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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51/86)

51화

사내의 입안은 덥고 습했으며 향이 좋았다. 나는 눈을 감고 단물을 찾듯 얼타는 혀를 빨았다. 아까는 능숙하게 잘만 섞더니 내가 먼저 다가오니까 꼼짝을 못한다.

“사…… 읏.”

나른한 신음이 도화선 역할을 해 주었다. 잠기다시피 늘어진 몸이 물 밖으로 반쯤 빼내어졌다. 그가 큼지막한 손으로 뒷머리를 붙들더니 고개를 비틀고 험하게 입술을 물어 당겼다.

서툰 접문에 응해 주는 그 움직임으로 지금까지의 내 깔짝거림은 어린애 장난처럼 시시한 것으로 변했다. 책망하듯 혀끼리 비비고 엮는데, 경험 없는 나의 가련한 혀는 따라가기도 숨 가빴다.

시큰거리는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틈새로 짐승의 목 울림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가 달큰한 포도 껍질 벗기듯 내 목덜미를 핥았다. 푸른 동공이 살내음에 취해 있다.

여린 살에 코를 비비며 놀다가, 가슴이 모이는 쪽을 건드려 보다가, 아직은 이른 것처럼 다시 턱 끝으로 돌아와 조심스럽게 쪼아 댔다. 아까처럼 견디기 어려운 감각이 몰려와 몸을 비틀자 입술이 멈추었다.

“그날, 도령이 떠나기 전에…… 제게 연모하냐고 물으셨죠.”

“아.”

“저는.”

기회로 보았다. 꿍쳐 두다 늦어 버릴까 봐.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여겼다.

분위기에 반쯤 등 떠밀려 마음을 전하려던 순간이었다. 처참히 뭉개지는 얼굴을 보았다. 둘러 안은 손, 보듬는 입맞춤. 연모한다 말하면 그런 것들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시름이 깊은 그의 눈은 냉랭했다.

“도령.”

“……말하지 마.”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고, 간혹 그리 여겼으나 지금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연심을 외면하려 드는 태도에 마음이 갈라지고 말았다.

“왜 듣지 않으시려 합니까?”

“사혜야, 제발.”

괴로운 기억을 갈퀴로 끄집어낸 마냥 그는 떨고 있었다.

“왜요?”

취기도 열락도 싸르르 빠져나간다. 돌을 무더기로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열기가 식은 가슴은 공허함의 차지였다.

저를 연모하냐 그리 물어 댔으면서 왜 대답은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정답게 연심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었나. 지극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내 느낌이 잘못된 것은 아닐 터다.

그럼 무언데.

왜 이럴 때 홍운영의 목소리가 떠오르는지. 누군가의 심술궂은 말대로, 기운혁의 품속에서 딱딱하게 굳은 내 몸이 정말로 빈껍데기처럼 느껴졌다.

* * *

처음에는 수도로 가자는 기운혁의 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쓸개 같은 생에 다디단 연심 한 입 맛보았다가 처지도 잊고 하롱거릴까 봐서. 아무런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삶에 기대의 씨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떠올리고 다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미래를 걱정하나 안 하나 불운할 운명이라면 앞서 고민을 떠안을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나는 이 사람을 연모한다. 비끗하면 요귀에게 스러질 짧은 생. 좋다고 말도 못 한다면 그거야말로 감정의 낭비가 아닌가. 그리 마음먹고 이곳에 온 건데. 그는 내 연정을 듣기 꺼렸다.

찌르는 것처럼 속이 아프다. 마음이 내쳐진 기분이었다.

빈정이 상한 채로 이다음 날 일어나니, 기운혁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네 주인이 어딜 갔느냐고 호야에게 물었더니, 늘 있는 일이라는 답을 듣고 맥이 빠져 버렸다.

“어딜 갔다는 말도 없었고?”

“너무 걱정은 마세요. 금방 돌아오실 테니까요.”

호야는 저가 다 송구스러워하며 내게 빛깔이 어여쁜 과편을 요깃거리로 내밀었다. 나는 그걸 씹으며 나갈 채비를 하였다.

“어딜 가시려구요, 아씨?”

