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자혁의 눈썹이 조금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약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당신 얼굴 쓰다듬은 손이 조금 가려워요.”
짙은 눈이 걱정스럽게 다연을 바라보았다.
다연이 그의 입을 가렸던 손을 떼고선 손바닥을 그에게 펼쳐 보였다.
“이 정도는 찬물로 씻으면 가라앉는 정도고요.”
“고문이다.”
“그렇게 미안하고 안쓰럽게 보진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번 진성 호텔 창립 파티에서는 얼굴까지 엉망이 되는 한마디로 괴물 같은 몰골을 보여 주었지만, 더는 지금과 같은 눈빛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 병이 생긴 이후로 처음이었어요. 괜찮은 사람.”
“나 말인가?”
“네. 괜찮았다가 안 괜찮았다가 그래요.”
다연을 안은 팔을 풀며 자혁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 안고 뒹굴뒹굴하고 싶었는데.”
다연의 얼굴이 금방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어떨지 생각 안 해봤어요?”
“뻔뻔해져. 그러면 돼.”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본 적이 없는데 한순간에 뻔뻔해지는 게 되겠어요?”
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오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뻔뻔하게 같이 들어가고 싶다.”
* * *
주방으로 나오자 진한 커피 향에 다연의 입술이 보기 좋게 휘었다.
구자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식탁에 앉아 태블릿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마치 수채화 속에 유화 물감으로 그려진 거 같은 모습이었다.
“커피 마셔.”
씻었는지 반쯤 마른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혁이 말했다.
다연은 맞은 편에 앉아 스모크향이 강한 커피를 마셨다.
태블릿을 내려놓고 그가 다연을 바라보았다.
“주말에 그림 그리러 가자고 했던 거 다음에 가자.”
혼자 다녀도 되는데 지난번 갑작스럽게 비가 내린 일로 그가 같이 가겠다고 했었다. 그림에 집중하려면 그와 움직이는 것보다 혼자가 훨씬 편했다.
“괜찮아요. 일기예보 확인하고 내가 편할 때 가면 되니까요.”
다연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바쁜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던 자혁의 말이 걸렸다.
다연은 커피를 다 마신 빈 컵을 싱크대에 놓으며 무심한 척 물었다.
“이번 주말에 어디 가요? 아니면 일이 많아요?”
“출장 가.”
다연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주말인데요?”
“리조트 이용객이 가장 많을 때 가서 보려는 거야.”
지난번 그가 출장 갔을 때 다연은 텅 빈 집에 혼자 있었다.
장 여사가 오는 시간에는 덜 했지만, 그마저도 오지 않는 주말이라면 정말 빈집에 혼자 있어야 했다. 혼자 있는 게 익숙한데 그 익숙한 게 싫었다.
다연은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그가 일어나 빈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말없이 제 앞의 다연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걸려요? 주말 동안만이에요? 아니면 더 걸려요?”
그의 대답이 늦어지는 것을 알고 나서야 다연은 자신이 너무 아이처럼 군 거 같아 입술을 슬쩍 물었다.
“아니에요. 일 잘하고 와요.”
다연이 식탁으로 몸을 돌리는 데 자혁이 팔로 싱크대를 짚었다. 다연이 반대쪽으로 몸을 틀자 자혁은 다른 팔도 뻗었다.
다연이 어색하게 그를 마주 보며 섰다. 짙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다연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출장 가는 게 싫은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맞는데.”
자신은 긴장감에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만 서 있을 수 있었는데 그는 너무나 여유로워 보였다.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한 거 같은데.”
“…….”
다연은 숨도 제대로 못 쉬겠는데 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거제도 리조트로 가. 사흘 일정인데 이틀 안에 처리하고 오려 했어.”
“정말 이틀이면 돼요?”
“안 돼도 되게 해야지.”
꼭 이렇게 가둬 두고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는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해 쪽 바다를 그릴 생각은 없어?”
“네?”
“같이 가자, 출장.”
다연이 눈만 껌벅이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곳이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다연은 이번에도 말없이 눈만 깜박였다.
“거기 바다 예쁘다고. 내 안목 믿어 보라는 뜻이야.”
“출장인데…… 가도 돼요?”
“안 될 이유가 있어?”
“거긴 회사잖아요.”
다연은 고민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내가 출장 가는 건 싫은데 같이 가는 것도 싫으면 난 어떻게 하지?”
“싫다고 한 적 없어요. 언제 오느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내려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혼자 가서 사흘 뒤에 온다.”
다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만한 목소리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치한 협박이었다.
“알았어요. 같이 가요.”
“엎드려 절 받기군.”
“대답했으니까, 이제 비켜줘요.”
언제까지 이렇게 감금 아닌 감금 상태로 두려고 하는지.
다연이 그의 가슴을 슬쩍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까 못 한 거 하자.”
다연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런 게 있었어요?”
“모른 척할 셈인가 본데.”
“설마…… 어른 칭찬을 할 건 아니죠?”
아까 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봤을 텐데도 이러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싱크대를 짚고 있던 손을 들어 다연을 안았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아서.”
자혁은 맨살이 닿지 않도록 다연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사모님, 저 왔어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여행 가기 좋을 거…….”
