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91화 (291/327)

291. 가베를 마시다.

염호진이 쌀 1말 정도 들어가는 천 주머니를 내밀었는데, 원종은 주머니 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 주머니에서 살랑살랑거리며 풍겨 나오는 향기만으로도 커피가 주머니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염호진에게서 빼앗듯이 주머니를 낚아채서는 주머니를 열어 머리를 집어넣었다.

"으음~햐~~죽이는 향기네."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검게 그을려 로스팅된 커피의 향이 코를 타고 머리를 적시는 것 같았다.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커피의 냄새인가.

콩을 반으로 가른 듯한 모습의 플랫 빈(flat bean)이 주머니에 한가득 들어 있자 기분이 좋아졌다.

“놋화로에 불붙은 숯을 넣어서 얼른 가지고 오거라!"

일꾼들이 화로를 준비하는 동안 원종은 주머니 속의 원두를 꺼내 보았다.

원두를 감싸고 있는 내과피까지 깔끔하게 벗겨져서 로스팅이 되어 있었는데, 두 쪽으로 나뉘어 있는 콩의 센터 컷 (center cut)이 물결무늬였다.

아라비카 (arabica) 커피였다.

커피콩을 한알 한알 들어 냄새를 맡아보니 로스팅된 지 6개월 이상은 된 것 같았다.

커피의 종자가 유출되지 않게 불에 그을려 파는 것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불붙은 숯이 화로에 담겨 방으로 들어오자 원종은 화로의 숲을 뒤집는데 쓰이는 놋 부삽 4개를 교차시켜 그릇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위에 물을 담은 황동 그릇을 올리고는 물이 끓길 기다렸다.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니구나."

후추를 갈아 먹을 수 있게 만들었던 청동 그라인더를 가져와서는 원두를 조심스레 갈았다.

바싹 마른 원두가 뽀각거리며 그라인드에 갈리는 소리만으로도 원종의 입이 귀에 걸렸다.

“도대체 이 갈색 콩이 무엇이길래 이리 좋아하시는 겁니까?"

“하하하. 염 선장에게도 줄 것이니 기다리게나. 깜짝 놀랄 것이야. 어이쿠 물이 끓는구만."

황동 그릇의 물이 끓어오르자 곱게 갈린 원두 가루를 물에 넣었는데, 끓는 거품이 일어나며 솟구쳤다.

원종은 커피가 넘치지 않게 찻숟가락으로 휘저으며 황동 그릇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계속 저어댔다.

"오오. 이 냄새 끝내주지 않는가?"

원종이 끓어오르며 퍼지는 커피 냄새에 코를 벌렁거리며 좋아하자, 염호진도 일단은 좋아하는 척했다.

어느 정도 끓던 커피 물이 줄어들었고, 거품이 사라지자, 설탕을 두 숟가락 넣고는 황동 잔을 불 위에서 꺼내었다.

그러곤 말라카에 수출하겠다고 만들었던 작은 자기 찻잔에 걸쭉해 보이는 검은 커피를 부었다.

"자 어서 들게나.”

원종은 염호진이 마시는 걸 신경 쓰지도 않고, 자신의 찻잔부터 집어 들었다.

“그래. 이 향기야. 이 냄새."

코앞에서 잔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냄새를 맡았는데, 에스프레소와는 다른 강한 커피 향에 머리가 다 쭈뼛쭈뼛 서는 거 같았다.

그리고 입에 댄 커피는 이제까지 잊고 살았던 쓰디쓰면서도 고소한 맛을 원종의 혀에 안겨 주었다.

"아! 이거지! 좋다!"

에스프레소 기계가 없기에 강력한 커피의 향과 맛을 보기 위해 터키식 커피로 만들었는데, 제대로 된 선택이었다.

물론, 원두 가루를 걸러내지 않았기에 원두 가루가 입에서 거슬리고 이빨 사이에 끼긴 했지만, 아무렴 어떠랴. 커피인데.

두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도 카페인이 올라오는 건지 기분이 좋아졌고, 쓰면서도 고소하고, 설탕을 넣어 달콤한 맛까지 나는 커피에 대만족을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 어디 따로 있나, 지금 이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 극락인 것이지.

절로 나오는 미소와 혀의 즐거움에 금세 커피는 바닥을 드러내었다.

