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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86)

7화

고즈넉한 길을 설렁설렁 걸으며 평화로운 한때를 만끽했다. 어머니와 약속한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떠나면 당분간은 자리 잡기까지 또 고생길 시작이겠지.

정들라치면 버려 두고 가야 한다니. 의지할 친구는 꿈도 못 꾸고, 내 팔자에 정인이니 무어니 일평생 없을 게 분명해 가끔은 무얼 위해 사나 싶지만, 어머니처럼 상심할 바엔 마음 줄 것을 아예 두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바깥채로 나오니 마당을 서성이는 기씨 대감이 보였다. 그는 뒤를 돌아선 채 흙을 파내듯 이상하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슬쩍 인사드리고 갈까 하는데 대감이 먼저 나를 발견했다.

“이제 돌아가는 모양이지.”

“예, 대감님.”

“내 아들의 상태는 좀 어떤가. 그 애가 낫기를 비는 늙은이의 염이 신께 닿으면 좋으련만. 내 정성이 부족한지 답이 없으시네.”

“어머니께서 열심히 치성을 드리고 있습니다.”

“홍씨의 노고는 나도 잘 아는 바지.”

대감이 허연 거스러미가 인 입술을 휘었다.

한갓 빈촌에 거하는 내게도 친절한 말씨를 쓰는 까닭은 아마 내가 도령을 돌보는 무녀의 자식이어서 일 것이다. 콧대가 하늘 마루에 달린 양반들처럼 아랫사람을 깔보고 거드름 피우지도 않으니, 과연 대감은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만했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대감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이웃과 살림을 나누는 대인배고 인망 높은 지도자인 것은 알겠다. 쓰러지는 가세를 물동이로 일으켜 세울 만치 사업 수완이 뛰어난 것도 인정한다. 하나 좋은 아비는 못되지 않나.

내가 풀 방구리 드나들 듯 도령의 전각을 오갈 동안 대감은 한시도 아들을 찾지 않았다. 지극정성인 말로만 안부를 묻는 것이다.

의뭉스러운 면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대감의 시비를 찾다가 작약이 흐드러진 화원을 발견해 그리로 간 적이 있다. 잘 조성된 꽃밭이 있고, 더 가니 작은 못이 있고, 그 위에 단촐한 누각이 떠 있고, 가가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각에 둘러쳐진 주렴 위로 그림자만 넘실거렸다. 해가 기울 때까지 거기서 거문고 타는 소리가 이어졌는데, 막상 누각에서 나온 사람은 대감 한 명뿐이었다.

그날 나는 몹시 노곤했으니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뒷맛이 영 찝찌름했다.

“막내의 상태가 어떠하던.”

“나날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는 운명이라던 어머니의 말은 잠시 외면하고 내가 본 것만을 고했다.

“최근엔 매병 증세도 보이지 않았어요.”

“쯧……. 그러한가.”

되돌아오는 반응은 삭막했다. 잿빛 털이 듬성듬성 난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떫게 입맛만 다신다. 아들이 회복되어 간다는데 물구나무서서 깨춤은 고사하고 안도하는 티라도 내야지 않겠나. 누가 보면 실망한 줄로 알겠다.

“쾌차한다니 다행이군.”

갑자기 도령이 불쌍해졌다. 대감은 병을 짊어지고 사는 막내아들을 썩 귀애하지 않는 듯했다. 보는 눈이 많아 염려하는 척할 뿐.

가식의 연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나라는 대다수의 남아가 가문을 잇고 일가를 책임진다. 무녀 같은 특수 전제하에 여자가 가주 자리를 물려받기도 하지만 드물었다. 사내는 가문의 얼굴이었다. 시대가 그리 옹졸했다.

병든 불초자는 쓸모를 잃는 법. 기씨 대감에게는 다른 건장한 아들이 있으니, 남 보여 주기 껄끄러운 막내 도령이 못마땅할 만하다.

하지만 어엿한 자식인데.

“이만 가 보거라.”

대감이 느적느적 손사래를 치고 멀어졌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북두성이 쏟아지는 도령의 전각을 건너다보았다.

안채와 덜렁 떨어진 그곳은 망망대해에 부표한 섬 같았다. 외로운 바람이 손짓하며 지나가는 마당은 상주하는 시비 없이 적막하여 몇 그루 없는 나무마저 초라해 보였다. 그 고요함을 메우려는 신경질적인 투정이 예까지 들리는 듯했다.

조금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지가 멀쩡한데도 미령해 꼼짝을 못하니 그 취급은 말할 것 없고, 가족은 있으나 마나고. 적자인데도 버려진 개처럼 바깥으로 밀려난 처지라니.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살아 봤자였다. 사는 동안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했을 게 분명하고, 가족의 사랑도 품어 본 지 오래일 것이다.

나는 도령에게 옅은 동질감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 * *

“버들아.”

푸성귀 바구니를 끼고 터벅터벅 경사길을 오르는데 아라가 내 앞길에 발을 걸쳤다. 무릿매골에 온 봄부터 내 뒤를 밟던 갖바치 딸은 소금 뿌린 찐 감자 여섯 알을 수줍게 내밀었다.

“이거. 어머니랑 너랑, 세 알씩 먹어.”

“고마워.”

