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76)

1화

-쾅!

노크도 없이 방문이 활짝 열었다. 이렇듯 대놓고 무례한 행동을 할 사람은 이 집에 딱 한 명이었다.

언니라고 부르기도 싫은 새엄마의 딸, 한주연.

굳이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완벽하게 아버지의 딸이고자 했던 그녀의 바람은 반쯤은 성공이었다.

부친이 친딸인 다연보다 의붓딸인 주연을 더 친딸처럼 아꼈으니까.

주연이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다연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나 임신했어.”

주연 딴에는 폭탄 발언을 한 것일 텐데 애석하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래요? 축하해요.”

다연은 무심히 축하 인사를 건네고 보던 전공 서적을 내려다보았다.

주연이 다가와 다연이 보고 있던 책을 잡아채서는 방 한쪽으로 획 던져 버렸다. 그녀의 말에 보인 다연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보다.

“너는 언니가 임신했다는데 어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축하해줘도 지랄, 무심해도 지랄. 정말 지랄이 풍년이었다.

진짜 친언니도 아니면서 이럴 때는 꼭 언니 대접을 바랐다.

귀찮은 듯 다연은 손톱을 만지며 말했다.

“축하해달라는 거 아니었어요?”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임신했으면 아빠가 누구냐 라던가 그런 걸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니?”

자랑이다. 옜다 물어봐 주마. 옵션으로 궁금해하는 척도.

“사귀는 사람 있다면서요.”

그래서 부친이 나가라고 했던, 사실은 새엄마가 주선한 선 자리를 다연이 나가야 했었다. 그게 아마 두 달 전쯤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랑은 헤어졌어.”

그사이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지고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나 임신까지 했다니. 초고속이구나.

그때는 분명히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할 수 없다고 정색하더니. 지금 굳이 다연에게 와서 자신이 임신한 것을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진철 씨야.”

다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굳이 이름을 말하는 것을 보면 다연도 아는 사람인 듯한 데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나간 선 자리 원래 나한테 들어 온 거였어.”

사귀는 사람 있다고 싫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그리고 애 아빠 이야기를 하다가 왜 선본 이야기로 튀는지 의아했다.

“그래서요?”

“의붓동생이 선본 남자 빼앗은 사람 취급하지 말라는 말이야.”

아, 이제 생각났다.

이름이 낯설지 않더니. 다연이 선본 사람 이름이 마진철이었다.

싫다고 하더니 언제 그 사람을 만나 임신까지 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다연은 얼른 이 관심도 없는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다연은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다시 한번 해주었다.

“축하해요.”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으니까 이제 제발 내 방에서 나가줄래?

“당연하지.”

주연은 나갈 생각이 없는지 다연의 침대에 걸터앉고선 새침하게 대답했다.

나가주면 좋겠는데 자리 잡고 앉는 것을 보니 아직 용건이 남아 있는가 보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이상한 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고.”

다연은 짜증이 나서 말이 곱게 나갈 수 없었다. 밟으니 꿈틀하고 싶었다.

“그게 무서웠어요?”

-짝.

눈앞에 불꽃이 일더니 볼이 뜨거웠다.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겠지.

“어디서 건방지게.”

그녀는 시선을 들어 주연을 노려보았다.

“3주 뒤 결혼식이야. 그전까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어.”

3일 뒤라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다연은 지난주, 평소와 달리 잔뜩 치장하고 외출하던 세 사람이 떠올랐다.

상견례 자리였구나.

다연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음흉하게 웃으며 전신을 훑어보던 그 남자를 더는 안 봐도 된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하마터면 집안 망신시킬 뻔했어. 알아?”

누가? 내가?

“그 사람 3대 독자야.”

주연이 선 자리에 가기 싫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도 그거 아니었던가?

특히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싫다고 하고선.

지금 다연에게 그 3대 독자 아이를 밴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 얼굴을 봐. 그 불치병 가지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되겠니?”

주연의 손이 닿은 곳에 발진이 올라왔을 거라는 것은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려우니까.

“선본 날 그 사람이 넘어질까 봐 손목 한 번 잡아줬는데 발진 올라왔다며.”

넘어질까 봐 잡아준 게 아니라 룸 잡았다고 올라가자고 잡아끈 것이었다.

그때 발진이 올라온 것을 보며 놀라자빠지던 마진철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우스웠다.

사실과 다르지만, 다연은 굳이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털끝 하나도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 손끝만 스쳐도 피부가 그 지경이 되는데 어떤 사람이 안 놀라.”

그걸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 실수인 척 건들거나 지금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고 따귀를 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괴롭히고 싶어서 혹은 불치병으로 엉망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고 싶었으니까.

다연이 입 안 속살을 지그시 물었다.

“그 집안에서 난리 난 거 내가 정중히 사과드렸어. 원래 내가 나갔어야 했던 자리니 내가 책임지는 게 맞으니까.”

임신으로 책임지다니 참으로 대단한 책임감이었다.

친동생도 아닌 의붓동생의 흠을 덮어 주려고 몸을 던진 의붓언니라니, 참 눈물겨운 자매지간이 아닐 수 없었다.

“너 때문에 아빠 회사 어려울 뻔했어. 하긴, 철없는 네가 그런 걸 알 리가 있겠니?”

