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한다연이라고 전해주세요.”
보안 요원이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다연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머쓱해진 다연이 보안 요원을 따라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혁의 사무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갈수록 괜히 온 것은 아닌지 후회가 몰려왔다.
다시 돌아갈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로비도 아니고 엘리베이터에 탄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이 실장이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셨어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연은 조금 긴장되어 숨을 들이마시며 이 실장을 따라갔다.
-똑똑.
가벼운 노크 후 이 실장은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잡아끄는 힘에 다연은 그대로 끌려가 안겼다.
놀란 것도 잠시 익숙한 진한 우드 향에 잔잔히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좋다.”
그의 말에 염려했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바쁜데 방해한 거 아니에요?”
“경수가 좋아해.”
경수라면 다연도 알고 있는 그의 친구였다.
요즘 다연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미’를 개발해준 사람이라 경수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 중이었다.
다연이 온 게 경수에게 좋은 일인가?
“지금 모델하우스에 설치한 거 테스트하러 갔어. 7시에 테스트 보고 받을 예정이었는데 그대로 퇴근하라고 했거든.”
“방해한 거 맞네요.”
“악덕 사장 이미지를 지울 기회를 준 거지. 당신이.”
7시 보고라니.
퇴근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간에 보고는 생각만으로도 싫을 거 같았다.
“내 욕은 만 자씩 매일 꼬박꼬박 쓸 수 있대. 경수가.”
“저런… 어쩌다 그 지경이 된 거예요?”
“먹고 사느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선 다연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씩 엄청나게 고생한 사람처럼 자혁이 말할 때가 있었다.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는 재벌이라니. 참신할 때도 있었다.
“그럼, 언제 퇴근해요?”
다연은 자혁의 가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금.”
이렇게 쉬운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고 전화만 할걸.
“나가기 전에…….”
자혁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테스트도 없이 그가 곧장 입을 맞춰왔다. 입술이 맞물리고 서로의 숨결이 뒤섞였다.
다연의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발끝이 들리고 고개가 뒤로 꺾였다. 중심을 잡기 힘든 다연이 자혁에게 매달리자 그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로의 피부가 닿아 있어서 느끼는 감각들에 흥분이 배가 되었다.
“하아.”
잠깐 자혁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다연이 가쁜 숨을 색색 내쉬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혁의 눈에 욕망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다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옆집에 한번 놀러 가 볼 생각 없어?”
옆집이라면 한강 호텔이었다. 자신의 전용 룸이 있다고 했던.
거기에서 놀러 가자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다연은 아둔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그의 눈빛에 심장이 저릿했다.
“지금요?”
“지금.”
자혁은 다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다연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그를 따라갔다.
* * *
자혁의 손을 잡고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주변의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지배인한테 자혁은 한 손을 들어 보이며 거절했다.
사장이 여자를 데리고 호텔에 나타난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 주변이 술렁였다.
여름이 시작되어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는 늦은 오후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고 호텔로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붉어진 채.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바라볼지 뻔했다. 그 시선을 무시할 정도로 다연은 뻔뻔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봐요.”
다연이 그의 등에 몸을 숨기며 기어서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라 그래.”
다연이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진지한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자혁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다연의 손을 잡은 이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나는 급해.”
이번에도 민망함은 다연의 몫이었다.
* * *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맞물린 입술이 사정없이 뭉개졌다.
깊숙이 파고들어 입 안을 훑는 거친 숨결이 벅찰 정도로 뜨거웠다.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졌다.
그와 몸을 섞은 것이 처음도 아닌데 다연이 스스로 느낄 정도로 몸이 떨려왔다.
다연을 배려해 천천히 몰아붙였던 자혁이 오늘은 달랐다. 거칠었고, 뜨거웠다.
언제 어디서든 서두르는 것 없이 능숙하게 행동하던 구자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속을 알 수 없던 눈빛에 담긴 욕망이 보였고, 그를 그만큼 흔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짜릿했다.
다연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선 그의 입맞춤에 녹아 들어갔다.
점막과 점막이 비벼지고 혀가 얽혔다. 입술이 물릴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아찔한 감각에 다연은 자혁에게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폭주하는 자혁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키스하며 자혁의 손이 다급하게 다연의 옷을 벗겨 냈다. 매번 냉정하면서도 능숙하게 행동하는 자혁이 셔츠 단추를 푸는 대신 한 번에 뜯어버렸다.
-후드득
천에서 단추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다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다시 입술이 포개지고 입술이 뭉개졌다. 더운 숨이 훅 밀고 들어와 열기로 들끓는 몸을 더 달뜨게 했다.
“하아.”
