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6)

2화

-딩.

작은 알람 소리에 다연이 눈을 번쩍 떴다.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좌석에 착석하시고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은 원위치로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Ladies and gentlemen….]

한국말로 한 안내 방송이 다시 영어로 바뀔 때쯤 다연은 자신이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조금 전까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는 다연에게 승무원이 다가와 친절히 물었다.

“손님. 어디 불편하신 데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곧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매주세요.”

다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도 2년 전 그날처럼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창밖으로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보였다.

2년 만이었다.

‘구자혁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날 척추를 타고 흐르던 찌릿함이 전신으로 퍼졌다.

머뭇거리느라 대답이 늦었을 뿐인데 그는 조금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곧이어 말했다.

‘남편입니다.’

‘아…….’

뒤늦게 다연의 입에서 어색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남편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오만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조각 같은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귀국해야겠습니다.’

아직 계약은 일 년이나 남아 있었다.

지금 귀국을 종용하는 이유가 계약 종료를 바라는 것인지. 혹시 자신의 정체가 계모에게 탄로 난 것은 아닌지.

이유를 물어보기 위한 말을 꺼내는 몇 초 사이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고 심장 박동은 피트를 더 올리고 있었다.

‘이유가 뭐죠?’

‘위장 결혼 기사를 잠재워야겠습니다.’

위장 결혼이 맞는데 그걸 애써 잠재워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수고스러웠다. 한편으로 자신이 생각한 모든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한 안도감도 흘렀다.

결혼이 진짜임을 알리는 데 노력하겠다는 계약 조항을 알면서도 다연은 절대 호락호락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간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협조하길 바랍니다.’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는 그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만큼이나 오만한 태도였다.

다음날 우편으로 보내진 퍼스트클래스 좌석 항공권을 보며 든 생각은 다연의 위치를 그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자신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그 오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2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었다. 예정대로라면 내년쯤이어야 할 귀국이 일 년 더 빨라졌다.

일 년 더 빨리 다연에 연락한 이유가 이혼이었으면 기쁜 마음으로 한국에 왔겠지만, 애석하게도 남편이 원하는 것은 다연이 바라던 바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의 요청대로 한국으로 오긴 했지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짐도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입국장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오래전 다연에게 계약서와 혼인신고서를 비롯한 여러 장의 종이를 내밀었던 그의 비서가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기욱 실장이라고 했던가?

“모시겠습니다.”

다연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가지고 앞장서서 걷는 비서를 따라가니 고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을 문을 열고 얼른 탈 것을 조용히 종용하고 있는 이 실장의 얼굴을 한 번 쏘아보고 다연은 차에 올랐다.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다연은 한국에 돌아왔다는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드디어 만날 남편에게 할 말을 꼭 하기 위해 계속 되뇌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으로만 보았던 남자는 사진임에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신부의 얼굴만 모자이크 된 절묘하게 합성된 결혼사진도 다연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았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서류상 남편을 드디어 만난다.

남편이 있다는 곳은 그의 위치만큼이나 거대한 건물이었다. 한강 기업의 영향력을 과시하듯이.

오만한 그의 목소리에도 참 어울렸다.

누구의 차인지 아는 듯 그 누구도 다연이 타고 있는 차를 잡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차가 정문에 멈추고 보안 요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아내이니까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처음 듣는 호칭에 거부감이 일었다.

다연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비단 호칭만이 아니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그녀가 움직이는 걸음마다 따라붙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거부감이 들었다.

청초한 다연의 얼굴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모든 동선이 노출되는 그 사람처럼 이제 자신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노출되겠지.

아마 두 사람의 결혼을 의심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숨어 사진을 찍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전용차를 보낸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그의 아내라는 위치가 보여 주듯 한강 본사 건물 안에서 모든 것이 프리패스였다. 보안 문도,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도 다연에게 활짝 열렸다.

고도가 점점 올라갈수록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의 위치만큼이나 높은 곳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릴 때까지 다연은 그 풍경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치 그를 기다리게 하는 게 큰 죄라고 되는 거 같아 우스워졌다. 뭐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연은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대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으로 걸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오면서 유일하게 닫힌 문이었다. 저 문 너머에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오만한 남자가 있겠지.

이 실장이 두 번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어주었다.

서류상 남편은 다연이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셨습니다.”