평소와 다르게 아라는 그대로 달아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머뭇거렸다. 그것이 의외라 잠시, 함께 머뭇거리던 나는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께도 감사하다 전해 드려 아라야.”

“밭일 끝나고 집에 가는 거야?”

“그래.”

“덥겠다. 이제 점심 먹고 도령한테 가겠구나.”

나는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나를 사내로 여기고 언젠가 제 짝으로 만드리라 투지에 불탄 여자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속 시원하게 정체를 밝히고, 아라랑 난희랑 다 함께 친구 먹고 또래 여자애들 하듯이 서로 머리나 땋아 주며 단감이나 나눠 먹는 게 소원이었다.

“참, 미치광이 도령 하니 생각났는데. 어젯밤 난리도 아니었다면서. 대감님이 도령 처소를 찾았는데 글쎄…….”

나는 눈을 찡그렸다. 전해 들은 게 없었다. 그런데 기씨 댁 근처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알음알음 어젯밤 일이 소문으로 퍼진 모양이었다. 내 거처는 마을 중앙과 한참 떨어진 빈촌이라 소문이 따라오지 못한 것이고.

“아직 모르는구나. 대감님께서 도령을 찾았는데 묻는 말에 대꾸도 없이 헛소리를 하더라는 거야. 그 탓에 대감님이 잔뜩 노하셔서 얼굴에 손찌검까지 하셨다던데. 그런 사람을 돌봐야 한다니. 버들아 네가 고생이 정말 많아.”

“손찌검?”

“으응, 그렇다던데.”

묵직한 감자의 무게를 느끼며 뒤돌아섰다. 나는 그길로 방향을 바꿔 달리듯 걸어갔다. 도령의 전각에 다다랐을 땐 땀이 비처럼 솟고 목이 텁텁했다.

“도령.”

그는 처소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었다. 사달이 났다고 들었는데, 마당이며 대청이며 어수선한 흔적이 없고 어제처럼 적요하였다. 하나, 매일같이 내 신발코를 쫓던 눈동자는 마중 나오지 않아서 역시 뭔가 있구나, 짐작만 했다.

“왜 이리 일찍 왔어.”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투로 물었다. 나는 도령을 볼 수 없으니 맞은 흔적도 모르겠고, 그러니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 발견해야 했다.

내놓고 물어봤다가는 저 자존심 센 양반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놀이로 연막을 깔고 대답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다른 놀이를 해 봐요.”

“무언데.”

“차례로 말을 받는 것인데, 도령께서 질문을 하시면 내가 받고, 내가 물으면 도령이 답을 하는 겁니다.”

“해 봐.”

“먼저 기회를 드리지요.”

그렇다 한들 적막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는 도령이 내게 뭐라도 물을 줄 알았다.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하등 쓸모없는 소일거리라도 관심 가져 줄 줄 알았는데 도령은 진심으로 내 무엇도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묻는 척도 없었다.

“글쎄.”

“그래요. 없는 줄 알고, 그럼 이제 내 차롑니다. 엊저녁엔 무얼 드셨습니까?”

“네가 준 감자를 으깨서 전을 부쳐 먹었던가.”

“한데 오늘은 왜 제 눈도 안 보고 꽁꽁 숨어 계시지요?”

“차례로 말을 받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내 순서는 넘기는구나.”

“제게 궁금한 것도 없잖습니까. 생기거든 모아 뒀다가 언제든 물으십시오. 제가 없는 시간 동안 무얼 하십니까?”

“그저 무료하지.”

“저런. 침소에 드시기 전 먹는 약을 어제는 누가 가져다주었지요?”

“아버지가.”

의미 없는 말 받기 놀이는 계속되었다. 이것저것 묻다 보니 추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상대도 그걸 아는지 대답이 뜨문뜨문 느려진다. 숨겨 둔 덫을 조용히 파낼 때가 되었다.

“도령께서 어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들었는데. 그 탓에 대감이 노하셨고요.”

어느 순간 방 너머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왜 그랬습니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정신은 있어야 할 곳에 처음부터 끝까지 붙박여 있었다. 심술궂은 변덕이 아닌 한 그의 태도는 대감 앞에서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단순한 변덕이 아님을 알았다.

매병이 심해 상종하기도 힘들다던 도령은 어느 순간부터 몹시도 멀쩡한 사람처럼 대화를 했다. 정신 나간 듯 굴다가도 내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한 마디도 놓치는 법이 없었으며, 미친놈처럼 바닥을 긁는 와중에도 내 진저리치는 반응을 즐기고 더 할지 말지를 결정했다.

농을 건네면 웃지는 않되 그게 농이란 건 알았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시늉을 하면서 전부 알아먹는 매병 환자가 또 있을까.

처방하는 약의 종류를 바꾼 것도, 그렇다고 도령이 따로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을 한다던가 대감이 애를 쓴 흔적도 없었다.

어머니 이전에 왔다 간 의원들은 하나같이 손쓸 방법이 없다며 부정을 표했고, 어머니는 도령의 안위에는 관심 없이 오로지 밥벌이를 위해 의무적으로 굿을 해 주었을 뿐이다.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처지는 비슷한데, 기이하게도 그의 정신이 맑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라에게 도령의 기행과 대감의 분노에 대한 말을 들었을 때 의심은 한 뼘이나 더 자라 있었다.

이자, 애당초 매병을 앓은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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