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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86)

14화

멍한 머리로 웅성이는 소음이 자갈자갈 스며들었다. 잔치의 주인공이 평민 애들끼리 시시덕대는 공터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듯이, 구경꾼들은 저들끼리 귀에다 입을 붙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도령을 기다리는 양반가 자제들이 많이 모였지 않습니까? 저들과 어울리시지 않고요.”

“생각해 보니 여태 네 이름을 몰랐어.”

여전히 딴소리를 해 댄다. 안 되겠다 싶은 내가 도망치듯 앞장섰다. 입의 무게가 깃털만도 못하는 애들이 주위에 깔렸고, 도령은 대화가 통하질 않았다.

나는 제자리에 버티려는 그를 질질 끌고 가 호젓한 곳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쫓아내려고 입을 떼려던 차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나 약 먹이려고 허언한 거였어?”

“예?”

“나를 걱정한 것 말이야.”

걱정이 무어 대수라고 저 한마디에 그리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으로 답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도령처럼 신분 높은 공자께서 무당의 아들과 어울린다는 잡소문이 퍼지면 도령은 물론 대감께서 곤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그러게 말이오. 평소 같았으면 그쪽의 평판이 긁히든 말든 신경 안 쓸 테지만, 돈거래와 함께 따끔한 언질까지 받은 이상에야 도리가 있을까.

“여하튼 이제부터는 안 되는 줄 아세요.”

거리를 두기 위해 부러 양손을 공손히 맞잡고 깍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도령은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건조한 눈빛이 아까 시시덕대던 양반집 애들을 대할 때와 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한 뼘 거리에서 오랫동안 그와 눈을 맞댄 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검은 눈이 삽시간에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눈초리는 가늘어지고, 양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실망이 옅게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그래, 그럼.”

1년 전처럼 웃음을 잃은 도령은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갔다. 뒤늦게 그의 손에 새총을 매단 실이 아직도 들려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가면서 그것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버렸다. 애초에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없는 실을 왜 여기까지 들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축 처진 도령의 어깨를 보니 내 마음도 썩 편치만은 않았다.

* * *

예상대로 잔치 이후엔 도령의 뒷모습만 겨우 구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종일 하는 일이라곤 윤후랑 종다래끼를 매고 풀을 뽑으러 다니거나 냇가에 그물을 치는 일뿐이었다.

한없이 무료하고, 지루했다. 도령과 함께 보낸 1년의 파급력이 꽤 큰 모양이지. 한때는 고통이었는데, 지나서 보니 나름대로 즐거웠던 모양이다.

대꾸 한마디 없는 도령에게 지칠 줄 모르고 종알대던 그때가 새삼스레 그리웠다. 그와 노닥거렸던 시간을 다른 일로 때워도 즐겁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지.

“오늘은 꽤 잡았네.”

“그러게.”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망태기에 펄떡이는 고기를 담았다. 옛적에 소루강은 질 좋은 고기들이 많았다는데, 망할 요귀가 다 잡쉈는지 요샌 코빼기도 보이질 않아 허탕만 쳤었다. 한데 오늘은 수확이 나쁘지 않았다. 윤후와 나는 손뼉을 맞부딪혔다.

녀석은 말수가 늘어서 내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려주었다. 도령과 담소할 때는 상대가 하도 말이 없어 홀로 떠들자니 민망해서 윤후와 얘기를 나누면 주고받는 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귀찮기만 하였다. 내 대답은 는적는적 설렁해졌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 댁에서 다리 저는 새끼 강아지를 얻어 왔는데 그 개가 알고 보니…….”

“어, 다 왔다.”

윤후에게는 미안하지만 인내의 한계였다. 시장에 다다라서야 딴 곳으로 주위를 돌릴 수 있었다.

오늘 치 잡은 양을 팔러 시전을 돌아다니는데, 멀리서 서책을 끼고 홀로 걸어가는 도령의 뒷모습이 보였다.

부잣집 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질반질 내고 다녔다. 폐포파립 행색이어도 감추기 힘든 용모인데, 잘 차려입으니 이제는 감히 말도 못 걸겠다. 절로 시선이 갈 만큼 몰라보게 달라졌다.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구나.

“버들아, 오늘 치 몫이야. 수고했어.”

그네들은 그네들이고, 생업이 바쁜 나는 하루 종일 잡은 물고기를 팔고 얻은 엽전을 윤후와 양분했다.

다시 고기잡이를 떠나고, 시장으로 내다 팔러 오고. 그때마다 종종 글방을 드나드는 도령을 목격하였는데, 잔칫날 보았던 그 많은 친우들은 어디로 던져두고 온 건지 늘 혼자였다. 흠모하는 뭇 여인들의 시선이야 무수히 달고 다녔지만 정작 옆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다들 도령의 드센 성질머리를 못 견디고 나가떨어졌나 보다. 혼자 쏘다니는 도령을 보자니 나는 또 마음이 언짢아지고 말았다. 걱정도 되었다. 어찌 됐건 1년 동안 내가 먹이고 돌본 이였으니까.

