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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83/86)

외전 2화

거드럭거리는 목소리의 방향은 문풍지 너머였다.

아래에서 손가락 장난을 치던 기운혁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지독하네…… 지독해.”

바깥에 어룽진 그림자를 노려보더니 엎어트린 몸을 뗀다. 운혁은 한숨을 내쉬며 사혜의 구겨진 치마를 펴 주었다.

어렴풋이 기척이 느껴질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대로 판을 깨뜨린 방문자는 왕실에서 보낸 사자였다.

“아무도 없소?”

사혜는 불긋해진 뺨을 긴 천으로 가린 뒤, 운혁을 밉지 않게 쏘아보았다. 그랬더니 무구한 양 미소 지으며 사혜의 치맛자락을 꼬고 있다.

“내가 나갈까?”

“여기 딱 붙어 있으세요.”

빠안히 들여다보는 시선이 열기를 재차 부추기는 것 같아 사혜는 급히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이 어찌나 뜨거운지, 발끝이 저절로 간질거리며 꾹 오므라들었다.

운혁이 가볍게 흘리는 웃음에도 목 끝까지 더운 열기가 차올랐다.

“엇, 홍 무녀 계시었군.”

통통한 몸에 관복을 얹은 사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사혜는 태연한 얼굴로 사내를 마주 보았다.

“그래, 이번에도 왕의 명령으로 오셨는가.”

혹시나 안에서 나는 소음을 들었을까 싶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으나, 다행히 사내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심한 사혜는 목을 가다듬으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오랜만이구려, 자네에게 답신 한번 받기가 참 어려워.”

일전에도 사혜의 집을 들락이며 전교를 보내 온 왕의 측근이 넉살 좋게 웃었다.

“하여 이번에도 몸소 찾아왔소이다.”

그리곤 천천히 마당을 둘러본다.

“언제 와도 화사한 곳이야. 여인 혼자 관리하기엔 집이 조금 큰 듯하지만.”

집주인마냥 대문을 열고 온 사내는 운혁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산 아랫마을 사람들도 운혁에게 알은체하는 마당에, 희한하게도 왕성에서 파견 나온 이들은 사혜 옆에 버젓이 선 운혁을 공기 보듯 보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왕성의 기와 영원히 섞일 수 없는 무언가가 기운혁에게 남아 있는 건지, 단순한 그의 수작인지.

억울해하는 것을 보면 후자는 아닌 듯하지만.

“댁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리고 내어 줄 답신은 없으니 그리 알고 왕께 전하시오.”

“에헤이. 홍 무녀가 대단한 귀인인 줄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만, 홀로 살기엔 적적할 것 같아 염려차 한 말이지. 한데 답신은 왜?”

“왜긴, 무얼 왜야. 이 몸은 속인이 아니니 연회고 의뢰고 끌어들이지 말라고 너덧 번은 말했을 텐데. 재주 좋은 무녀들은 왕성이 다 쓸어 갔으면서 두메산골에 틀어박힌 나를 왜 부르느냔 말이야. 이쯤 되면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 의심이 되네.”

심드렁히 대꾸하자 사내가 어허, 하며 소리를 높였다.

“이보게, 홍 무녀. 큰일 날 소리를! 아무리 나라도 그런 불손한 말은 못 전해. 그나저나 왕래한 세월이 얼만데 아직도 얼굴을 꽁꽁 감추고 다니시나? 홍 무녀의 미색은 다 헛소문인가, 왕께서 자네 얼굴을 궁금해하시니. 보기 흉한 흉터라도 있는 것 아닌지 몰라. 왜, 어릴 때 난 화상 자국이나 큼지막한 점 같은 거 있잖소? 그게 아니면 이리 감추고 살 이유가 없지 않아.”

선을 넘을 듯 말 듯 비아냥이 깔린 목소리에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사혜는 흠칫했고, 태평한 사내는 바람결에 문이 밀린 줄 아는 눈치였다.

뒤이어 저벅, 모래 바닥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내는 듣지 못하고 떠들었다.

“여하하든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으니 거절의 답신이라도 주시게.”

손을 휘젓자 노르스름한 종이와 붓이 나풀거리며 허공을 지나 손안으로 들어왔다. 사혜는 붓을 쥐고 서신을 갈겨 썼다. 불안의 냄새를 감지한 것이다.

그 찰나, 고약한 장난을 즐기는 낭군께서 붓질하는 사혜의 곁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팔락이는 푸른 도포 자락이 시야 끝으로 잔잔한 물처럼 흘러간다.

이끌리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운혁은 꽃모종이 가득한 정원을 두런거리는 사내에게로 가는 중이었다.