부친의 회사에는 작은 관심조차 갖지 말라는 계모의 말을 잘 들었을 뿐인데 다연은 철없는 딸이 되어 있었다.

“그 집안에서 다시는 너 안 봤으면 좋겠다더라. 재주 없다고. 그래서 말인데.”

“결혼식 안 갈게요.”

다연은 주연이 원하는 대답을 빨리해주었다. 그래야 주연이 빨리 그녀의 방에서 나갈 테니까.

“네 입으로 안 오겠다고 한 거야. 내가 아니라.”

이러면 좀 낫니?

“너 그 불치병 못 고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데, 너도 참 큰일이다. 착한 아빠한테 어떻게 너는 평생 흠이니.”

주연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연의 방을 나가려다 다시 뒤돌아보았다.

“너처럼 그런 사람 중에 남자랑 자고 난 뒤에 나았다는 사람도 있대. 밖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원나잇 한번 해봐. 혹시 아니? 섹스 한 번에 씻은 듯이 나을지 말이야. 그 전에…… 온몸에 발진 올라와 아낙필라시스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주연은 다연을 비웃으며 방을 나갔다.

다연은 거울을 당겨서 얼굴을 살펴보았다. 입 안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져 속까지 메스꺼웠다.

얼굴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키고 다연은 오늘처럼 자신을 뒤흔드는 날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후 다연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책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은 다연이 지난 일 년 동안 해왔던 일이었다.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에 비해 고액이었고, 장소가 다연이 다니는 병원이라 새엄마의 의심을 사지도 않았다.

유학 자금이 필요한 다연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저 돈 많은 할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한강 기업 구선호 회장이라는 것은 일을 시작하고 한 달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오늘 구 회장의 얼굴은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혹시 다연 양……. 위장 결혼이라고 들어 보았나?”

“필요 때문에 그러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어봤어요. 영주권 같은 거 때문에 그러기도 하잖아요.”

다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위장 결혼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흠이 있는 손주가 있다고 말했던가?”

지나가다 한 번씩 흉보듯 했던 말이라 진짜 흠이 있을 거라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지금도 다연에게는 구 회장이 말한 흠은 애정 섞인 걱정 정도로만 들렸다.

“내…… 부탁 하나 함세.”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건가요?”

구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손주랑 결혼해주게.”

“네?”

“다른 건 하나도 안 해도 돼. 그저 혼인신고만……. 딱 3년만. 서류상으로 부부인 척만 해주게.”

“할아버지…….”

당황해하는 다연에게 할아버지는 간절했다.

“다연 양이 필요한 것 모두 지원해주겠네. 대신, 정상적인 부부인 척만 하면 돼.”

“왜…….”

“그놈이 흠이 있는 놈이라……. 경영승계가 마무리될 때까지만. 3년, 딱 3년만. 그 이상 길어지지는 않을 게야. 그놈이 더 길게 끌 녀석도 아니고.”

“…….”

구 회장은 3년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혼인신고만 하고 다연 양 유학 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겠네. 서류상 혼인 상태만 유지해주게. 그것 외에는 바라는 거 없네.”

다연은 거절도 승낙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강 기업, 구자혁.

마진철과 선을 보기 전에 이 단어를 들어 보았었다. 장성한 딸들의 결혼 거래처를 고르던 계모가 했던 이야기가 하필 이 순간에 떠올랐다.

“주연이 저것이 한강 기업 구자혁 본부장을 어디서 한 번 보고는 홀딱 반해서는 어떻게든 결혼시켜 달라고 난리에요.”

“거기는 안 돼.”

“왜요?”

“조현병 환자라는 소문이 있어. 그것 때문인지 남자구실 못한다고 말이야. 대인기피증도 심해서 입원 치료받는 동안 아예 안 보이잖아.”

“어머, 그 조각 미남이 어쩌다.”

“혼잣말하는 걸 나도 몇 번 본 적 있어. 아주 헛소문은 아닌 거 같아. 게다가 숨겨둔 여자가 있다는 소문도 심심찮게 돌고 말이야.”

“남자구실 못한다면서 어떻게 숨겨둔 여자가 있어요?”

“돈 많은 놈이니 그거 하나로 붙어 있겠지. 얼굴 하나는 조각 같잖아. 주연이가 한 번 보고 반할 정도니 얼마나 잘났는지는 당신도 알잖아. 그렇다고 해도 거기는 안돼. 주연이 단념시켜. 한강 기업 구자혁은 아니야.”

“그런 흠이 있을 줄은…… 아깝다. 그 재력에 그 인물에.”

“남의 집 걱정하지 말고 우리 집 흠 있는 놈이나 어디로 치울지 걱정해.”

그날 다연이 우연히 들은 이야기에서 부친에게 제 존재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어디로 치울지 고민해야 하는 존재. 집안의 흠.

오늘 구 회장의 제안을 받고 그때 지나가다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다연에게 새로운 기회인지도 몰랐다.

비록 서류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과 가족이 될 기회. 이 집에서 벗어날 기회.

다연은 서류상으로만 가족이었던 사람들에게 스스로 벗어나 새로운 서류상 가족을 만드는 일에 사인했다.

두려웠지만, 척추를 타고 흐르던 찌릿찌릿한 쾌감과 통제를 벗어난 심장의 두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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