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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86)

45화

“홍사혜.”

“예. 그리고 어머니는 무당이 아닌 무녀신데…… 지금은 병증으로 자리보전 중이지만요.”

“…….”

“작금은 사정이 있어 대요귀를 봉하는 조건으로 사왕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간 감춰 와서 혹 실망하셨습니까?”

“요귀를 봉하는 조건?”

“예.”

“너는 무녀이니 따르는 신이 있겠구나.”

“조상이 대대로 바람을 부립니다.”

“그럼, 그때 네 나비는 영물이겠고.”

운혁은 놀라는 법 없이 차분히 말을 받았다. 무시근한 태도에 안도한 나는 자랑스레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붉은 바람이 반딧불처럼 두둥실 떠오르더니 곧 세 마리의 나비로 갈라져 나풀나풀 허공을 쏘아 다녔다.

이쯤 보여 주면, 세상사 무관심한 이들이 아닌 한 어지간해서는 내가 죄인 홍운영의 자손임을 알게 되어 있다. 붉은 머리카락에, 나비를 몰고 다니고 검무까지.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대감을 드러냈고 그럴 때면 사왕의 방패를 유용히 썼다. 죄인이라지만 그에게 충성하는 대가로 비호를 받고 있었으니 신변의 위협에서 멀어졌다.

한데 기운혁은 서운할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 뿐. 나라서 포용하는 건지, 혹은 죄인은 죄인이고 죄인의 후손은 별개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 모두를 개의치 않아 하는 성정인지 모르겠지만 긴장한 말문이 무색할 만치 기운혁은 무덤덤했다.

바쁘게 날아다니던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접고 그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햇볕을 담뿍 머금은 나비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전 신과 말을 나눌 형편은 못 됩니다. 영력이 뛰어난 자들은 간혹 신과 담소도 나누고 농지거리도 친다던데. 제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릴 적 잘려 버린 신목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간 속 답답히 얹혀 있던 말들이 주인 만난 듯 술술 풀어진다.

“그래도 간혹 나비들이 저들끼리 모여 속닥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가 있답니다. 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마음에 차면 응원하고 시시하면 흉도 보고.”

나는 한쪽 팔을 들어 보였다. 긴 소맷자락이 이리저리 쭉쭉 잡아당겨지는 꼴을 기운혁도 똑똑히 보았다.

“응원이니 흉본다느니 그런 건 어찌 알아.”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단정하는 것이지요.”

무녀원의 일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던 해에. 툇마루에 기진한 다리를 뻗고 하염없이 앉아 있을 적이었다. 사왕에게 귀속된 지 반년 된 시점이었고, 그동안 어머니와 격리되어 혼자 지내던 나는 문득 이 길의 끝을 가늠해 보았었다.

요귀만 잘 다져 놓으면 만나게 해 준다는 어머니는 평생을 보지 못할 것 같고, 하나뿐인 스승은 늘상 냉담하고 가차 없었으며, 훈련은 뼛골 빠지게 고되었다. 보유한 신력은 남부러울 것 없는 양인데, 일찍이 신목이 잘린 탓에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아무리 찾아 불러도 신이란 놈은 속눈썹 한 번 비춰 주질 않았고, 이대로 쓰러져 눈 감고 딱 영면에 들고 싶던 때에.

꼭 어머니의 손등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앞머리를 누르고 지나갔다. 은은한 목소리는 신의 것이라기엔 불분명하고 복잡스러웠다. 반갑기도 하고 새참한 게 꼭 여자아이의 것과 닮아서 나름대로 아기 바람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나중에 진원이 이르기를, 그것은 네가 모셔야 할 호접신이 아니라고 했으나 기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느 날은 왜 그리 힘없이 널브러져 있느냐며 달려와 엉덩이를 찼고, 어느 날은 고생했다며 등을 만져 주는데, 아무렴 신이 이리 다정할 리가 없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참 의지가 많이 되어서, 지금도 감사히 여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신께 부정을 거둔 것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언젠가 한두 마디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까지 별 소득은 없네요.”

지난 4년을 곱씹는 동안 해의 기운이 떨어졌다. 기운혁은 낙조에 물든 나의 옆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 누웠다.

나는 꼬랑지처럼 팔에 매달린 나비 하나를 잡아다가 운혁의 머리맡에 올려 두었다. 그러나 이리 낯을 가릴 줄은 몰랐다. 단정한 흑색 머리카락 위에 올라타자마자 바람 한 가닥이 험하게 그의 머리칼을 짓밟고 떠나간 것이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나를 싫어해서 그래.”

“처음 본 이를 무턱대고 밀어낼 이유가 없지요. 하물며 제가 정을 준 이인데 주인 마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말하고 보니 이상하긴 했다. 몸주신은 무녀의 심상에 큰 영향을 받는데, 내가 이리 정을 퍼 주고 챙겨 주는 사내를 냉랭히 거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싫어할 만하지.”

그는 허탈히 웃으며 시선을 비꼈다. 단정한 손길로 찻잔을 가져가 입술을 축이며 고요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싫어하다 뿐일까.”

끔찍이 증오스러울 만해.

눅눅히 가라앉은 한 마디는 내 귀에 틀어박히기도 전에 바람에 떠밀려 옅어졌다.

