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설탕의 왕. (3)
“고려 놈들이 우리말에 따라 기토마루의 병사들을 처리했다고 하더냐?"
“첩자가 술자리를 벌이고 술을 먹이는 것까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지낭인 자성의 말에 상선위는 기분이 좋았다.
"그럼 되었다. 설령 놈들이 병사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독한 술을 먹었다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무리 드센 고려 놈들이라고 해도, 기토마루의 병사들이 없다면 소수일 뿐이었다.
상선위는 물론이고, 자성도 자신들의 1500여 병사들을 보자 어깨에 기운이 들어갔다.
이미 밤에 피 맛을 본 병사들이라면 수적으로 5배 차이인 고려 놈들을 한 번에 쓸어 버릴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뜰 때 만나게 된 200여 남짓의 고려인들을 보자 그 적은 숫자에 안심했다.
진형을 따지지 않고, 그대로 돌격시키면 쉽게 이길 것이라 판단되었다.
"하하하. 고려 놈들이 기토마루의 병사들을 제대로 처리한 것 같군. 자성! 자네 같은 책략가를 만난 것이 나의 홍복일세!"
“과찬이십니다. 그럼 군사들을 진격시키겠습니다! 공격하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이는 살려주어라!"
상선위는 앞으로 나아가는 병사들과 기병 10여 기를 보자 당장 오늘 오후에라도 병석에 누워있는 형에게 왕좌를 이양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내가 왕이 될 것이다! 하하하."
[텅텅! 팡!파앙! 터엉!]
하지만, 대나무를 불에 태울 때 나는 터지는 소리가 나자 앞 열 병사들이 그대로 주저 앉아 버리는 것이 보였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동시에 땅에서 누가 잡아 당기는 것처럼 주저 앉아 버리자 상선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 저게 뭔가?"
명나라에서 온 자성도 저런 것은 처음 보았기에 답을 하지 못했고, 갑자기 일어난 변사에 놀라기만 할 뿐이었다.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자성도 놀라 급히 앞으로 말을 달려 나갔는데, 후방의 지휘관들이 이리 놀랄 정도이니 전방의 병사들은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병사들은 이미 설탕과 설탕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고, 고려인들을 모두 죽이면 안된다는 이야길 몇 번이나 들었다.
그리고 그런 지시 사항은 병사들의 전투력을 막아 세우는 악수(惡手)가 되었다.
전투에 대한 투쟁심이 줄어 든 병사들은 갑자기 주저 앉거나 픽 쓰러져 버린 동료들을 밟고 지나가야 할지 아니면 일으켜 세워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여윽시! 승선 총통이구만! 다들 뭣들 하는 것이냐? 공격이다!"
"우와! 가자앗!"
총통이 2개가 붙어 있는 중첩 승선 총통을 들고 있던 김수는 다시 얼른 화약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하하하. 다들 봤느냐! 이거 놀랍지 않으냐? 단 4명이 수십 명을 쓰러트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쏘게 되면 또 수십 명이다!"
김수의 말에 승선 총통을 함께 쏘았던 다른 3명도 얼른 화약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쥐똥 같은 납 환이 큰 위력이 있을까 싶었었다.
처음 김수가 이거 진짜 대단하다고! 자신만 믿으라고 하며 맨 앞에 설 때는 그래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니 그냥 같이 죽자 하는 마음으로 총통을 들었었다.
하지만, 실제 승선 총통을 쏘아보게 되니 그 위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텅텅하며 쏘아지는 수십 발의 납탄 세례에 3장이나 떨어져 있던 이들이 픽픽 쓰러졌으니 그 위력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얼른 재장전을 하고 김수를 따라 뛰었다.
***
전장에 도착한 자성은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갑자기 수십 명이 쓰러지며 피를 철철 흘리는 상황에 긴 칼을 빼든 고려인들이 달려드니 병사들은 기세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지 마라! 창을 들어라! 우리가 더 많다! 우리가 이기고 있다!"
[텅 터엉! 펑펑!]
말을 탄 자성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군세를 다시 이끌려고 했지만, 제대로 모이던 병사들이 대나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를 뿜어내며 쓰러져 버리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천벌이다! 천둥 신의 천벌이다!"
"조카를 죽인 것에 하늘이 노했다!"
거기다 미신을 믿는 자들이 하늘의 신벌이라고 주장하자 싸우려고 하는 자보다는 불안함에 뒤로 물러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와아!! 죽여라!!”
그리고, 측면의 사탕수수 밭에서 갑자기 수백 명이 쏟아져 나왔는데, 눈이 붉게 충혈된 자들이었다.
"자성님 기토마루의 병사들입니다! 피하십시오!"
