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전화가 끊어지고 잠시 뒤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계속 신경을 쓰는 다연과 달리 자혁은 메시지조차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진 회장님이랑 친해?”
갑자기 훅 들어온 물음에 다연은 입을 앙다물었다.
“내 말은, 개인적으로 만나도 될 정도의 사이냐고 묻는 거야.”
“왜 그걸 물어보는 거예요?”
자혁은 굳은 얼굴로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 접시를 다연의 앞에 놔주었다.
“그날 진 회장님이 당신한테 손을 내밀려다 거두시는 걸 봤어.”
다연도 아차 싶던 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혁도 놓치지 않았다.
“당신 만나고 싶으시대.”
“저를요?”
“당신만, 보내래.”
자혁은 못마땅한지 유독 ‘당신만’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진 회장님과 친해요?”
“왜?”
“원래 장난이 많은 분이긴 한데. 당신하고도 많이 편해 보여서요. 부부 동반으로 가 본 곳이 많지는 않지만, 나이 지긋한 회장님들도 당신을 편하게 대하지는 못했어요. 다들 눈치 보셨지.”
자혁이 알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랬나?”
“다들 티 나게 당신 눈치 살폈어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자혁의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진 회장님 뵈러 갈게요.”
자혁이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다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날 인사도 없이 온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어요. 그리고 직접 부르신 거면 하실 말씀이 있는 거겠죠.”
자혁은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쩌면… 도와줄 일이 있는지 살피시려는 거일 수도 있어요. 소문으로 돌고 있는 이야기들… 진 회장님도 들으셨을 거예요.”
무덤덤하게 말하는 다연 때문에 속이 타는지 자혁이 물을 벌컥 마셨다.
빈 컵을 내려놓으며 자혁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일이라면 내 선에서 처리해.”
“알아요.”
다연은 담백하게 말했다.
다연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날부터 지금까지 자혁은 제 선에서 많은 일을 처리했다. 다연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고맙지만, 마음 한쪽이 불편한 건…… 두 사람의 시작이 된 계약서 때문이었다.
그와 한집에 살고, 같이 밥을 먹고 잠자리를 가져도 다연의 마음속에 ‘선’이 존재했다.
그래서 다연은 진 회장을 만나고 싶었다.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일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갈래요.”
다연은 자혁이 잘게 썰어 준 고기 한 점을 포크로 찍어 그의 입 앞에 내밀었다.
“맛있어요. 당신도 먹어봐요.”
다연이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자혁은 다연의 웃음이 어색한 것을 알아챘다.
다연이 내민 것을 받아먹고선 자혁도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자혁도 다연도. 진 회장이 아무 이유 없이 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연은 가야 했다.
* * *
사흘 뒤, 다연은 난 화분이 즐비한 진 회장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진 회장이 애지중지해서인지 꺾어진 잎사귀 하나 없이 모두 초록빛 윤기가 흘렀다.
개중에 화분 몇 개에 꽃이 펴서 은은한 난 향이 집무실에 퍼져 있었다.
진 회장이 선물 받은 좋은 차라며 자랑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한주연이 찾아왔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 회장이 아무 이유 없이 다연을 불렀을 리는 없다는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주연이 진 회장을 찾아왔을 거라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주연이 진 회장을 찾아와서 했을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다연은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다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진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 인간들 안하무인인 거 하루 이틀도 아니잖니.”
진 회장이 다연을 혼자 부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다연이 걱정되어서였다.
“네가 어떻게 구 사장이랑 결혼하게 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야. 기자 한 명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 거 같더라만.”
다연은 확신했다. 진 회장이 알고 있는 내용 모두 자혁도 알고 있을 거라는 걸.
“내가 부른 이유는.”
긴장감으로 다연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살며시 말아 쥐었다.
“네 부친이 사고 나기 전날. 나를 찾아왔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다연의 눈이 커졌다.
진 회장은 소파 옆에 둔 밀봉된 봉투 하나를 다연에게 내밀었다.
“나에게 이걸 맡기고 가더구나.”
“아버지가요?”
진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너에게 이걸 주라더구나.”
다연은 밀봉된 봉투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이라면 2년 도 더 된 일이었다.
게다가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알았던 사람처럼 말한 것이 의아했다.
“무엇이 들었는지 말씀하시던가요?”
“모른다. 물어봐도 말하지 않았고 꺼내 보지도 않았으니까.”
주연이 찾아온 이유가 이 안에 든 걸 달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까… 한주연이 찾아왔다고 하셨는데. 이거 때문인가요?”
“아니다.”