터키에서는 커피잔 바닥에 깔리는 커피 가루로 점을 보기 위해 잔을 뒤집는다고 하지만, 원종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잔 바닥에 깔린 가루도 모아서 종이나 명주 천으로 드롭 커피를 해먹을 생각부터 했다.

“자네가 안 먹는다면 내가 먹어도 되나?”

"네에?"

원종이 워낙에 좋아하며 검은 흑물을 홀짝거리는 바람에 염호진은 잔만 들고 그냥 멍하게 원종을 보기만 했었다.

염호진이 보기에는 검은 흑물이 한약처럼 독해 보였고, 뭔가 마시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았는데, 단주가 저리 좋아하니 자신도 한번 먹어 봐야겠다고 입으로 잔을 가져갔다.

"쿠헥. 켁켁 이게 도대체 무슨 맛입니까? 저에게 주신 것이 맛이 이상한 것입니까?"

"무슨 소리인가? 저 활동 잔에서 같이 나누었지 않은가. 맛이 없다면 이리 내게 내가 다 먹겠네."

염호진은 이미 자신이 입을 대서 마시던 것까지 욕심내는 원종의 모습이 이채로워 억지로라도 흑물을 다 마셔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단주가 저리 좋아하니 뭔가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게 혀끝에 쓴맛이 느껴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네. 그 쓴맛이 이 차의 진면목이네."

원종은 다시 화로에 물을 올리고, 원두를 갈면서 염호진에게 커피의 맛을 설명하고 있었다.

염호진도 원종의 설명을 듣고는 조금씩 홀짝거리며 쓴맛을 느끼려고 했다.

쓰디쓴 맛의 뒤로 설탕의 단맛과 고소한 풍취가 있기는 했지만, 이것이 그렇게나 단주가 열광하는 맛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하하. 처음 먹었을 때는 잘 모르지. 그러면 이렇게 한번 마셔 보게나."

다시 터키식으로 끓여낸 커피를 고운 무명천 세 장을 겹쳐서 커피 가루를 걸러내었고, 그렇게 모아진 커피에 설탕과 방금 짜서 가져온 우유를 조금 넣어줬다.

검은색에서 갈색으로 변한 커피를 염호진에게 다시 먹게 했는데, 염호진은 또 씁쓸한 맛이겠구나 하며 입을 대었다.

"오! 달달하고 부드럽습니다. 쓴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구요. 이렇게 먹으니 맛있습니다."

"하하하. 이것이 우설탕 가베라네."

“우설이란 말이 소우(牛) 자에 설탕을 넣은 거라는 것은 알겠는데, 가베는 무엇입니까요?"

"아, 이 검게 구운 콩이 나오는 원산지의 이름이 카파(Kaffa)라고 하네. 그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지, 우리가 말라카에 가는 거리의 3배 정도를 서쪽으로 더 가게 되면 검은 피부의 곤륜노보다도 더 검은 사람들이 사는 땅이 나오네. 그곳에 에티오피아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

고원지대에서 자라는 것이 바로 이 가베 콩이네."

커피가 영어로 커피 coffee이지, 프랑스어로는 cafe, 이태리어로는 caffe, 터키어 로는 Kahveh로 불릴 정도로 각국의 언어에 맞게 이름이 불렸다.

그래서 그냥 영어식으로 커피라고 해도 되지만, 우리나라 말에 맞게 가베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단주님은 이런 것을 어디서 다 보신 것입니까요?"

“흠흠. 명나라의 정화 태감의 여행기에 보면 나와 있네. 정화 태감이 그 검은 피부의 묵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이 가베 콩을 봤다고 쓰여 있었어. 거기다 말라카에서 만났던 회교도들이 하는 말을 들었었지. 크흠.”

다행히 정화 태감의 항해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까지 갔었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커피의 존재를 둘러댈 수 있었다.

우유와 설탕을 넣은 우설탕 가베를 염호진이 좋아하자, 다른 이들에게도 타 주었고, 각자 먹고 남은 커피 가루는 종이를 삼각뿔로 만들어 드롭 커피로도 뜨거운 물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연하게 만들어서 들고 다니며 마시는 것이 참으로 좋네."

“저희는 우유와 설탕 맛으로 먹는데, 단주님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쓴 가베를 맛있다고 마시니 참으로 신기합니다.”

"하하하. 시간이 지나면 자네들도 자연스레 이 물에 섞은 가베를 좋아하게 될 거네. 헌데, 염 선장 가베 콩을 얼마 정도 들고 온 건가?"

"네? 아까 드린 그 주머니가 전부이옵니다."

