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신- 낮과 밤의 신부-14화 (14/95)

[14화]

가비는 생각했다.

이곳에 너무 빨리 적응하는 거 아닐까?

아마도 그럴 수 있는 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다른 듯하면서도 묘하게 비슷한 점도 많기 때문이었다.

음. 오늘은 고구마가 잘 쪄졌네.

오늘 아침밥은 나물 반찬 몇 가지와 고깃국, 그리고 노랗게 찐 고구마였다.

눈에도 익숙하고 입에도 익숙한 식단이 매일 같이 나왔다. 꼭 학교 급식처럼.

덕분에 좋은 음식들로 삼시 세끼를 꼬박 챙겨 먹으니 건강해진 기분이었다.

가비가 식판을 깨끗이 비우고 고구마를 먹고 있을 때였다.

여기저기서 자신을 힐끔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호기심 반, 질투심 반.

어젯밤 일로 한순간 관심의 대상이 돼버린 듯했다.

괜한 짓을 했나.

하지만 가비에겐 별거 아닌 일이었다. 이들이 믿는 음과 양의 조화 따위, 가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해와 달이 주는 길조와 흉조라니.

어디 구전 동화에나 나올 법한 케케묵은 얘기였다.

어쨌든 자다 깬 것도 싫고 추운 건 더 싫어서 그냥 지원한 것뿐이었다.

그게 이렇게까지 시선을 끌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은갑아, 안녕!”

그때 식사를 먼저 마친 연화와 그 무리가 가비를 향해 다가왔다.

“어, 연화야. 밥 잘 먹었어?”

“응. 오늘 고구마 맛있더라.”

“그러게.”

요 며칠 연화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자연스럽게 먹고 있던 고구마로 시선을 내렸는데, 연화가 스리슬쩍 물었다.

“은갑이 너, 음궁 약방 숙직실에 지원했다며?”

그 말에 살며시 시선을 들자, 이게 웬일. 자신을 바라보는 연화의 눈에서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헐.

놀란 가비가 다시 고구마로 눈을 내렸다. 여기저기에서 쑥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화는 남자 의학도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일 많았다.

심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냥 한 거야. 별생각 없이.”

가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화는 자리를 뜨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솔직히 남이 하기 싫은 걸 내가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아마 스스로 지원해서 음궁 약방에 가는 건, 은갑이 네가 처음일걸? 그동안은 제비뽑기로 가거나 어의님들이 지정해주셔서 간 거로 알고 있어.”

맙소사. 그게 그렇게 싫다고?

이쯤 되니 야왕이란 존재가 정말 짠해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은갑이 너 진짜 대단해. 남자답고 멋져. 거기다 겸손하고.”

“하…, 하하.”

넘치는 칭찬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더는 따가운 눈길을 견딜 수가 없어 남아있던 고구마를 급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맞다! 나 할 일 있는데. 그럼 오전 수업 잘 들어. 난 이만.”

서둘러 식판을 반납대에 올리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연화와 무리가 쪼르르 따라나왔다.

“…갑아! 은갑아!”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밝은 햇살 아래 연화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업시간까지 여유 좀 있잖아. 후식 먹으러 다과방에 가지 않을래? 어제 배운 것 중에 뭐 물어볼 것도 있고.”

괜스레 공부를 핑계 대지만 가비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시그널이라는 걸.

저쪽 세계에서 은영에게 숱하게 들었던 그린라이트라는 걸.

모태솔로인 가비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연화의 반응은 명백했다.

“미안. 내가 지금 어디 가야 해서.”

“어디?”

“서고. 빌린 책을 반납해야 하거든.”

가비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보란 듯이 흔들며 연화에게서 멀어졌다.

“나중에 보자.”

“…은갑아!”

저만치 뛰어가는 가비의 모습을 연화가 아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서고에 간다면서 왜 저쪽으로 가지?”

“그러게?”

정반대 길로 가는 가비를 보며 연화와 무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그 길로 가비는 줄행랑을 치듯 내달렸다. 이 이상 눈에 띄는 건 곤란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저쪽 세계로 돌아가는 것. 가비가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공부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숙식 해결을 위해서였지, 재미와 흥미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휴우….”

꽤 먼 거리를 짧은 시간 안에 도달한 가비가 서고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서님, 저 왔습니다!”

자신이 온 것을 알리며 서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책상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가셨지? 식사하러 가셨나?”

책만 두고 그냥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본 가비와 현의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사서님!”

헌데 현의 뒤로 십 수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마치 현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르는 자들 같았다.

의아한 눈길로 보자, 당황한 기색을 감춘 현이 곁에 서 있는 장곡을 향해 눈짓했다.

장곡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가비가 시종들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예요?”

“서고를 청소하는 사람들.”

“아아.”

저렇게 인원이 많은 걸 보니 오늘이 대청소하는 날인가보다.

“이리로.”

현이 가비를 이끌고 책상 뒤편으로 향했다. 휘장을 걷자 그 안에 안락한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와- 이런 곳도 있어요?”

가비가 신기한 듯 눈을 굴렸다.

크고 푹신한 비단 방석과 작은 찻상. 그 위에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다과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서고를 찾는 누군가와 때때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앉거라.”