장 여사가 평소처럼 인사하며 들어오다 두 사람을 보고 얼른 뒤돌아섰다.
뻔뻔하게 계속 안고 있는 자혁의 품에서 떨어지려 해도 놔주지 않았다.
“하아, 창피하게…….”
“뻔뻔해져.”
자혁은 일부러 힘을 주어 안은 다음에야 다연을 놔주었다.
“날씨 좋대. 가자.”
* * *
이 정도 장거리 출장은 운전기사와 이 실장이 함께 자혁과 움직였다.
다연과 함께 가기에는 그녀가 불편해할 거 같아 자혁은 따로 가겠다고 연락해 두었다.
날씨가 좋아서 여행 가고 싶다던 장 여사가 싸준 샌드위치를 받아들고 다연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샌드위치 감사해요.”
“내가 다 설레네! 그냥.”
장 여사는 차가 출발한 뒤에도 한참이나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보다 더 친한 거 같아.”
“구자혁 씨, 장 여사님 몇 번이나 봤어요?”
“열 번도 안 되지.”
장 여사가 일한 지 2년 정도 되었다고 했었다. 낮에 잠깐 와서 일하는 장 여사와 자혁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 와서 주말 빼고 거의 매일 봤으니까요. 같이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니까 내가 더 친해지는 게 당연하죠.”
“나와 당신이 친한 거보다 더 친하다는 말이었어.”
이런 말에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무엇이든 능숙한 그에 비해 대답 하나도 고민하는 자신이 한없이 미숙해 보였다.
그의 말속에 미묘하게 담긴 질투가 있다고 느낀 게 확실한지 고민하는 것조차 어리숙해 보여 다연은 이 오만한 남자가 질투라는 것을 할 리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도 아침에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안기도 하잖아.”
흘러가는 대로 가기로 했지만, 그의 속도와 다연의 속도에는 차이가 보였다.
다연이 유유히 흐르는 강이라면 자혁은 급류였다. 빠르게 떠내려가는 물속에 무엇을 휩쓸고 갈지 모르는 급류.
“당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겠어요.”
“뭘 꼭 따라오려 해.”
자혁이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을 뻗어 다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끝에 가면 결국 만날 텐데.”
여전히 오만한 말투였지만, 처음 들었을 때와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에게 흘러갈수록 굉장히 안심되었다. 확신에 찬 그의 말이.
* * *
같은 한국인데 서울과 굉장히 다른 풍경이었다.
오래된 기억 끝자락에 겨우 남아 있는 가족 여행에서 보았던 강릉과는 또 다른 바다였다.
학창 시절 때 배운 지리적 지식으로도 동해와 남해는 확연히 다른 바다였다.
다연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와 함께 바닷냄새가 물씬 풍겼다. 손을 활짝 펴고선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으로 느끼며 말했다.
“같이 오길 잘한 거 같아요.”
운전하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뒤에 따라오는 차가 없어서인지 그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차를 몰았다.
초여름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은 모든 것이 반짝였다. 초록이 짙어지는 나무 잎사귀도, 잔잔한 바다도. 공기마저 반짝였다.
반짝이는 빛을 따라가니 나무 데크로 된 산책로가 시선에 걸렸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가 제법 긴 거리였다.
몇 시간 동안 운전한 자혁이 신경 쓰였고, 조금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연이 손으로 가리키며 운전하는 자혁을 돌아보았다.
“우리 저기 좀 걸으면 안 돼요?”
다연이 가리킨 산책로를 본 자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는데도 다연은 이 관계에서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혹시…… 바쁜데 내가 가자고 해서 무리하는 거예요?”
조심스러운 다연의 물음에 뭔가 억누르는 듯한 오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다연.”
“네?”
고작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다연은 다시 마음이 머뭇거렸다.
“안 될 상황이면 나는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해. 된다고 했으면 되는 거고.”
다연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누구 덕분에 사흘 있어도 되는데 급한 거 없어. 산책할 시간은 충분해.”
“네.”
그가 다연을 한 번 바라보고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는 길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한 번에 산책로 입구로 향했다. 마치 구자혁은 처음 가 보는 낯선 곳에서도 능숙하게 길을 찾을 것만 같았다.
“여기 와 봤어요?”
“리조트 부지 때문에 철마다 왔었어.”
“매 계절마다요?”
“푸른 바다여도 계절마다 다르니까.”
그의 세심함이 놀라웠다.
“사계절 봐도 좋은 곳에 리조트를 지어야 고객이 좋아하니까.”
그가 다른 누군가가 좋아할 걸 고민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내가 골랐으니 당신들은 무조건 좋아하면 돼 라고 할 것 같은 사람에게 의외의 세심함이었다.
어느 나라에 있든 다연은 거의 매일 산책을 했었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유명 관광지 구석구석을 걸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산책 그대로를 더 즐기게 되었다.
어울리는 사람은 없으면서도 사람이 많은 광장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거기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다연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춤을 추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다연은 작은 광장에서 그림도 그려보고, 춤도 춰보았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지금처럼 그냥 걷는 건 한국에 와서 처음인 거 같았다. 정원을 걷는 것과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