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쉐프 조선을 부탁해-288화 (288/327)

288. 설탕의 왕. (2)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있는 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왕의 동생인 상선위 쪽에 붙기로 했지만, 김수와 다르게 배일욱은 상선위 쪽도 신뢰를 하지 않았다.

“상선위 쪽 사람들이 와서는 자신들은 그렇게 사탕수수밭을 빼앗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을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아지(토호)인 기토마루 또한 처음에는 땅을 빌려주며 서로 돕자고 했었지 않았는가.

생각이 가벼운 김수는 선상총통이라는 화포를 써볼 수 있겠다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배일욱은 오키나와 왕의 후계 문제에 끼어들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 아닌가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흠. 그럼, 조선에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선에?"

“정확히는 원종 상단주님께요. 저희야 이 좁은 섬에서만 살았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어찌할지 모르지만, 큰 경영을 하는 상단주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요?"

웬일로 옳은 말을 하는 김수의 대답에 배일욱은 무릎을 쳤다.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이나 외부에서의 도움으로 이런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만과 중국 남부로 갔던 상인 케하루도 도착했다고 하니 그쪽과 이야길 해봐야겠어."

“허허허. 그때가 와 버린 것이군요."

교역을 위해 대만에서 방금 돌아온 케하루는 배일욱에게서 지금 상황을 전해 듣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상단주님이 떠나실 때 이 서찰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원종이 남겨주고 갔다는 서찰을 펴서 보여주자, 배일욱은 입이 쩍 벌어졌다.

서찰에는 혹시나 사탕수수의 경작과 설탕의 생산에 문제가 생겨 싸울 일이 생긴다면 대만의 병사들을 불러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의 서찰은 대만국의 왕에게 병사를 요청하는 서찰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남중국해의 해적들을 토벌하고 빼앗은 무기를 녹이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것도 다 이런 일을 예상하셨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면, 케하루 자네가 얼른 대만국으로 가서 병력을 빌려오게 상선위 쪽 사람들이 기토마루를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를 칠 수도 있어. 그럴 때 대만의 병사들이 와 있다면 막아낼 수 있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우리가 대만국으로 도망쳐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최대한 배를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케하루가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대만국으로 떠났고, 배일욱은 혹시 있을지 모를 난리를 준비하기 위해 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는데, 젊은 애들이 술을 마셨는지 해롱거리는 놈들이 있었다.

"이놈! 술은 어디서 난 것이냐? 축제가 아니면 먹지 못하게 했을 터인데, 창고에서 빼 먹은 것이냐?"

비축해둔 물자를 빼먹었다는 생각에 배일욱이 화를 내려는데, 젊은이들은 그게 아니라고, 절대 창고에서 빼 먹지 않았다고 억울해했다.

"그럼, 어디서 곡식이 나서 술을 만들었다는 것이냐?"

"그것이 사탕수수에서 즙을 빼고 남은 수수가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소에게 먹이기 위해 잘게 잘라 큰 항아리에 넣어 두었는데, 그 항아리에 빗물이 들어가고 해서 그런지 항아리에서 술이

되었습니다."

"뭐어? 그게 말이 되느냐? 곡식 없이 술이 되다니! 만약 거짓이라면 경을 칠 줄 알아라.”

배일욱은 곡식이 아닌 사탕수수를 넣어둔 항아리에서 술이 만들어졌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해서 그 항아리를 직접 확인하러 갔는데, 진짜 알싸한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젊은이가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내밀었는데, 황토색의 액체에서 분명히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살짝 마셔보니 쌀에 누룩을 넣어 만드는 탁주와 비슷한 향이 났다.

“이럴 수가 진짜 술이구나. 곡식이나 과일이 아닌 다른 것으로 술이 만들어지다니. 다른 항아리도이렇느냐?”

“그것이 이 한 개뿐입니다. 소를 먹일 수수가지들을 넣어 둔 항아리에 뚜껑을 덮지 않은 것이 이 한 개뿐이었습니다."

"그럼, 실수로 뚜껑을 닫지 않아 빗물이 찼고 그게 술이 되었다는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요."

“허허 신기하구나. 그럼, 다른 항아리에도 물을 한번 넣어 보거라."

여러 개의 항아리에 물을 채워 넣었고, 이미 술이 되어있는 항아리에서 술을 떠서 넣어줬다.

그리고, 이들이 지나자 항아리들에서 거품이 일며 술이 만들어지는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일욱은 곡식 없이 설탕을 만들고 남은 사탕수수 찌꺼기로 술이 만들어지자 너무나 신기했다.

그냥 걸러서 마셔도 탁주와 비슷한 술기운이 났지만, 이것을 소주처럼 만들어 마실 수도 있는지 궁금했다.

원나라 때 탁주에서 소주를 만들어 내는 증류주 방법이 전해졌고, 술을 좋아하는 민족답게 이곳으로 도망쳐 오면서도 소줏고리를 들고 왔었다.