이 실장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그는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다연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긴장감으로 명치 아래가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서류에 사인을 마친 남자가 고개가 들어 다연을 바라보았다. 자혁은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마치 거래처 누군가를 대하듯 그는 오른손을 다연에게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편입니다.”

굳이 남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 따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남자가 풍겨대는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지금, 이 건물만큼이나 그는 거대했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거 같은 큰 키에 깊고 짙은 눈. 조각 같은 미남이라 예술품이라는 소문을 달고 다니는 남자.

사진보다 실제로 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다연이 희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작은 손을 내밀어 그의 커다란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한다연이에요.”

“앉지.”

그의 친절은 악수까지만 이었는가 보다. 다연이 접대용 소파에 앉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전신을 파고들었다.

다연은 거기에 휘둘리지 않으려 비행기 표를 받는 순간부터 준비했던 말을 서둘러 꺼냈다.

“한국에 오래 머물 거 아니에요. 한 달 안에 할 수 있는 것만 하죠.”

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지만, 다연은 다음 말을 이어서 했다.

“호텔 예약했어요. 인사는 이 정도면 된 거 같으니 일어나죠.”

다연은 할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하지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집요하게 그녀를 보던 자혁이 여유롭게 왼손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앉지. 아무리 서류상이라고 해도 남편 사무실에 와서 1분 30초 만에 나가는 아내는 없을 테니까.”

그의 말에 강요와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그에게 잡힌 손목이 화끈거렸다.

다연이 내리뜬 눈으로 힘줄이 불거져 나온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거 놓으면요.”

자혁은 손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한가 보군.”

마치 잘 아는 사이처럼 구는 남편은 오늘 처음 보는 사이가 분명했다. 적어도 다연이 기억하는 한.

“호텔은 취소시켰어.”

“누구 마음대로…….”

다연의 고운 이마가 구겨졌다.

“유학 간 아내가 한국 와서 자택이 아닌 호텔에 머물겠다면……. 좋아, 그렇게 해.”

이렇게 쉽게 물러설 거면서 왜 다연이 예약한 호텔을 취소했는지 의문이었다.

다시 예약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겠지만, 그와 한집에 있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다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자혁이 허를 찔렀다.

“단, 내 전용 룸에서 나와 함께. 거기 침실이 하나인데 괜찮겠어?”

다연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이상했다. 서 있는 사람은 다연이었고 그는 앉아 있었다. 자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시선에 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다연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한국에 오기 전 위장 결혼에 관한 기사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다연은 단 한 건의 기사도 찾지 못했었다.

“구자혁 씨가 말한 위장 결혼 기사 찾아봤어요. 단 한 건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그 기사를 그냥 나가게 뒀을 거 같아?”

아.

늦은 깨달음의 탄성이 미처 새어 나오지 않고 다연의 입 안에 맴돌았다.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자혁은 한쪽에 두었던 두툼한 봉투를 다연의 앞에 툭 던졌다.

“뭐예요?”

“꺼내 봐. 보면 알 거야.”

다연은 봉투 안에 있는 것이 이혼 서류 같은 것이길 바랐지만, 그럴 확률이 낮아 보였다.

오늘 처음 보긴 했어도 구자혁은 A5 사이즈 봉투에 A4 사이즈 서류를 접어 넣어 사람이 아니었다.

다연은 조심스럽게 봉투 안에 든 것을 꺼내 보았다.

“아…….”

다연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모두 다연의 사진이었다.

사진을 넘겨 보던 다연은 그게 하루 이틀에 찍힌 것이 아닌 일 년 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모습부터 한 번씩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까지. 다연이 이동한 곳을 따라 찍힌 사진들이었다.

제 딴에는 안경과 모자를 눌러써서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 볼 수 있었다.

다연을 가장 충격에 빠트린 것은 그녀가 춤을 추는 사진이었다.

지금 다연이 머무는 곳은 유명한 도시도 아닌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충격을 넘어 두려움이 엄습했다.

자혁은 그녀가 충분히 알았을 거로 생각했는지 무심하게 말했다.

“이런 사진을 찍히지 말았어야지.”

“이 사진만으로 나라는 것을 알 수는 없어요. 가면도 썼잖아요.”

그는 긴 팔을 뻗어 다연이 목에 감고 있는 스카프를 쓱 당겼다.

실크로 된 스카프는 미끄러지듯 그의 손에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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