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수련 무녀 시절 문후 공의 누이가 악귀에 들려 치료해 준 적이 있었다. 이후로 공은 내게 고마움을 표하며, 폐쇄적인 무녀원에서 피죽도 못 먹고 고생하는 내게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주곤 하였다.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내 양손을 조심스레 맞잡는 문후 공에게 나도 웃는 낯으로 물었다.
“연이는 잘 지냅니까?”
“연이는 2년 전 사거했습니다.”
“……아.”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아이여서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한데 홍 무녀님께서 악귀를 떼어 내 주신 덕에 1여 년을 더 행복이 살다 갔지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려 주었다.
“홍 무녀님은 저희 남매의 은인이십니다. 그 애가 얼마나 즐겁게 여생을 보내다 갔는지. 늦기 전에 무녀님을 찾아뵙고 싶어 했는데, 아쉽게도 그러질 못하였지요.”
“마지막으로 연이를 보았을 때가 열넷이니 벌써…….”
소슬한 시선이 뒷머리에 닿았다. 남녀만 붙여 놓으면 애정이 싹튼다고 믿는 나의 정인은 오가는 대화를 눈 하나 깜빡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입꼬리에 도사린 불만. 나무에 삐딱히 기대 서 있는데, 문후 공도 서슬 퍼런 시선을 느끼고 대화 삼매경에서 빠져나와 황황급급히 운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홍 무녀님과 동행하셨다던 그 퇴마사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상록은 지리, 정치적으로 몹시 폐쇄된 지역이라 소식이 느렸다. 요귀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면 평생을 바깥 세태에 어두운 까막눈으로 살았다.
말이 군수지, 문후 공이 이곳에서 하는 일이라곤 마을 재판과, 왕의 감시를 받으며 소규모 교역을 지휘하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저명한 퇴마사도 모를 수밖에.
“먼 곳까지 걸음 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객관으로 모시겠습니다. 향후 일정은 여독을 풀고 난 뒤 논의하도록 할까요.”
오랜 지기처럼 담소를 나누며 앞장서는 나와 문후 공을, 운혁은 무표정으로 뒤따랐다.
짐을 푸니 늦은 밤이었다. 오늘 하루 운혁과 나눈 대화는 열 마디도 채 못되었다. 오가는 길에 누적된 피로 탓인지, 그를 보면 자꾸 헛것이 보여서 얼굴을 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운혁이 평소처럼 살갑게 말을 붙이면 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헛대답하기 일쑤였다.
몸이 상하지 않아도 홍운영이 곁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을 보여 주는 대신 날카롭게 비웃는 소리로 온 신경을 긁어 댔다.
“아직도 모르겠어?”
홍운영의 찢어진 배가 곧 나의 상처였고, 그녀가 느꼈을 고통이 환상통이 되어 온몸을 긁어 먹었다.
온종일 피로하여 목욕을 하다가 깜빡 선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물이 아닌 핏물에 잠겨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새하얀 동공을 희번덕거리는 괴물이 있었다. 귀신 사내가, 기유가 있었다.
기유.
멍하니 이름을 곱씹었다. 비척대며 욕탕을 빠져나와 침상에 누웠을 때는 달도 차지 않은 새벽이었다. 일시가 주야분주한 날이 될 텐데, 엄한 것에 신경이 쏠리면 될 일도 망치고 말 것이었다.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 * *
“상록의 날씨는 대체로 건조하고 우기가 짧습니다. 건토와 암석 지대가 많은데, 이것 보십시오 무녀님.”
이다음 날 아침, 나와 문후 공은 함께 상록 일대를 정찰했다. 따라나서겠다는 기운혁을 앉혀 두고 정 돕고 싶으면 부적이나 쓰라며 일감을 맡기고 오는데, 등에 쏘아 박히는 서러운 시선이 따끔했다.
그런 그를 또 넋 나가 보다가, 역시 착각이구나 싶어 안심했다. 운혁은 꿈에 나타난 귀신 사내처럼 만질 수 없는 이가 아니었고, 요귀처럼 갈퀴도, 비늘도, 낫 같은 손발톱도 없으니.
“전부 늪으로 변했습니다. 생태가 변하니 서식하는 동식물의 종류도 달라졌고요. 특히 요 녹색 물고기는 오염된 하천의 찌꺼기를 주식 삼아 번식하는데…… 반년 전부터 상록에서 곧잘 보입니다.”
가리키는 곳마다 과거 상록에는 볼 수 없었던 탁한 물과 습지대가 눈에 띄었다. 물기를 죽죽 빨아 머금은 나뭇잎들은 무섭도록 선명한 녹색을 머금고 음충맞게 늘어져 있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회갈색 늪이 나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숲 한복판에 대뜸 생긴 것이지요. 불길하다면서, 근처에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내가 찾는 것은 요귀가 둥지로 쓸 만한 굴이었다. 녀석이 요굴을 파고 잠복해 버리면 끄집어내 봉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농락하듯 입구에 꼬리만 비쳤다가 잡을라치면 냅다 빼고, 무녀의 눈길이 닿지 않는 틈에 기어 나와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 짓거리를 반복하다 요력이 차면 마을을 풍비박산 내러 달려오는데, 그러기 전에 미리 손을 써 두려는 계산이었다.
“응달이 짙고 주변에 물이 흐르는 동굴이라면 세 군데입니다. 한데 요귀가 몸을 집어넣을 만치 큰 동굴은 미립굴과 청송굴뿐이네요.”
“차례로 돌아보지요.”
가는 길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묵혀 둔 혈(血)을 뿌렸다. 이를테면 신력이 담긴 혈로 도망 못 가게 울타리를 쳐 두는 것이다.
