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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76)

31화

절대 편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서류상 남편과 늦은 오후의 여유로운 산책은 다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색함에 자꾸 뒤에서 걸으려고 하는 다연에게 맞춰 자혁이 속도를 늦췄다.

“내 등만 볼 건가?”

“바다도 보고 있어요.”

그가 긴 팔을 뻗어 다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방향을 잃은 다연의 팔을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다연이 그를 올려다보자 오후의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반짝였다.

“이제는 얼굴만 보려고?”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할지.

“산책하자며.”

그가 자연스럽게 다연을 이끌며 걸었다. 간간이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대부분 말없이 걷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걷는 생소한 경험 중이었고, 다연은 떨림과 편안함을 느꼈다.

“한여름에도 여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지금처럼 늦은 오후에 걷기 좋아. 바닷속이 조금 더 투명하게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적당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상쾌한 바람 속에 울렸다.

“가을에 바다색이 조금 더 짙어지면서 맑아. 청명한 가을 하늘과 어울려.”

다연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겨울에는 동백꽃이 많이 피는 섬이 좋고.”

다연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가 말한 동백꽃이 핀 섬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스치듯 했다.

지혜의 말처럼 다연은 꼭 떠나고야 말겠다는 사람처럼 자신의 출국 시기를 가늠해보았다.

“봄은 왜 이야기 안 해줘요?”

그가 다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궁금해하라고.”

“말 해줬다고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 궁금할 수도 있죠.”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꼭 보고 싶게 이야기하는 사람 있잖아요.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도록.”

“생생하게 말하는 재주는 없어. 궁금하면 봄에 와서 봐.”

“대표가 이러면 리조트 홍보는 어떻게 해요?”

“직원들이.”

아, 구자혁 씨가 뽑아서 일 잘한다는?

“알 만하네요.”

다연의 말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그는 바다 쪽으로 다연을 이끌었다.

여름이 오지 않은 평일 오후의 바다에 인적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등대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니 다연은 스케치북 위에 담아내고 싶었다.

등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다연이 손에 들고 있는 파우치를 만지작거렸다.

꼭 그림을 그리겠다는 뜻으로 파우치를 들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림 도구와 약이 든 파우치를 항상 들고 다니는 것은 일종의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연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림 그리고 있어. 나는 커피 사 올 테니까.”

“네.”

뒤돌아 왔던 길을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연은 살며시 웃고 그림 도구를 펼쳤다.

엽서지와 A5 사이즈 스케치북을 펼쳤다. 워터브러쉬를 꾹 눌러 물을 한 방울 떨어트리며 다연은 조금 전 자혁의 뒷모습을 하얀색 종이 위에 그리기 시작했다.

예정에 없었던 ‘연인’ 일러스트북에 들어갈 그림 한 컷이 더 완성되었다.

물감이 마르도록 한쪽에 놓아두고 다연은 엽서지에 바다 풍경을 그렸다.

“남자 친구예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다연이 고개를 들었다.

휠체어를 탄 낯선 여자가 물감이 마르게 놓아둔 그림을 호기심 가득 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사랑이 담겨 있는 거 같아서요.”

“아, 네.”

다연은 조금은 모호하게 대답하며 수줍게 웃었다.

그림을 그릴 때 누군가 구경하듯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듯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처음이라 민망했다.

“그림 여행 중이에요? 혼자?”

적극적인 물음에 다연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 호객 행위를 하거나 이상한 데 끌고 가려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여기 처음이니까요.”

다연이 경계하는 눈빛을 보았는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남편이랑 왔어요. 지금은 커피 사러 갔고요.”

“배려하는 마음이 예쁜 남편이군요.”

“네?”

계속 그림에 머물던 여자의 시선이 처음 다연의 얼굴에 닿았다.

“편하게 그림 그리라고 자리 피해준 것도, 이런 풍경 보면서 부인과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도 예쁘다고요.”

다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여자는 다연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한 번 바라보곤 바다를 바라보았다.

“혼자 여행 오신 거예요?”

“혼자는 맞고, 여행이 아니라 일 때문에 왔어요. 아쉽게도.”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었고 잠깐의 대화였지만, 그녀가 굉장히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여기를 추천해 준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잠깐 보러왔어요.”

“그러셨군요.”

“매 계절마다 바다색이 다르다고 하는데…….”

자혁도 같은 말을 했었는데.

“바다색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역시 이런 풍경을 보는 건 내 취향이랑 안 맞네요. 바빠서 이만 실례할게요.”

여자는 미련 없이 휠체어를 돌렸다. 그리곤 오른손을 흔들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조심히 가세요.”

정말 바쁜지 여자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는 여자를 보며 다연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는 자혁이 보였다.

다연은 그가 오기를 기다리며 두 장의 그림을 더 그렸다.

저벅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다연은 스케치북을 덮어 그림을 숨겼다.

자혁은 커피뿐만 아니라 장 여사가 싸준 샌드위치도 가져왔다.

“샌드위치 먹기 딱 좋은 장소라서.”