현이 찻물을 내려주었다.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복장이 좀 다르시네요? 머리 모양도 그렇고.”

오늘 본 현은 평소와 달랐다.

고풍스럽고 정갈한 남빛 옷에 세밀하게 수가 놓인 허리띠. 그와 맞추어 머리를 틀어 올린 상투관도 반짝이는 금빛이었다.

“왜? 이리 꾸민 것이 보기 더 좋으냐.”

현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가비가 차를 홀짝이며 답했다.

“어차피 미남은 뭘 해도 미남이죠.”

“뭐?”

“머리를 풀어헤쳐도 틀어 올려도, 잘 생기면 다 잘 어울리잖아요.”

“하.”

현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놓고 찬사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 눈에도 제 외모가 썩 괜찮아 보인다는 뜻 같아서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가비를 따라서 현도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아침 일찍부터 여러 가지 보고를 받느라 목이 깔깔하던 참이었다.

“빌려 간 책을 반납하려고요.”

가비가 들고 있던 책을 찻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접시 위에 있는 작은 약과 하나를 집어 입에 쏙 넣었다.

오물거리는 그 입술이 참으로 귀엽고 도톰했다. 사내답지 않게.

가비의 입술에서 시선을 뗀 현이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녁에 오지 않고.”

현도 여러모로 저녁 시간이 자유롭고 좋았다. 오전에는 논의해야 할 일이 많았고, 오후에는 쌓인 업무를 처리하고 무예 수련을 해야 하는 등 일정이 빡빡했다.

그러니 지금 서고에 들리다 가비를 만난 건 운 좋은 우연일 뿐이었다.

“실은 오늘 저녁부터 시간을 낼 수 없거든요.”

“어째서?”

“오후 수업이 끝나면 음궁으로 가야 합니다.”

“음궁?”

“예. 제가 실습 장소로 음궁 약방을 지원했습니다.”

“지원하였다고?”

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니까 별다른 일이 없으면 숙직실에서 편히 쉴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양궁과 음궁, 그리고 천태비궁에는 그들을 보필하는 약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지정된 주치의가 머물며 그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약초 사용 등을 기록했는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딱히 신경 쓸게 없는 곳이라고 했다.

게다가 숙직실에서 머물 땐 혼자 방을 쓸 수 있으니 가비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두렵지…, 않느냐.”

혹시나 모두 꺼리는 곳을 가비가 억지로 가게 된 거라면 뒤에서 손을 써줄 생각이었다.

허나 가비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겁날 게 뭐 있다고요. 음궁에 계신다는 야왕님도 사람일 텐데.”

가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허나 이처럼 음궁에 들어가는 것을 가벼이 생각하는 이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가비가 처음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서고에 못 올 것 같아요.”

현은 어쩐지 그 말이 서운하게 들렸다.

“참!”

가비가 남은 약과를 입에 넣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무어냐.”

“건강인형이요.”

사실 인형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젯밤 급하게 베갯솜을 조금 빼서 면포로 둘둘 말아 머리와 몸통만 만들었을 뿐이니까.

그래도 와중에 눈코입은 붓으로 그려 넣었다.

“예전에 저희 할아버지가요, 제가 배탈이 나거나 어디가 아프면 이 건강인형을 손에 쥐여 주셨거든요. 아픈 곳이 있으면 얘가 다 가져가 준다고.”

그 밖에도 걱정인형, 소원인형 등 가비의 방엔 많은 인형이 존재했다.

아직도 저쪽 세계, 제 방 책상 위를 장식하고 있을 인형들. 그 인형들이 생각났다.

“책 빌리러 올 때마다 편하게 대해주시잖아요.”

가비는 그게 참 고마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세계에서 허물없이 얘기하고 어울린 사람은 사서 현뿐이었다.

“제가 아직 어의는 아니라서 사서님께 드릴 만한 약은 함부로 처방해드릴 수 없지만…. 뭔가 감사한 마음은 전하고 싶어서요.”

가비가 ‘별거 아니지만 받아주세요.’라며 현의 손을 펼쳐 그 위에 인형을 올렸다.

스치듯이 닿은 손길과 온기에, 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오전 수업이 있어서.”

가비가 꾸벅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그제야 현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비를 불렀다.

“…은갑아!”

처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가비가 돌아보았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에 든 인형을 꼭 쥐었다.

“아니다…. 가보거라.”

가비가 싱긋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현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잠시 후.

서고 어딘가에서 장곡이 나왔다. 현이 쥐고 있는 인형을 달라며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천자 현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라면 액운을 떨치는 정화수를 뿌린 뒤 전해져야 했다.

허나 현은 인형을 넘기지 않았다.

“그냥 두어라.”

장곡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은 끝내 손에 쥔 인형을 주지 않았다. 굳이 가비의 마음이 담긴 것을 다른 것으로 덮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보잘것없는 면포 솜 뭉치라 해도, 여기에 담긴 그 마음은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마터면 말할 뻔하였다.”

내가 천자라고.

이제 와서 밝히자니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준 아이에게 속였다는 배신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생겼다.

음궁이라….

현의 눈빛이 태황궁의 음지에 있는 음궁으로 향했다.

음궁이 두렵지 않다는 가비의 말이 거짓이길 바랐다.

해서 같은 시간 다시 서고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