미리 피를 받아 두긴 했으나 동굴 일대가 이 지경으로 넓을 줄은 예상 못 해서 몇 차례 칼로 팔등을 그어야 했다. 두 동굴을 모두 돌고 객관으로 돌아왔을 때는 붕대에서 계속 피가 배어 나와 난처할 지경이었다.
‘이리 기력이 모자랐던가.’
분명 한 끼 든든히 먹고 나갔는데 피죽도 못 먹은 꼬락서니가 되어 객관 문턱을 밟았다.
“꼭 이래야 해?”
붕대를 수습하며 대청을 걷는 찰나, 화난 목소리가 어깨를 타 넘었다. 하루 종일 방치된 운혁이 울컥한 시선을 피 묻은 붕대로 떨어뜨렸다.
“곧 상록으로 수십의 요귀들이 몰아닥칠 테니 그들을 모조리 봉하려면 어쩔 수 없지요.”
“다른 퇴마사들은 놀고먹나. 너를 보조할 놈들이 각지에서 당도하였다 들었는데 뜬소문인가 봐?”
“저의 혈이 대요귀에게 표식을 남긴다 하더랍니다. 홍운영의 피가 흘러서 더 강한 효과를 본다고.”
운혁이 피가 몽글몽글 맺힌 팔등으로 손을 뻗었다.
“……무슨.”
단단한 손아귀가 상처를 확인하듯이 팔등을 반대로 젖혔다. 물컹한 살이 상처 부위를 길게 쓸어내리는 초근한 감각이 느껴졌다. 팔등에 한 줄기 흐르는 선혈을 핥는 기운혁은 달밤에 숨어든 요수처럼 요요했다.
어제오늘, 뒤편에서 그를 관찰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지금도 나는 뛰는 가슴을 한편으로 치워 두고 가까워진 그의 면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사내였다. 사람인지, 사람으로 둔갑해 사람을 홀리는 요귀인지 헛갈릴 정도로. 긴 속눈썹을 처연히 깔고 입술을 움직이는 사내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귀가 붉어졌다.
“얼마나 아플까.”
“엄살 부릴 정돈 아닙니다.”
“안색이 창백한데도, 너는.”
확실히 한 번에 다량의 피를 뽑은 것이 무리수긴 한 모양이었다. 그가 땀 맺힌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런 뒤 나를 붙들어 안고 잘 닦은 보주를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눕혔다.
달그락, 나를 내려놓고 어둠 저편에서 등을 돌린 채 무엇인가를 하더니 곧 따스한 차를 타서 가져왔다.
“약차야.”
삼을 진하게 우린 향이 났다. 한 방울을 넘기자 정신이 돌아왔고, 두 방울을 머금자 눈앞이 개었으며, 세 모금 째에는 빨려 나갔던 기력이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었다.
“어떤 약재를 쓰셨습니까?”
신묘한 효능에 놀라 단숨에 차 한 잔을 비웠다. 따스한 액체가 뱃속 가득 퍼지니 상흔의 통증이 옅어지고 후들거리는 사지가 녹신하게 풀렸다.
“이 약차가 무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또 신세를 졌네요.”
“신세 졌다는 말은 그만해.”
“아뇨, 내일도 문후 공과 새벽부터 외출해야 하는데 이런 몸 상태로 어쩌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데 보세요, 두통은 물론이고 피도 멎었습니다.”
“또 그놈이야.”
그는 서운함을 내비쳤으나 잠깐의 침묵 뒤 다시 표정을 풀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내 뺨에 살갑게 입을 맞추었다.
“함께 잘까?”
“음.”
“문후인지 무언지 내처 붙어 다녔지 않아. 그러니 하루의 절반은 내게 주는 게 어때.”
꼭 밤을 맡겨 둔 것처럼 당당한 요구였다.
돌아오는 답이 없자 그는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는지 내 어깨를 살며시 흔들었다.
“내 아내가 되어 주겠다면서. 야멸차게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 부인.”
하나 웬걸, 그 말에 심장이 반으로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관혼을 치르는 거야. 한생을 못 살다 간 원혼들에게 먼저 그것을 해 주거든. 아, 너는 왕실 사람이었으니 관례는 일찍이 치렀겠다. 하면 혼인이 남겠고. 나랑 하자, 기유야.”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 귀를 후비는 잡스러운 환청을 몰아냈다.
“내일 일찍 나가야 해서 오늘은 무리예요.”
“무얼 하재? 그냥 다정히 끌어안고 자자는 거지.”
“너무 곤해서…….”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운혁은 시선을 내려 한동안 어둑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반복된 외면에 기가 죽은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다 도려내지는 것 같았다.
“그래, 푹 쉬어.”
앞머리를 걷어 내는 손길은 기억하는 그대로 부드럽고 따스했다. 이마에 떨어진 운혁의 입술은 요귀에게 찢긴 복부의 환상통을 지워 주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이토록 심한데 왜 자꾸 거짓된 잔상이 앞을 가리고 나를 괴롭게 하는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환시와 환청이 귀퉁이부터 정신을 깎아 내고 있었다. 상록에 오기 전부터 나를 괴롭게 하더니, 이곳에 와서는 정점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막 무릎을 펴고 일어나려는 운혁을 붙잡아 끌어내리고 묶어 두듯이 입을 맞췄다. 그는 혀를 내밀어 받으면서 거추장스러운 옷가지를 거친 손으로 끌어내렸다.
보호해 줄 껍질은 부서졌고, 이번에도 역시 기껍게 그를 받아들였다. 깊숙한 곳까지 남김없이 흔적이 새겨져 서로에게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홍운영은 더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먼 거리에서 천벌을 내려치듯 비웃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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