기토마루의 병사들은 고려인들이 자신들을 한번 속였다는 것을 알고는 애초에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었다.
고려인들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인인 기토마루가 이미 죽었고, 다른 병사들도 다 죽었다는 것을 알자 자포자기로 술을 마시고 그 혈기로 뛰쳐나와 공격을 한 것이었다.
측면에서 수백 명이 나와 공격을 해대니 상선위의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병사들의 뒤를 기토마루의 병사들이 미친 듯이 따라붙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싸우던 병사들은 그들에게서 술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눈이 뒤집힌 놈들이다! 도망쳐! 천벌이 내린 거다!"
술과 전장의 광기에 취한 기토마루의 병사들은 한 시간 가까이 뒤 쫓으며 상선위의 병사들을 죽였는데, 1500명이 넘던 병사 중에 왕성이 있는 섬의 중부로 돌아간 자가 채 200명이 되지 못했다.
“지금 놈들의 뒤를 따라가서 숨통을 끊어놔야 하오. 그 상선위라는 놈을 그대로 놔두면 다시 군사를 모아 올 놈이오."
승선 총통과 기토마루의 병사들로 인해 실제 피해가 별로 없었기에 배일욱은 김수의 말을 따르도록 했다.
채 200명이 되지 않는 작은 숫자라는 게 부담 되었지만, 왕성이 있는 남부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설령 상선위를 죽이지 못하더라도 고려인들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뭔가 이상합니다! 왕성으로 향하는 곳곳에 싸운 흔적이 가득하고 죽은 이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정찰을 보낸 이가 돌아와 왕성 인근에 사람이 없고, 싸움 흔적이 가득하다고 하자 조심스레 왕성으로 움직였다.
왕성으로 통하는 성문이 불에 타 무너져 있었고, 여기저기에 피가 흐른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변고가 있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왕성을 지키는 병사들의 복장이 기존에 알던 옷이 아니었다.
“배 어르신! 이제 오십니까?”
우리가 온 것을 보고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간 이후 나온 이는 혈족이자 춘봉 상단의 상인이 된 케하루였다.
“어, 어찌 네가 거기에서 나온 것이냐?"
"하하하. 제가 대만국에 병사들을 요청하러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이틀 전에 남부에 도착했는데, 이미 기토마루를 죽이고, 상선위가 고려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소릴 듣고는 그대로 왕성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응? 하하하. 빈집을 털었다는 말이냐?"
“네. 왕의 동생인 상선위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기에 빈집을 아주 쉽게 털어 먹었습니다."
쉽게 빈집을 털어 먹었다고 했지만, 불타 무너진 성문이나 시체를 보니 그 전투의 치열함이 그려졌다.
"왕과 그의 동생 상선위는 어찌 되었나?"
“상선위가 패배하여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성을 점령한 이후라 성문 앞에서 싸워 다들
사로잡았습니다."
“그럼, 그 둘은 어찌 처리하기로 했지?"
"그건 안에서 이야기하시지요. 대만국의 왕이 직접 왔습니다. 대씨 성을 하사받은 대만국의 왕은 춘봉 상단의 형제들을 보고 싶어 합니다."
케하루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유구가 대만의 땅이 될 것 같았다.
배일욱과 김수를 비롯한 고려인들이 유구의 왕궁으로 들어가니 왕궁의 보물들이 마당으로 꺼내어 지고 있었다.
“이분이 대만국의 왕인 대(對) 시쭈꾸입니다.”
배일욱과 김수는 짙은 눈썹과 검은 피부를 보곤 바로 회교인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인사를 예를 차려 인사를 건네고, 김수를 통해 이야기를 했는데, 일이 기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깐 대만국의 왕은 저 보물들만 가져가면 된다고? 이 땅에 대해서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네. 이미 땅은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 같은 춘봉 상단의 사람과 가신들이 터를 잡고 있었으니 자신이 땅을 가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럼 다시 상씨들에게 왕좌를 주겠다고? 그건 안 되지!"
김수가 버럭하며 말도 안 된다고 나섰다.
“수야. 좀 가만히 있어봐라. 다시 상씨들에게 왕좌를 넘겨준다는 말이 아니잖느냐.”
“대만국의 왕이 떠나버리면 다시 상씨 놈들이 꿀렁거리며 나올 건데, 그게 그 말이지 않소."
“아니다. 대만국의 왕은 이 땅에 춘봉 상단의 사람들이 이미 터를 잡고 있으니 자기가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우리가 주인이라는 소리다."
"응? 그, 그게 그 말이오? 그럼...설마, 형님이 왕이 되려는 게요?"