시선으로 기운혁의 뒤를 쫓던 사혜가 단호히 입을 열었다.

“운혁.”

“무어라 했소, 홍 무녀?”

커다란 손이 허공으로 치들린다. 봄의 한 자락처럼 나긋하고 부드러운 손짓. 곧은 손마디의 끝에 사아악 돋아나는 푸른 갈퀴.

설마, 하고 종이를 구겨 쥐었다. 보이는 게 없어도 무언가를 느끼긴 한 모양인지 왕의 사자도 주둥이를 딱 다물고 어깨를 굳혔다.

커진 눈으로 허공을 더듬거리는데.

“운혁!”

사혜의 손이 뻗어 나가는 동시에 꽉 조여져 있던 무언가가 툭― 풀리듯이 냉동 상태가 된 사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 방금 뭐…….”

사혜는 탄식하며 엎어진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엉망으로 구겨진 서신. 손아귀에 쓸어 담은 바람과 실로 고정된 것처럼 허공에 우뚝 박제된 기운혁.

“자, 냉큼 갖고 돌아가시오. 그리고 전해. 축사를 원하면 귀한 아들 업고 직접 납시라고. 오라 가라 찌르지 말고. 알아들었소?”

“아…… 알겠소.”

날카롭게 윽박지르는 사혜 앞에서 왕의 사자는 쪽도 못 쓰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꽁지에 불붙은 노루마냥 허겁지겁 마당을 뛰어나가 버렸다.

운혁이 서신을 접어 건네는 사혜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었다. 가느다란 눈을 천천히 굴린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여 보았다.

꿈쩍도 않네.

허공에 묶여 버린 운혁은 몸에 힘을 풀었다.

소란이 물러가자 딱딱한 적막이 찾아왔다. 운혁이 팔짱을 낀 사혜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언제 풀어 줄 거야.”

“…….”

“장난이었어.”

“장난. 그럴 테지요.”

사혜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다가왔다.

귀애하는 여인이 트집 잡히는 걸 보고 부아가 꼬여, 슬쩍 건드려 보려고나 했겠지. 겁 많은 인간들은 귀에 바람만 불어도 펄쩍 뛰니까.

그게 아니면 오금을 툭 차거나 발이나 걸어 보려는 수작질이었을지도 모른다. 운혁은 항상 그럴 작정이라고 말했으니까.

하나 사혜는 저에게 무례하게 시비를 걸던 치들을 운혁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는지 안다.

‘장난 좀 친 거야.’

그때마다 장난으로 뭉뚱그린 것도.

속 알맹이가 인간이 아니라 그러한가. 때때로 상식 밖의 행동이 튀어나오는 기운혁의 면모를 마주하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해진다.

누군가 알아챌까 봐. 괜한 사건에 휘말릴까 봐.

권력에 눌리고, 누명을 덮어쓰고, 사랑하는 사람과 찢어지고. 숱하게 겪었던 일을 반복하게 될까 봐 가슴을 졸이는 심정을 이 사내는 알까.

속이 단단히 꼬아질 때. 주로 사혜와 관련된 일에 그는 자비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강둑에 처박혀 있던 무뢰한들을 관아로 넘기면서 사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박을 했다. 또 이러면 보름 동안 각방이라고.

“안 그럴게.”

반응을 살피듯 빤히 보던 운혁이 느리게 입을 뗐다.

“왕의 사람입니다.”

“아무 짓도 안 하려고 했어. 정말로.”

“그럼요?”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 싶었지.”

사혜가 다가서자 운혁이 뺨에 입을 맞춰 왔다. 떼었다가, 다시 촉촉.

용서를 구하듯 내려앉는 입맞춤과 끝이 살짝 구부러진 눈썹, 코끝을 살며시 비비는 모습이 타박 맞은 강아지 같아서, 마음 여린 사혜는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화난 적도 없다. 걱정이 되어서 그랬지.

“소문이라도 잘못 돌면 어찌하시려고.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슴을 졸이게 만들어요.”

애정 어린 손길로 운혁의 뺨을 감싸 쥐었다. 뺨을 가까이 당기자 고개를 깊이 숙여 온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투둑― 사금파리가 흩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운혁은 자유를 찾았다. 역시나 그녀의 도술 같은 건 손쉽게 풀어 버리는 사내였다.

그마저도 걸지 않으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한 일이지만, 사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속상해서 그랬지.”

허리를 숙여 사혜의 너울 안으로 들어온 사내가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와 간질거리는 체취로 가득 찬 좁은 공간 안에서 사혜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어여쁜 아내를 두고 흉이니, 멀쩡히 살아 있는 남편 앞에서 적적해 보인다느니. 내 취급이 억울하잖아.”