진 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귀한 난 화분을 하나 들고 와선 신규 호텔 건설 건을 마석 건설이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왔다만. 너와 연락하는지 살피더구나.”
주연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화끈거리던 얼굴이 이제는 몸 전체로 퍼졌다.
다연은 진 회장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도 살며시 떠봤더니 네 부친이 사고 나기 전에 나를 만난 것은 모르는 눈치였다. 알았다고 해도 사업상 만났겠거니 생각했을 테고.”
다연은 사고 전 부친의 행보가 평소와 달랐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네 부친이 나에게 이걸 맡긴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한다.”
만약 어떤 어려움이 생긴다면 다연이 찾아갈 사람 중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골랐을 것이다.
그중 입이 무겁고 다연을 도와줄 힘이 있는 사람을 골랐다면 진 회장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친 모두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부친의 사업상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사람도 진 회장이었을 테니까.
다연은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봉투를 열어보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조심하거라. 아마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을 거다.”
진 회장은 다연이 걱정되어 당부했다.
다연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또다시 주연을 피해 다녀야 하는 것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 여기 진성 호텔에서 만나자마자 뺨을 맞은 것도 모자라 자유롭게 다니는 것도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억울했다.
다연은 진 회장이 내민 봉투를 다시 쓱 밀어냈다.
“죄송하지만, 제가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보관해주세요.”
“지금 열어보지 않고?”
“네.”
다연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한주연을 만나볼 생각이에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나는 게 휘말리지 않을 거 같아서요.”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진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굳어 있던 진 회장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진 회장은 붉은색 봉투 하나를 다연에게 건네주었다.
“전시회 초대장이다.”
다연은 봉투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았다. 이름을 보곤 반가움에 눈이 곱게 접혔다.
“사모님 드디어 개인전 하시네요.”
“취미로만 하라니까……. 일이 커졌다. 집에 묵향이 진동한다. 개인전 할 정도 되면 작업실 만들어 내쫓겠다고 했더니. 죽자 살자 그릴 줄 누가 알았겠니.”
말은 귀찮게 되었다는 듯했지만,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근히 좋아하시면서 자랑하는 거 티 나요.”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거야.”
다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진 회장의 부인은 다연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취미로 수묵화를 그리던 것이 어느새 개인전을 열 정도라니.
다연은 초대장을 보며 감회가 남달랐다.
“자혁이가 잘해주느냐?”
자혁의 이름 하나에 다연의 미소가 더 커졌다.
“그 녀석 좀 무심한데……. 나쁜 녀석은 아니다.”
“구자혁 씨랑 많이 친하신 거 같던데.”
“내 장난에 하도 당해서 웬만하면 피하려 들어. 아주 괘씸해.”
진 회장은 괘씸하다면서도 입술을 보기 좋게 휘어 있었다.
그의 행동도 귀엽게 봐주고 넘어가는 걸로 보였다.
세상에 구자혁을 귀엽게 보는 사람도 있다니. 돌아가신 구 회장에 이어 두 번째였다.
다연은 자혁이 진 회장의 전화를 받지 않던 것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몸은 여전한 거야? 차도는 없고?”
진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티에 온 날 다연이 자혁의 손을 잡은 것을 진 회장도 보았을 것이다.
다연은 아직 확신은 없었지만, 진 회장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회장님, 저랑 악수 한번 해주세요.”
“그래도…… 돼?”
“아직…… 확신은 없어요.”
조금 차도가 있으니 약수를 하자고 하는 거 같아 진 회장은 다연의 작은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잡은 손에 고정되었다.
“괜찮은 게지? 응?”
“네…… 괜찮네요.”
진 회장은 양손으로 다연의 손을 잡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진 회장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손을 잡아도 괜찮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났다.
아직 모든 사람과 피부가 닿아도 괜찮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전처럼 위축되지는 않았다.
전시회 날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다연은 진 회장의 집무실을 나왔다.
* * *
진 회장을 만나러 가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자혁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퇴근했다.
자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연의 표정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무슨 말씀 하셨어?”
자혁이 물어볼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연은 진 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혁에게 말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말할 것은 자혁이 조사하면 알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은 그가 조사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기준을 두었다.
“한주연이 찾아왔었대요.”
“뭐?”
자혁의 반듯한 이마가 일그러졌다 펴졌다.
“새로 건설 예정인 진성 호텔 공사에 관심 있나 봐요.”
“그게 다야?”
자혁은 그것 외에 다른 것도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랑 연락하는지 떠봤었나 봐요.”
“그렇다고 진 회장님까지 찾아가다니. 간도 크구만.”
자혁은 재킷을 벗어 소파에 툭 던졌다.
“그거 외에는? 더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