등대를 등지고 앉아 두 사람은 바다를 보며 나란히 앉았다.

다연은 자혁이 건네주는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한입 물었다. 그가 옆에 놓아둔 커피까지 한 모금 마셨다.

맑고 푸른빛의 바다와 적당한 파도 소리, 그리고 상쾌한 바람.

이 경치에서 무엇을 먹어도 맛있었겠지만, 조금 허기진 상태여서 다연은 순식간에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안 가져왔으면 어쩔 뻔했어.”

그는 무심하게 샌드위치가 담긴 도시락을 다연에게 쓱 밀어주었다. 다연은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는 늘 이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다.

퇴근하면서 사다 주는 간식도 먹었는지 맛은 어땠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매번 다연에게 무언가를 든든하게 먹이려는 사람 같았다.

다연은 자혁을 바라보았다. 긴 다리를 한쪽 다리 위에 걸쳐놓고 한쪽 팔을 벤치 의자 등받이에 올린 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림 속에 그림이 앉아 있는 것처럼 그는 이질감이 없었다.

너무 오래 바라보아서인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멋있는 풍경 두고 나만 보고 있네.”

“그러게요. 자꾸 눈길이 가네요.”

조금 민망해진 다연이 커피를 마셨다.

“이유는 하나야.”

웃음기가 담긴 그의 목소리에 다연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당신 눈에 바다보다 내가 더 멋있는 거지.”

왜 매번 부끄러움은 다연의 몫인지 모르겠다. 다연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인정하기 힘든 얼굴이네.”

“다른 건 모르겠고, 당신이 정말 뻔뻔하다는 건 인정하는 바에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바닷바람에 잔잔히 실려 왔다.

다연은 슬며시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커피를 마시는 척 가렸다.

“자혁 씨는 매번 나에게 뭘 그렇게 먹이려고 하는 거예요?”

다연이 도시락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들고선 자혁에게 물었다.

자혁도 긴 팔을 뻗어 샌드위치를 들고선 툭 던지듯 말했다.

“사진.”

“사진이 왜요?”

“뭘 먹는 사진이 한 컷도 없었어.”

그의 사무실에서 다연이 보았던 사진을 말하는 거 같았다.

“그게 왜요?”

“늘 혼자 먹었겠구나 싶어서.”

예상 밖의 대답에 다연은 목이 메는 것만 같아 손에 든 샌드위치를 먹지 못하고 들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주연과 계모가 쫓아올 거 같아 겁이 나서 집에서 혼자 식사를 했었다. 거처를 옮기면서 쫓기는 거 같은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식당에서 혼자 무언가를 먹는 게 어색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 정도가 다연이 밖에서 무언가를 먹는 전부였다.

다연은 속내를 들킨 거 같아 억지웃음을 지었다.

“점점 살이 빠진 사진이 보기 싫기도 했고.”

“다이어트 중이었어요.”

그가 다연을 돌아보았다.

“농담에는 소질 없다고 했던 거 같은데.”

자혁이 샌드위치를 다연을 향해 슬쩍 들어 보였다.

“들어, 그림 그리려면.”

“네.”

“꼭꼭 씹어, 커피도 마셔주면서.”

“……네.”

다연은 맛있는 샌드위치를 꼭꼭 여러 번 씹어 넘겼다.

* * *

푸른빛 바다가 석양으로 물들 때 다연은 붓을 놓았다.

등대 난간에 양팔을 올려두고 기댄 채 바다를 보던 자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 풍경도 멋있는데 그림 안 그려?”

“때로는 스케치북보다 눈에 담아둬야 하는 풍경도 있거든요.”

“지금이 그때라는 말인데.”

자혁이 몸을 일으켜 세워 다연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가 다연의 뒤에서 서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건…… 뭐예요?”

“바닷바람에 날아갈까 봐.”

“풋.”

다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하게 안고 싶었다고 말할 걸 그랬나?”

그가 고개를 숙여 다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말을 들어도 하나는 확실해요.”

다연이 살며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석양으로 물들어갔다.

“둘 다 엄청 민망했을 거라는 거요.”

그가 낮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가슴의 떨림이 등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다로 고개를 돌린 다연 얼굴도 석양에 물들어갔다.

“나는 겨울 석양이 가장 마음에 들어.”

다연은 거의 매일 해 질 녘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림 그릴 때 색감 때문에 보던 것이 어느새 다연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여러 나라의 도시에 머물렀지만, 다연은 가을의 석양이 가장 좋아했었다.

“가을이 아니고요?”

“개인 취향은 존중해주자고.”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연을 안은 팔에 자혁이 힘을 주었다.

다연은 손을 들어 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쪽.

다연의 손등에 입술이 찍혔다.

“이건 뭐예요?”

“일종의 테스트.”

“테스트요?”

다연이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였다.

“로션이나 그런 거 테스트로 손등이나 손목 안쪽에 발라보잖아. 내가 입을 맞춰도 되는지 당신을 만져도 되는지 테스트야.”

“손은 발진이 덜 한 곳인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혁은 다연의 손목을 잡아서 안쪽에 입술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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