“그래, 따라나설 필요 없다.”

상한 속을 좀 풀어야겠다. 일전에 영물이 귀띔한 변두리 지역을 살펴보고자 길을 봐 둔 참이었다.

“가시는 길은 알려 주셔요. 주인님이 하문하시면 말이라도 드려야 하니.”

“수도 외곽에 볼일이 있어서. 호위는 붙이지 않아도 돼.”

“주인님께서 걱정하실 텐데요.”

“그이도 말없이 홀랑 사라졌는데 무얼. 내가 어딜 갔느냐 물으면 사냥이나 나갔다고 하여라. 어련히 알아들을 테니.”

“예, 아씨.”

나는 검은 쓰개치마와 같은 색의 장포를 걸치고 길을 나섰다. 변두리까지는 제법 먼 거리인지라 해 지기 전에 귀택하려면 경보를 해야 했다.

접때 나비 영물을 보내 수색하게 한 장소가 이 어디쯤일 텐데.

자박, 자박. 자갈돌이 신 밑창을 긁으며 굴러갔다. 가을 햇볕에 말라 단단해진 길은 보얀 흙먼지를 덮어쓰고 있었다. 수도 중심가와는 판이한 풍경.

경계 바깥으로 밀려난 외곽의 삶은 무릿매골 빈농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가난, 병, 거기다 잘 먹고 잘사는 중심부 부농들을 향한 질시와 열등감이 잡초처럼 자라나 사위에 팽배했다. 요귀들이 번식하기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듬성듬성 보이는 초라한 지붕과 찌르는 오물 냄새, 파리 꼬인 개의 사체를 지나 요귀의 기운이 드센 곳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탕 끓이려고 잡은 모양인데, 이미 썩어 버려 저리 길거리에 넝마처럼 개를 버려 두었나 보다. 속이 다 메슥거렸다.

“저기로군.”

검은 안개가 드글대는 초가집 앞에 멈춰 섰다.

신력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요력을 흡수하는 것이다. 까다로운 요귀를 신의 반상으로 던져 주면 신은 배불리 먹고 보답한다. 딱히 듬직하다곤 할 수 없으나 내 신도 배불리 요기를 퍼먹여 주면 그런대로 좋아할 것이다.

저 멀리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오는 소년이 보였다. 뒤로는 엉엉 우는 어린 남동생이 따랐다. 기껏해야 열셋, 아홉으로 보이는 소년들은 삼베를 기운 상복 차림이었고, 앞서가는 소년은 유골 대신 두툼한 거적때기를 안고 있었다.

형인 듯한 소년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손을 떨었다.

“작작 울지 못해? 동네방네 아비가 죽었다고 소문이라도 퍼뜨릴 작정이야, 너? 그러다 관아에서 시신이라도 찾으러 오면!”

윽박지르는 형의 등 뒤로 끈덕진 요귀들이 입맛을 다시며 엉겨 있다. 그 마수가 동생에게까지 뻗치기 직전이었다.

저들이로구나. 아비를 죽이고 시체를 어찌 해 보려는 것들이.

“등신 새끼야, 자꾸 울면 네 몫은 없을 줄 알아라. 굶어 뒤지고 싶지 않으면 입 닥치고 있어……! 나라고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남은 건 주승 형 갖다 줘야 하니까 제발 울음 그쳐.”

다른 형태의 인신 공희라고 할 수 있겠다. 제물을 신에게 내던지느냐, 제물로 주린 배를 채우느냐의 문제이겠으나. 먹고살 길이 꽉 막혀 인륜을 저버리고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었다.

“너, 넌 뭐야?”

하나 아비의 시신을 끊어 먹을 정도로 밑바닥으로 추락하기까지 요귀의 부추김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형제 중 심각해 보이는 형의 이마 위에 먼저 손을 가져다 댔다.

멍하니 얼어붙은 소년이 고함치기도 전에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툭, 떨어진 거적때기 밖으로 핏줄 돋은 팔 한 짝이 떨어져 나왔다.

“혀, 형!”