녀석이 잘 지내나 엿보는 건 지루한 일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이 되어 있었다. 한데 보름째가 되어서는 그마저도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의아해진 내가 애들에게 도령의 행적을 물으니,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단다. 그렇담 나만 못 보았나.

그러다 어느 날 도령의 소식을 들었다. 마을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무릿매골 끄트머리에 사는 윤후의 귀에까지 들어와, 나에게 닿았다. 아주 잘 살고 있다는 게 그 내용이었으며,

“늘상 친우들에게 둘러싸여 지낸대.”

“어딜 가나 늘 따라붙어서 도령을 웃겨 주는 양반집 아이들이 있다는데.”

난희와 아라도 같은 증언을 하였다. 내가 전에 본 것과 크게 다른 내용이었다.

그새 벗을 사귀었구나. 가탈스런 성질은 좀 죽이셨나.

잔칫날 다른 이들은 다 제쳐 두고 나만 쫓던 도령이 머릿속을 스치니 어이없게도 약간 섭섭해졌다. 그 친구란 자들이 누군지도 궁금했다.

저잣거리를 기웃거리는 시간이 늘었다. 노상 죽친 끝에 도령을 볼 수 있었다. 한데 내 눈에는 여전히 달고 다니는 시동 한 명 없이 늘 혼자였다. 말의 앞뒤가 다르지 않나.

“아까 돌다리를 지나다 봤어.”

어김없이 도령이 제 친구들과 가는 모습을 보았더라며 아라가 알려 왔다. 의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나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곧장 달려갔다. 과연 소문대로 도령의 주위에 너덧 명의 또래 사내애들이 왁자하게 모여 있었는데…….

두 눈을 의심했다. 도령에게 들붙은 사내애들 다섯. 목부터 발, 옷까지 먹처럼 시꺼멓다. 눈코입은 형체만 달려 있고, 옷깃도 형체만 있고, 그림자처럼 생기 없는 게 꼭 어디서 본 마냥 익숙했다.

“윤후야. 저것들 보여?”

“보이지 그럼.”

얼결에 나를 따라온 윤후는 창백해진 내게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저 괴물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은 건가.

“저 오른쪽 사내애, 머리에 두른 띠가 율주국에서만 난다는 식물 껍질로 천을 짜서 만든 귀한 것이라던데.”

녀석의 눈에는 멀쩡한 사람처럼 모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윤후뿐만 아니라 도령의 눈에도. 그는 새까만 진액 덩어리 같은 것들과 친근히 어깨동무를 하며 걷고 있었다.

“정말, 안 보인단 말이야?”

“너 왜 그래?”

빌어먹을 요귀들이 사람 흉내를 내며 도령에게 태연히 말을 건네고, 벌쭉 웃으며 떠들기까지 하는데 내 표정이 멀쩡할 리가. 이마에 식은땀이 주륵 맺혔다.

“저들 누구야? 어느 양반 댁 자제야?”

“모르겠어. 버들아, 어디 아파? 뭘 보았길래 사달이야?”

“먼저 가.”

나는 성가신 손을 잡아 떼고 무리를 쫓아 달음박질했다.

그들은 번화가를 따라 걸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팔각정의 못을 지나 북적이는 저자를 지나갈 때도, 그 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걷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령을 알아보는 이들은 인사를 건네고, 그는 받았다.

대화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피어났다. 마치 대감의 누각 위에서처럼.

음영 진 골목길을 지날 때, 도령의 옆구리에 매달린 그림자 두엇이 쑥 사라졌다. 그러다 다시 밝은 대로로 나왔을 때 귀신처럼 홀연히 나타나 도령의 곁을 걷는 게 아닌가.

더러운 농간이었다. 도령은 의심이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웃으며 뒤를 돌고, 놈들과 장난을 쳐 대니 그 꼴을 가만 볼 수가 없었다.

“도령!”

외진 사잇길에서 두 팔 벌려 그를 막아섰다. 도령은 진즉 내 존재를 알아챘고, 두 눈이 마주쳤는데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본체만체하니 그 시선에 또 속이 따끔거렸다.

도령은 앞을 막아선 나를 무감하게 훑더니 잔칫날 나의 언행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공자의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어.”

뛰어오느라 숨이 찼다. 허리를 굽히고 헐떡이는 날 다섯 쌍의 시선이 지켜보고 있었다.

시뻘건 동공이 방해물인 내게 모였다. 붉은 눈알. 외수없이 요귀의 것이었다. 끓어 넘치는 악의에 등골로 오한이 일었다.

“도령, 후, 잠시만. 잠시만 얘기를.”

“나는 할 말이 없는데.”

“잠깐이면 됩니다.”

“그럼 해, 지금.”

“그, 친우분들을 물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둘이서 나누었으면 하는데.”

기이하게 넘실대는 그림자가 위협적으로 걸음을 좁혀왔다. 가지처럼 앙상한 놈들의 손끝으로 길쭉한 손톱이 보인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 놈은 방해 말라는 듯 뜯어 먹을 요리처럼 나를 보고, 다른 두 놈은 도령에게 간살스럽게 입을 버끔거렸다. 내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웅웅거리는 소음뿐인데, 도령의 귀로는 사람 말로 들리는지 중간에 인상을 쓰기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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