"야이 미친놈아 이야길 끝까지 들으라고! 내가 아니라 상단주의 땅이기에 대만국의 왕이 물러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오오라! 전원종 상단주, 아니 왕원종 상단주의 땅으로 인정한다는 말이었구만. 그럼, 상단주를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상인 케하루도 그게 맞다고 이야길 했으나, 배일욱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보물만 챙겨서 돌아가겠다는 대만국의 왕을 좀 더 머물게 해야 했다.
지금은 상선위와 기토마루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질까 싶어 아지 (按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그 둘을 죽이고 굴러온 돌인 고려인들이 집권한다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토호들이 발호하지 않게 대만국의 왕이 머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각 지역의 아지들을 구워삶아 유구의 안정을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그 왕이 이곳에 없는 상단주라고 하면 과연 그들이 받아들일까하는 고민이 되었다.
그런 고민을 이야기하자, 대만왕은 쉽게 생각했다.
"유구의 왕을 죽이고 대부분의 병사를 두고 가겠다고 합니다. 내년 3월 해적들을 토벌할 시기까지만 병사들을 돌려보내 주면 된다고 합니다."
"허허, 이거 참."
"그리고, 왕이 없는 것은 별거 아니라고 합니다."
"그게 왜 별것이 아닌 건가?"
“이미 저 멀리 왜의 섬을 춘봉 상단에서 점령을 했는데, 거기에는 관리인을 두고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이 없는데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 되냐고? 주인이 없는데, 다들 그걸 받아들인다고?"
배일욱과 김수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대만의 왕인 대 시쭈꾸는 그런 그들이 더 이해 가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이들을 조선으로 한번 보내라고 합니다. 그 부유함과 많은 배와 선원들을 보면 무서워서 배반할 생각도 하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허허허. 이거 참. 믿을 수가 없구만."
배일욱은 대만의 왕인 시쭈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천명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달려와 준 왕의 말이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형님. 그냥 내년까지 병사들을 있게 해 준다고 하니 그사이에 우리 병사들을 키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반란하려는 아지들을 찍어 누를 수 있을 겁니다. 형님도 승선 총통의 위력을 봤지
않습니까? 한 10자루만 더 있으면 다른 아지 놈들은 다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 외에도 사탕수수를 나눠주고 키우게 하면 됩니다.
설탕과 설탕주를 만들어 제가 팔아 주게 된다면 자연스레 저들의 목줄을 우리가 잡고 있게 되는 겁니다."
김수의 말마따나 승선 총통이 더 있다면 병력이 비슷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거기다 구심점이 없어진 기토마루의 세력을 우리가 먼저 접수한다면 병력도 금세 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상선위가 가진 재산과 땅을 나눠주고 아지들을 모은다면 세력을 규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다. 그럼, 상단주님을 왕으로 모신다. 그리고 나와 김수, 케하루가 삼공(三公)이 되어 유구를 이끌도록 한다."
그렇게 유구에 새로운 세력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던 시쭈꾸는 왕조에 필요한 오래된 보물들을 챙겨가기 바빴다.
***
"아니 내가 왜 갑자기 왕이 된 건데."
날씨가 좋고, 역사적으로도 사탕수수 농업으로 크게 번영했다는 것을 알기에 사탕수수를 심어 설탕을 얻을 요량이었는데, 거기서 삼별초의 후예들을 만나고 쌈박질로 인해 내가 갑자기 왕이
되었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삼식 행수의 선단에 긴급서찰을 보내라. 승선 총통 20여 자루와 화약을 유구에 보내라고 전하고,
술병을 잔뜩 들고 가서 거기서 나는 설탕과 설탕주를 잔뜩 들고 오라고 해라.”
일이 이상하게 꼬여 내가 유구의 왕으로 이름이 올라갔지만, 그들이 이야기한 설탕주는 분명 럼주(rum) 일터였다.
생각지도 못한 교역 물품이 생겼고, 원양항해에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기에 활용해야 했다.
북방의 야인들에게 럼주를 팔고 어떤 걸 받아 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실제 해적들의 술이라는 럼주 (RUM)는 우연하게 만들어졌는데, 사탕수수 농업이 이루어지던 카리브해에서 널리 생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활동하던 해적들이 잘 활용했고, 영국이나 다른 열강들의 해군들도 대양 항해에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녔습니다.
보통 물통에 물을 싣고 가면 10일 지나면 이끼가 끼기 시작하고 20일이 지나면 그 물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원양 항해에 쓸 수 있게 물 대신 더 오래 가는 맥주를 싣었고, 와인이나 브랜디도 싣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맥주도 30일 이상 보관하기 힘들었고, 와인이나 브랜디는 비쌌기에 원재료가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인 사탕수수로 만든 럼주가 해군과 상선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한 뱃사람들은 술김에 더 잘 싸웠기에 해적들의 워너비 상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