겠다. 수면초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야지. 몇 차례 뒤척인 끝에 머리맡의 끈을 당겼다.
딸랑딸랑-
단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가비가 머리맡에서 흔들리는 종을 바라봤다.
배려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무지막지한 부름이었다.
딸랑딸랑딸랑-
가비가 얼른 침상에서 벗어났다.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급히 옷매무새를 다듬고 옆방, 야왕의 침소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라.”
문을 두드리자 깊이 잠긴 목소리가 답을 했다. 가비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끼익-
방안은 어둑했다. 사람도 사물도 형태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부르셨습니까.”
나지막이 묻자,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수면초를 가져와.”
그 길로 가비는 약방으로 돌아왔다. 약방 일지를 살펴보니 몇 개월 전 야왕에게 수면초를 사용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네? 불면증이 있나?
가비가 가지고 있던 열쇠로 약방에 있는 약초보관함을 열었다.
수많은 서랍 중에 ‘수면초’라 적힌 서랍을 열었다.
서둘러 수면초를 빻을 도구와 차를 내릴 다기를 챙겨 침소로 향했다.
여전히 방안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비가 들고 온 초롱불을 탁자 위에 놓았다.
어룽거리는 불빛 아래서 수면초의 제일 작은 잎 하나를 따서 공이에 넣었다. 이걸 곱게 빻아서 찻물에 타주면 되는 거였다.
“더.”
침상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칫한 가비가 대각선 쪽으로 힐끔 돌아봤다.
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수면초를 더 넣으라는 얘기였다. 가비가 수면초의 작은 잎 하나를 더 따서 넣었다.
“더 넣어라.”
다시 명령이 떨어졌다.
더 넣으라고?
이 정도 양이면 그냥 불면증이 아니라 만성수준이었다.
망설이던 가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더 넣으면…,”
“더.”
위압적인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하는 수없이 수면초의 잎을 하나 더 뜯었다.
“그냥 거기 있는 거 통째로 넣어.”
미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가비가 저도 모르게 휙,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놀란 숨을 삼켰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틀림없는 반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