* * *

홍사혜가 풍림의 수호령인 호접신을 영접하지 못하는 이유는 달리 없다. 이미 그녀 곁에 다른 신이 떡하니 버티고 섰으니까.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기운혁 또한 무릿매골 살던 시절 아기보살을 다그쳐 알아내지 않았다면 일생 몰랐을 것이었다. 아니, 모르기 이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

그녀의 목에 홍운영의 영령이 올가미처럼 걸려 있었다.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도, 아군처럼 등을 두들겨 주고 응원하는 것도 다 그 여자가 틀림없었다.

홍사혜는 정체 모를 바람의 움직임을 제 신이라고 철썩 믿으며 의지하는 모양이지만, 글쎄. 그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꺼내 줄게. 내가 너를.’

‘……요귀와 섞일 대로 섞인 몸을 네까짓 게 무슨 수로.’

곱디고운 붉은 머리카락을 빼면 풍기는 분위기도, 말씨도, 나이도 조금씩 달랐다. 분명 홍운영과 홍사혜는 별개의 사람이었다.

하나 다르게 보면 또 놀랍도록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독특한 머리 색 때문일까, 같은 피가 흐르니 신기 역시 비슷해서일까.

이제 와 홍운영 그 여자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남긴 말만은 영혼에 쓰인 것처럼 또렷이 살아 있었다.

‘기유야.’

‘…….’

‘원을 씻고 천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지 않아. 그러니 더는 살생하지 말고, 내 손을 잡거라.’

기유.

기운혁으로 이름 불리기 전까지 백겁을 이름 없이 떠돈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해묵은 이름이었다. 한데 그마저도 제 진명(眞名)인지 곱씹어 보자면 모호했다. 잊힌 건지, 스스로가 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왕자로 불리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할 자식이었으며, 또 다른 이에게는 시들어 가는 연모의 대상이었다. 또 어느 욕심 많은 대감에게는 아홉 살 난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서라도 빌빌대고 싶은 신이었다.

그는 100여 년 전에도 이 땅에 존재했으며, 그보다 더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겁의 시간을 맴돌며 어느 때에는 왕자로 살다가, 죽어 요귀가 되었다가, 양갓집 공자의 거죽을 덮어쓰고 살아났다가.

그러며 생을 거듭했다. 정권이 뒤집히기 전 구(舊) 왕조 시대에, 막 인신 공희의 악습이 움트던 먼 옛날부터―.

‘네가 무슨 수로.’

동공이 새하얀 괴물이 비웃었다. 그 괴물이 바로 기운혁이었다.

찢으려거든 언제든 도륙 낼 수 있을 여린 몸뚱어리이나 구태여 한 번 더 물은 까닭은 영혼을 파헤치는 저 붉은 눈이 신기했기 때문이리라.

갓 이름을 날린 홍운영은 고작 열아홉이었으나 괴물의 껍질 속에 숨겨진 죽은 왕자의 혼을 알아보았다. 인신 공양으로 희생당한 망자의 혼을.

아득한 100년 전, 그렇게 시작되었던 연이었다.

‘확실히 천도를 하려면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긴 한데. 관혼을 치르는 거야. 한생을 못 살다 간 원혼들에게 먼저 그것을 해 주거든. 아, 너는 왕실 사람이었으니 관례는 일찍이 치렀겠다. 하면 혼인이 남겠고. 나랑 하자, 기유야.’

‘…….’

‘네가 명부에 오른 나이가 열일곱이라 하였지. 하면 내가 누이겠구나. 귀신과 결혼을 한다니. 이런 경험은 일생 다시 없을 테지만…….’

홍운영의 음성이 잔물결처럼 메아리친다. 죽은 영과 혼례를 치러서라도 제가 한 약속을 지키려 했던 아주 미련한 무녀였다.

‘도와줄게.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하지만 그 연의 끝이 어떠했던가.

기운혁은 핏기가 빠져나간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서 무수히 자라난 갈퀴 같은 손톱이 홍운영의 몸을 무자비하게 꿰뚫고, 죽음에 임박한 무녀는 혼을 태워 그를 봉했다.

손을 잡았으나 결국은 해할 운명이었다.

훗날 홍운영은 요귀를 왕성으로 끌어들였다는 죄목으로 후손까지 대대손손 반역자로 낙인이 찍혔으니, 지금도 이렇게 한을 품고 사혜의 곁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달이 휘영청 떠오른 새벽이었다. 사혜를 재우고 홀로 뒤뜰에 남겨진 그는 손바닥에 무너지듯 얼굴을 묻었다.

그 아름다운 붉은 눈에 이끌렸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를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서 보아 주던 무녀의 눈에 홀려 있었으니까.

도와주겠답시고 손을 내밀었을 때 어린 무녀에게 혹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감정이 홍운영에 대한 끌림인지, 생애 처음 제게 뻗어진 구원의 손에 동한 것인지 지금 와서 생각하자면 알 수 없었다.

떠오르는 애틋함도 미련도 갈증도 없으니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하나 분명한 건 그가 홍운영을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끔찍이도 증오스럽겠지…….”

죽어서도 후손의 곁을 맴돌며 은혜를 저버린 원수가 멸하기만을 기다릴 만큼.

지금도 보이지 않는 홍운영의 혼백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네가 홍사혜에게 허튼 마음을 품게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식시키며 원죄를 알리고 있었다.

좁아진 시야로 흐릿한 붉은 실타래가 보인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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