"뭐어?"

상단 사람들에게 다들 마셔 보라고 한 잔씩 돌리고 하며 주머니의 콩을 절반 가까이 썼는데, 가지고 온 것이 이거밖에 없다고 하자 머리가 멍했다.

"이 콩이 회교도들의 성직자들만이 먹는 콩이라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잘 팔지를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상단주님이 이야기를 했기에 겨우겨우 사정을 해서 석달래가 가져왔다고 합니다.”

“허허허. 이게 전부라니."

아무리 아껴 먹어도 한 달이면 다 마실 것 같았기에 벌써부터 커피 금단 증상이 오는 것 같았다.

커피콩을 구하기 위해 에티오피아까지 배를 보내고 싶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에티오피아에ㅇ사람을 보낸다고 해도 원하는 만큼 커피콩을 구해 올 수가 없었다.

당시 이슬람에서는 커피를 음료로 마신 게 아니라 밤 기도 시간에 졸음을 쫓기 위한 약으로서 커피 열매를 씹어 먹었었다.

커피콩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가 체리 모양이고 쌉싸름한 맛을 내었기에 로스팅을 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생으로 먹은 것이었다.

헌데, 이 커피 열매가 잠을 쫓는 것은 물론이고, 성적으로도 민감하게 작용을 하게 되자 이슬람의 성직자들은 이 열매를 밖으로 유출되지 않게 엄격히 통제를 했었다.

그래서, 멀리 있는 다른 성직자들에게 커피 열매를 보낼 때도 발아되지 않게, 커피 씨앗을 뜨거운 물에 삶아서 보내거나, 불판에서 볶아서 보내었다.

유출을 막기 위해 불판에 볶았던 이것이 바로 오늘날 먹는 커피의 유래인 것이었다.

이 로스팅이 커피의 맛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었고, 보관도 더 쉽게 해주었기에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슬람의 성직자들도 생 열매를 먹기보다는 이렇게 불에 볶은 커피콩을 갈아 물에 타서 마시기 시작했고, 그것이 터키식 커피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뜨거운 물에 가루를 타 먹는 커피의 유래였다.

회교인의 후손이라는 석달래를 다시 에티오피아나 커피 거래를 독점하고 있는 모카로 보내 커피를 가져오게 하고 싶었다.

생두 열매나 묘목을 가져와서 중국 남부나 베트남, 대만에서 커피 농사도 하고 싶었다.

한 번 커피의 맛을 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출이 불법인 커피콩을 빼돌리다 석달래가 잡혀 죽을 수도 있었다.

내 만족을 위해 커피콩에 목숨을 걸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우연히 구해지는 게 아니라면 너무나도 먼 거리였고, 위험한 일이었다.

또, 커피나무 자체가 여러 조건이 맞아야 생육을 하는 까다로운 녀석이라 당장 먹을 식량도 부족한 판국에 커피 농사를 지으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그저 향신료처럼 이슬람인들에게 볶은 것을 사 먹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찻잎을 수확해서 찻잔 상자가 만들어지고 있으니, 그 찻잔 상자를 판 금액의 대부분을 이 가베 콩을 사는 데 쓰게.”

“그렇게나 많이 구매해 와야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많이 비쌀 거네. 구하기도 힘들 것이고."

“흠. 알겠습니다. 최대한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해보겠습니다.”

커피콩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앞으로 15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인도의 이슬람교 수도사 바바부단이 1600년경 메카로 성지 순례를 갔다가 커피 종자를 숨겨오고 그게 인도에서 재배가 성공하면서 커피가 제대로 알려지게 된다.

그 바바부단이란 수도사도 자기가 힘들게 가져온 만큼 커피콩 유출에 신경 썼는데, 동인도 회사의 네덜란드인들이 훔쳐내어 아시아와 남미에서 재배시키면서 전 세계적인 음료가 되는 것이었다.

원종은 터키식으로 마시고 남은 커피 가루를 다시 모아 아메리카노로 만들어 마시며 밤의 흥취에 빠졌고, 염호진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아 마누라를 들들 볶아 대었다.

무서운 커피의 위력이었다.

***

오늘도 아끼고 아낀 커피 가루를 뜨거운 물에 내려 마시고 있는데, 동래지점의 희재에게서 봉서가 왔다.

"봉서가 오면 왠지 무섭단 말이지."

그리고, 그런 예감처럼 봉서에는 발해방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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