요는, 왕의 사자에게 제 존재를 알리기 위해 문짝도 밀어 보고, 신도 질질 끄시며 걸어 다녔단 얘기였다. 그래도 모르는 눈치라―어차피 못 볼 게 뻔한데― 재수 없는 어깨나 찔러 보려 했다고.

허. 그런 얄궂은 행동마저 사랑스러우니 콩깍지가 참 대단하다 생각하며 사혜는 맥 빠진 웃음을 흘렸다.

“가만 귀담아듣는 것도 우습지 않아. 놈의 속이 뻔히 보이는데.”

억울한 듯이 중얼거리는 운혁의 손등에 뺨을 기댔다.

분명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는데. 사자의 말 한마디에 왕이 운혁의 존재를 까뒤집으려 들며 집요히 추국해 올 수도 있는 상황인데 웃음만 나왔다.

“문석후. 너를 경계하면서 요귀 타령해 대며 불러 대고, 감시를 붙이고. 매번 꺼내는 얘기는 무녀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닌 그놈의 천 쪼가리를 언제쯤 벗을 것이냐, 그것뿐이지.”

“하면 이제 어쩌지요?”

운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미간의 저 세로줄은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마다 나오는 표시였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마침 왕과 함께 처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자신에게 맡겨 두라고.

“무얼 하시게. 다른 건 또 뭐고요?”

“글쎄.”

“저량 약조하신 것 잊지 않았겠죠? 저번 같은 사태가 나면 보름이 뭐야, 1년간 독수공방시킬 겁니다. 염려되니 말해 보아요. 무슨 짓을 하시려고?”

떠보려 기를 쓰고 핀잔도 주었다. 운혁의 소맷자락을 흔들며 드물게 콧소리까지 섞어 보았으나 사내는 좋아라 입술을 찢을 뿐 끝까지 답은 주지 않았다.

* * *

“말 안 듣는 자식, 어쩔까.”

사혜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원목 제기를 정리하는 사혜를 바라보며 기운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리가 떨어져 있기도 하고, 생전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정성스럽게 올리느라 사혜는 운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집 뒤편에 자리한 정갈한 사당.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혜의 뒷등을 바라보며 운혁이 제기를 집었다. 허공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뭘 그런 걸 물어. 그 짝은 자식도 없나.”

“아직은.”

“아? 규수처럼 고운 무녀가 아내가 아니라고? 사당에 올 적마다 저 처자랑 눈꼴 시리게 사이가 좋아서 금슬 좋은 부부인 줄 알았다고.”

귀신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며 낄낄거렸다.

남 등쳐 먹고 도둑질하다가 손발이 잘린 망나니 자식을 뒀다던가. 자식 때문에 속깨나 썩다가 죽은 귀신인데, 그래서인지 가슴팍에 짓무른 구멍이 뚫려 있었다.

거기다 으깨진 두개골. 눈알은 핏물이 넘쳐흐르고, 걸을 때마다 엇갈린 다리뼈가 쁘득쁘득 맞물리는 소리가 난다. 뿜어 대는 기운은 또 어찌나 스산한지.

사혜의 영기가 강한 사당 주위엔 심심한 귀신들이 몰려들곤 하였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 싶다며 꺼이꺼이 운다.

막상 사당의 주인은 우글대는 영혼들의 곡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그것은 운혁의 안배였다.

생각해 봐라. 저 많은 것들이 지들 처지가 더 비참하다고 사혜 앞에서 입씨름하는 꼴을.

그도 성가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혜를 노리는 영악한 악귀들이었다. 영기가 강한 인간을 제 먹이쯤으로 여기는 망령들.

개중 몇몇은 사혜의 용모가 어여쁘다며 침을 흘리며 접근해 왔다.

산 놈이나 죽은 놈이나.

“말 안 듣는 자식 어쩌냐고? 나를 탓해야지.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 자식이 덕을 못 쌓는구나. 보소, 기 도령이라 했나?”

며칠 전 사당에 기어들어 온 이 귀신은 후자였다. 악귀 같다는 소리다.

고개를 꺾고 우두커니 서서 사혜를 빤히 응시하는 걸 내쫓았는데, 그러기 무섭게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사혜의 집 울타리에 철썩 붙어 얼쩡댔다.

벌써 스무 날째였다. 뻥 뚫린 눈동자로 사혜만 뚫어져라 본다.

저러고 뭐가 보이긴 하나?

무엇이 되었든, 운혁은 사혜에게 치근대는 파리 떼를 가만 지켜볼 마음이 없었다.

“한데 그건 왜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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