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또 다른 북방. (1)
추운 겨울 북방의 날씨를 대비해 나이기온 옷을 챙기는 한편 부산포에 만든 조선소의 핵심 장인들도 배에 태웠다.
말라카로 다녀오는 바닷길이 험하고, 태풍이 자주 몰아친다고는 하지만, 여러 섬들이 많은 남방과 태평양의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북방은 그 파도 자체가 달랐다.
해서 배 만드는 장인들에게 북방의 파도를 경험시켜 주고, 그런 파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배를 만들 수 있게 체험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동해 해안션을 따라 선단이 올라가면서 단천에서 김고도개를 내리게 했다.
“듣기로 함경도 일대에 납에서 은을 뽑아내는 기예를 가진 이가 있다고 하던데, 고도개 자네가 한번 알아봐 주게나. 듣기로는 자네처럼 귀화한 여진인이라고 하니 자네가 이 일에 딱 맞네."
한마디로 연은분리법(分離法)을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본래 연산군 시절인 1503년이 최초의 기록인데, 임금 앞에 나설 정도로 준비가 되었다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와 관련된 기술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김고도개가 찾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납과 은의 녹는 온도 차에 따른 추출법이라 전국에서 모은 유기장인과 대장장이들에게 얼개를 가르쳐 추출법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의 앞에서 기예를 시연했던 광산 일꾼 김감불이나 김검동이 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귀화 여진인으로 추측되었기에 귀화 성공 사례를 찾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압록강변에 사는 여진인들은 물론이고 야인으로 평원에서 사는 여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에 귀화하거나 귀화하지 않더라도 여진인들을 대우하고 있고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사례로 보여줘야 조선인과 여진인들이 자연스레 섞여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북방의 안정을 위해서는 이런 동화정책이 최우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함경도와 두만강을 지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서 북쪽으로 쭉 올라갔다.
발해방이 개척한 동해를 건너는 포인트는 꽤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거의 사할린에 닿을 정도까지 북쪽으로 올라온 이후에야 배를 동쪽으로 움직였다.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조금 달라지지만 여기서 북서풍을 타면 사흘 만에 북해도라고 불리는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시 조선으로 갈 때는 어찌 움직이는가?"
"그때는 내려오는 북서풍을 타고 좀 더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해류의 방향이 바뀌는데, 그 해류를 타고 서쪽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쪽으로 움직이다 보면 다시 동풍이 불어오게 되는데, 그 바람을 타면 두만강 유역까지 바로 갈 수 있습니다."
고형만의 말에 따르면 다름의 삼각 운항로가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다.
추운 북서풍의 바람을 타고 사흘을 남쪽으로 내려오자. 그의 말처럼 북해도의 서쪽 끝자락인 곳이 나왔고 바로 옆으로 섬도 두 개가 있어 어업에 알맞은 땅이었다.
"저기가 가장 처음 만들었던 해몰이 마을입니다.”
수정을 깎아 만든 망원경으로 보자 수십 척의 배를 보고 놀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발해방 친구들을 공격했던 이들이니 상륙하여 공격한다. 대운선 1, 2호는 측면으로 붙어 화포로ㅇ기세를 올리고, 다른 배들은 그때 상륙한다.”
대마도와 일기도에 상륙 후 공격하는 재미를 아는 박투르안은 벌써 말을 끌어내어 내달릴 준비를 했고, 승선 총통에 화약을 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가 다가가니 대항하려고 하는 자는 없었고, 수확 중이던 밀과 보리의 자루를 놔둔 채 다들 도망을 쳐버렸다.
"목적대로 곡식을 챙겨라 2 호위대와 수군 200명은 창을 들고 인근 아이누 부락으로 향한다."
고형만과 발해방의 사람들이 앞장서서 아이누 부락으로 가니, 아이누인들이 나와서 우릴 맞아 주었다.
모두 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복수를 원하는 고형만은 어서 공격하길 원했으나 비무장인 이들을 몰살시킬 정도로 호위대나 수군들은 악에 받쳐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이가 나와서 말을 했기에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우리와 발해방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싸우게 만들었던 이들은 남쪽의 마을로 갔소이다. 그 혀에 놀아난 우리가 아둔했소.”
아이누족들은 개간한 땅에서 많은 수확물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발해방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앞으로는 개간을 할 거라고도 했다.
“그런 사과로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 법이오. 사람의 목숨은 오로지 사람의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거요."
칼을 뽑아 든 고형만은 당장이라도 칼을 내지를 준비를 했다.
"오해요. 우리 이태랑기 부족은 홈쿠시 부족이 나설 때 도와주지 않았소. 우린 발해방 사람들의죽음에 관여하지 않았소."
"홍. 다 같은 아이누족이 아닌가? 단주님! 저 말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저렇게 말하곤 뒤에서 기습을 하는 놈들입니다."
두 의견을 들은 원종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깔끔하게 그냥 몰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땅도 가질 수 있고, 발해방 사람들의 충성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발해방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부족을 씨몰살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문제였다.
원종은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짊어질 수 있는 것들을 짊어지고 이 땅을 떠나시오. 이렇게 일을 만든 훔쿠시 부족에게 가도 좋고, 아니면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도 좋소.”
“단주!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이 대물림되고 쳇바퀴처럼 돌아올 것이오. 죽음을 땅으로 받읍시다. 조상들이 죽음으로 개척한 땅만큼 값진 땅은 없을 것이오. 발해방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희생으로 얻은 이 땅을
고맙게 여길 것이오."