자혁의 입술이 미끄러지듯 아래로 목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세게 움켜쥔 가슴이 그가 힘을 주어 잡을 때마다 심장이 잡힌 듯 숨이 막혔다.
더 참기 힘들었는지 자혁이 몸을 일으켰다. 비닐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몸을 겹쳐 온 자혁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아.”
심장까지 파고들어 온 거 같은 감각에 다연은 자혁을 꼭 안았다.
더운 숨이 섞인 신음이 침실 가득 울렸다.
겹쳐진 몸이 마구 흔들렸다. 그때마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자혁은 다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다연의 표정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열기로 붉어진 얼굴, 참지 못하고 내뱉는 신음이 미치도록 좋았다.
웃을 때도 예쁘던 여자가 지금은 미치도록 예뻐서 심장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다연을 안을 때마다 보는 이 표정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다연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물기가 새어 나왔다.
혀로 핥으니 단내가 훅 밀려 들어왔다. 다연의 눈이 보고 싶었다.
“한다연. 눈 떠.”
“하아.”
“날 봐.”
오만한 목소리에 다연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자신을 보는 맑은 눈이 열기에 붉어져 있었다.
“돌겠군.”
자혁은 바스러질 거 같은 다연의 가녀린 몸을 힘을 주어 꼭 안았다.
* * *
단단한 팔에 안긴 채 다연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자혁의 입술이 닿는 순간 거칠 숨도 함께 느껴졌다.
“괜찮아?”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넘 일찍 물어보네요.”
자혁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무엇이 자혁을 폭주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회사로 찾아오는 것부터 잘못인 거 같았다.
“회사로 갈 때마다 이러면….”
“자주 와.”
“누구 좋으라고요?”
“직원들. 사장이 땡땡이치니까.”
다연이 자신의 어깨를 휘감은 자혁의 팔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리자 그가 웃는지 등에서 진동이 울렸다.
너무 힘들어 졸리기도 하고 격렬한 몸짓 때문에 허기지기도 했다.
“배고파요.”
“룸 서비스시킬까?”
호텔 직원을 룸 안에서 마주치는 것은 싫었다.
“나가서 먹어요.”
“힘들지 않겠어?”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다연은 나가고 싶었다.
“우리 그거 먹어요.”
“뭐?”
“게국지 먹느라 못 먹었던 거요.”
바로 여기 호텔 라운지였으니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고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연의 잔머리를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자혁이 말했다.
“룸에서 먹자.”
“아니, 가서 먹을래요.”
“예약하지도 않았는데 테이블 내놓으라고 막 갑질해? 아무리 사장이어도 그건 아니지.”
구자혁이라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본인의 지위를 필요에 따라 참 유용하게 활용했다.
“얄미워.”
“자주 듣던 말이야.”
자혁을 충격에 빠트리는 말이 있기는 할까 싶었다.
* * *
샤워하고 샤워 가운을 입었다.
양평 리조트와 달리 이곳에는 여자용 가운도 있었다. 다연은 가운 끈을 칭칭 동여매고선 거실로 나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거실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다. 코스 요리를 한 번에 다 가져다 놓은 거 같았다.
다연은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앉아.”
급한 연락이라도 온 것인지 자혁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다연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날 먹으려던 거.”
자혁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연은 스테이크가 아닌 디저트로 향해 손을 뻗었다. 상큼한 향이 침샘을 자극했다.
“밥 안 먹고 아이스크림부터 먹겠다고?”
“그러면 안 돼요?”
“안 되긴.”
꼭 허락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밥 먹기 전 어른의 허락을 받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는 아이가 된 거 같았다.
자혁과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도 4살인데.
매번 그는 어른 같고, 다연은 자혁의 앞에서 아이가 되었다.
툭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간식을 먹이고, 조금 야한 칭찬도 해주었다.
다연이 셔벗을 한입 먹고선 양손을 흔들었다.
“넘 맛있다.”
허기진 상태에서 맛본 맛있는 셔벗은 금세 바닥이 보였다.
자혁은 자신의 디저트로 다연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먹어.”
먹어도 되냐고 묻지 않고 다연은 덥석 받았다.
다연이 두 번째 셔벗도 다 먹어 치웠을 때 자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Rrrrrrrrr.
발신자를 힐끔 본 자혁의 인상이 구겨졌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어 본의 아니게 다연도 발신자를 보게 되었다.
[이박 삼일 어르신.]
다연은 적당히 식은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자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화 안 받아요?”
“받으면 안 돼.”
자혁이 어르신이라고 저장한 사람이면 말 그대로 어르신일 텐데 왜 받으면 안 된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