쓰러진 소년의 이마에 붉은 낙인을 찍자마자 수십 쌍의 요귀 눈알이 표적을 바꾸었다. 엎어진 소년의 어깨가 들썩이며 기생하던 놈이 숙주의 내장을 타고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라, 너구나. 유약한 어린애의 몸에 뻔뻔스레 기생할 처지이면 요기도 별 볼 일 없겠고.”

쓸어 담는 맛도 없겠으나 머릿수가 좀 많았다. 기어 나온 요귀는 앞선 이가 무녀임을 알아차리자마자 도망치려 들었다. 대장이 도주하니 졸개들도 꽁지에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등을 보이며 달아나려던 요귀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나를 노려보며 손톱을 세웠다.

“수로 밀어붙이려는 모양이지.”

―…….

끼긱, 끼긱, 쇠톱 긁는 소리가 거슬렸다. 저들끼리 합심해 세력을 키운 뒤 내게 무어라 경고의 말을 지껄이는데, 한숨 나오게 비루한 놈인지라 의사소통도 불가했다.

작대기처럼 뻣뻣한 저 허리부터 꺾어 놓을 작정으로 달려들었다. 숨겨 둔 은장도를 손바닥에 그어 뜨끈하게 피를 발랐다. 그 피 바른 손으로 요귀의 영핵을 찾아 움켜쥐었다. 다른 놈들은 심부나 대가리, 척추에 숨겨 놓는데, 이놈은 별스럽게 오금에 영핵을 넣어 놓고 다녔다.

당나귀 뒷발 같은 다리에 차일 뻔한 걸 피하고 녀석의 양다리를 붙들자, 손금 따라 뻗어 나간 바람이 요귀의 다리 세 개를 알맞게 잘라 냈다. 애석히도 아슬아슬하게 영핵을 빗겨 나갔다.

나는 조무래기로 우회했다. 토끼처럼 뛰어드는 요귀의 어깨를 박살 내 영핵을 깨고, 수소처럼 돌진해 오는 요귀의 다리를 걸어 안면을 찼다. 뇌수가 딱딱히 뭉친 호두알 같은 영핵들이 손안에서 하나씩 부서지고 박살 난다.

손에 묻은 지저분한 영핵 파편을 떨쳐 낼 때였다. 우두머리는 이미 등을 보이고 달아나고 있었다. 한데 그 우두머리의 영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영안을 떠도 보이질 않길래 주춤하던 차.

웬걸, 이놈이 졸개한테 제 영핵을 홀랑 주고 튀는 게 아닌가. 꼭 공놀이하듯 저들끼리 약 올리며 영핵을 받고 넘기고 지랄이 났는데 속도가 제비처럼 빨라 공격을 할라치면 빗맞히기 일쑤였다.

“제법 머리를 쓰는구나.”

한 번에 비처럼 쓸어 버릴 요량으로 심호흡을 하는 찰나. 거슬리는 소음이 사각사각 고막을 뚫었다.

“……내 몸이야.”

달려 나가려던 다리가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휘청였다. 귀를 괴롭히는 것도 홍운영, 잘 나가던 발을 걷어찬 것도 빌어먹을 홍운영이었다.

“아!”

형편없이 길바닥에 나뒹군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렸다. 어느 때보다 적의로 선명한 감정이 밀려든다. 저 여자의 분노, 후회를 비롯한 온갖 번뇌와 고통이.

통로를 열지 말걸. 힘에 부치더라도 하나씩 요귀를 때려잡을걸.

“내 것이니 이만 돌려줘.”

비척대는 내게로 요귀 떼가 스멀스멀 기어 온다. 서로가 방심한 찰나였다.

의식을 놓기 전에 달려들기 급급한 요귀의 허벅다리에 은장도를 깊숙이 박아 넣었다. 힘이 약해 제대로 꽂히기도 전에 칼 심이 두 동강 나 버렸다.

나는 갈라진 요귀의 피부에 손을 집어넣고 영핵을 찾아 맨주먹으로 깨뜨렸다. 두 번 생각해도 요귀 몸을 헤집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눈 돌아간 요귀가 팔뚝만 한 엄니로 천적을 물어뜯으려는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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