발해방 사람들은 내가 싸우지 않을 거라는 말에 실망을 했다.
“하지만,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여겨, 이태랑기 부족을 공격할 것이오. 이들의 시간을 주겠소. 떠나든지 죽든지 부족장이 판단하시오."
땅을 넘기지 않고 버티면 죽일 수 있다는 말을 들자 발해방 사람들은 다시 기대를 했다.
이태랑기 부족이 떠나지 않고, 남으면 복수할 수 있다고 빨리 이틀이 지나길 빌었다.
***
"아버님 어찌하실 겁니까?"
이태랑기 부족의 부족장인 쿠타키는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 자식들과 장로들의 말에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물론, 곰도 수백 마리를 실을 거 같은 큰 배가 무려 15척이나 되었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버릴 수 없다면 결국 싸워야 하는데, 수적으로 봐도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애초에 큰 배가 왔다고 했을 때 싸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고, 발해방 사람들의 저력을 알기에 홈쿠시 부족이 함께 하자고 할 때도 나서지 않은 것이었다.
맞서 싸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결국 땅을 떠나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가 문제였다.
일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홈쿠시 부족으로 가서 더부살이를 하는 것이 가장 편했지만, 그렇게 되면 이태랑기 부족이 아니라 훔쿠시 부족이 될 뿐이었다.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 같아 보였지만, 문제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터전을 버리고 모르는 땅에서 겨울을 나다가는 늙은이들과 어린이들이 먼저 죽어갈 터였다.
땅을 버리고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해 보이는 판단 같지만 가장 아둔한 판단인 것이었다.
쿠타키 부족장은 어떤 것을 선택해야 부족이 살아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길 듣기로는 오늘 온 사람들이 모두 다 발해방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어디 사람이지?"
“조선 사람이라고 하는데, 발해방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응? 그렇다면 같은 사람들이라도 부족이 다르다는 말이냐?"
“아마도 우리들처럼 부족이 다른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 보니 조선족이라 불리는 부족이 큰 것 같고 발해방 부족이 그 밑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본 것이 맞다면 우리가 살아날 방도가 있겠구나."
쿠타키 족장은 예법에 맞게 딸을 꾸미게 했고, 부족에서 소중히 여기는 검은 곰의 가죽과 여러 예물을 준비했다.
그러곤 아침이 되자 전 부족원이 줄을 지어 해몰이 마을로 움직였다.
병사들이 제지를 하자 쿠타키 족장부터 땅에 엎드렸고, 다른 이들도 땅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를 않았다.
"저들이 하는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태랑기 부족이 드려 있는 기행의 뜻을 몰랐기에 다들 나와 구경을 했다.
“어린 여자아이를 맨 앞에 앞장세운 것을 보니 여자를 받치고 자비를 구하는 행위 같습니다.
남방의 소국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염호진의 말에 원종도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조선 부족의 밑으로 이태랑기 부족이 들어가고자 합니다. 조선족이 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부족장이 조선족이 되고 싶다고 하자, 원종은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부정적인 의미가 되어 버린 조선족이 되겠다고 공물과 여자아이를 가져다 바치는 게 코미디 같았다.
물론, 당사자인 이태랑기 부족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진심이었다.
“조선 사람이 되려면 우리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게 살 수 있겠나? 여자들의 입 주위로 한 문신부터 금지를 시킬 것이고, 입고 있는 옷도 우리와 같은 옷으로 바꿔입게 할거네.”
“그렇게만 하면 조선족으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거기에 말도 조선어를 써야 하네.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생활과 삶을 모두 다 조선 사람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나?"
쿠타키 부족장은 마을의 장로들에게 눈짓으로 물었고, 답을 받았다.
“이 땅에서 살 수만 있다면 이제는 이태랑기 부족이 아니라 조선족의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부족의 정체성을 버려가면서도 살기 위한 선택을 하는 이들을 보니 뭔가 북해도를 식민지로 경영할 수 있는 방법이 보였다.
다만, 문제는 고형만이었다.
이태랑기 부족은 발해방 사람들을 죽이는 데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참여한 부족들은 무조건 죽이자고 할 것이 뻔했다.
“고 선장. 이들은 발해방의 혈사에 관여치 않았다고 하니, 우리 조선인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네. 물론, 그날에 직접 관여한 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네. 그렇게 해도 되겠는가?”
원종이 말은 그렇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통보였다.
이 해몰이 마을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가며 있는 마을에서도 같은 일이 생기면 조선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고형만은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없게 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약조를 하나 해주십시오. 혈사에 참여한 아이누족들은 다 죽이겠다고. 그들이 이렇게 귀부를 한다고 해도 피를 흘리게 만든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그날 피를 보았던 부족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네."
***
조선족이 되겠다는 이태랑기 부족에게는 그 부족 이름에서 따온 이(李)씨 성을 내려 이름부터 바꾸게 했다.
북해도 이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었다.
해몰이 마을은 북해도 이씨들의 집성촌이 되게끔 했고, 의복을 내렸다.
상단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했던 이들이 이태랑기 부족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조선말을 가르쳤고, 인쇄기로 찍어 만든 삼강오륜을 교본 삼아 행동 양식도 가르치게 했다.
“다음 마을로 내려가지.”
원종은 다음 마을로 움직이면서도 고형만과 발해방 사람들이 선을 넘어 혈겁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