만약, 이 사탕수수 찌꺼기로 소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모래밭에서 산삼을 캐내는 일과 같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버리거나 소나 염소에게 먹이는 것이 전부였던 사탕수수의 찌꺼기가 술이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었다.

배일욱의 주도로 소줏고리가 걸리고,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태워 불을 지폈다.

술의 주정(酒精)은 물보다 끓는 점이 낮기에 불을 얼마 내지도 않았는데, 소줏고리에서 맑은 물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받아 색을 살펴보니 소주만큼 투명하지는 않았으나 노란빛이 도는 투명한 술이 만들어져 있었다.

한번 맛을 보니 독한 맛 속에 사탕수수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군내가 나는 술맛이 느껴졌다.

마시고 나서도 끝맛이 달콤하게 남는 것이 꽤 괜찮은 향을 가진 술이었다.

섬에서 주로 만들어 마시는 뱀술보다 더 맛이 좋았기에 이 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걸 단지에 담아두고, 한 번 더 증류해서 술의 도수를 올려 보아라."

한 번 증류한 술을 다시 증류하자 색이 좀 더 밝아졌는데, 도수가 확 올라서 그런지 한 잔만 마셔도 술에 취할 것 같았다.

“두 번 증류한 것과 한 번 증류한 것을 따로 담아 밀봉하거라."

소에게 먹이기 위해 잘라 두었던 사탕수수 찌꺼기가 많았고, 큰 항아리에서 발효되는 황토색의 탁주도 많았기에 며칠 동안 술을 만들어 내었다.

김수는 곡식을 쓰지 않고 이런 술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좋아했고, 배일욱도 이런 술이라면 섬 밖으로 팔 수도 있는 제대로 된 상품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이 술을 팔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뭘로 이름을 붙일까?"

“설탕주로 해야지. 끝맛이 달콤하게 남는 것이 갓 만들어진 설탕의 맛이잖나."

"하긴, 설탕주라고 해야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앞으로는 설탕주로 하고, 따로 계속 만들어야겠어.

진짜 저 사탕수수란 작물은 하늘이 내린 작물이로군. 술도 만들 수 있다니."

"이러면 술을 만든다고 곡식이 부족해지지는 않겠어. 곡식이 안 들어가는 소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하하”

김수는 홀짝거리며 술을 마셨는데, 비싼 곡식이 아닌 버려지는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것이라 부담 없이 들고 다니며 마셔대었다.

삼별초의 후예들이 사탕수수의 찌꺼기로 술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된 상선위의 지낭 '자성'은 이 술이야말로 일을 벌이기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탕주 100여 병을 사서는 상선위가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해서 아지인 기토마루에게 직접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과 몇 명이 방문하여 우호를 다지는 척 술판을 벌일 때 거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섬 남부에 있던 병사들을 섬 북부로 움직였는데, 겉으로는 삼별초의 후예들과 함께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핑계를 대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병사들을 동원할 정도로 설탕이 많이 나고, 신비한 맛의 설탕주가 만들어지니. 기토마루에게도 병사들을 사탕수수밭으로 보내 수확을 돕게 만들었다.

기토마루 측에서는 상선위에서도 병사를 내어 돕는다는 말을 곧게 믿고 절반의 병력을 사탕수수밭에 보내 일을 돕게 했다.

***

"그러니깐 이 술이 설탕으로 만든 설탕주란 말이오?"

"그러하오이다. 이제 우리 유구는 크게 부유해질 것이외다. 설탕이 나고 설탕주를 만들 수 있으니 이것들을 밖에 내다 팔면 그 부가 엄청날 것이외다."

후계 왕좌를 위한 경쟁자인 상선위 측에서 술을 들고 올 때는 은근히 경계를 했지만, 자성이 들고 온 설탕으로 만든 술을 먹어보자, 마음의 의심이 풀렸다.

섬에서 설탕주라는 특산물이 나오게 된 것을 서로 축하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설탕주라는 술은 그 맛이 독특하면서도 좋아서 다들 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술자리가 무르익어 독한 설탕주에 취한 이들이 많아지자, 술을 권하던 상선위의 사람들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멀리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음에도 술에 취한 자들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

"하하하! 묵가의 기만술은 참으로 뛰어나군, 설탕주를 빌미로 취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새로운 술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경계심을 풀어 버린 적들의 안일함이 자신들을 죽게 한 것입니다."

아지라 불리는 토호가 지역을 기반 삼아 정예병을 길렀더라도 그들을 움직여야 하는 우두머리들이 술에 취해 있다면 말짱 헛것이었다.

더구나 절반의 병력은 수확을 돕기 위해 외부로 나갔으니 수적으로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기토마루의 사병들은 술에 취한 우두머리들이 돌아오기도 전에 전멸을 해버렸고, 억지로 술을 깨고 나타나는 자들은 상선위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제 형님에게 간다. 상씨 왕좌를 나에게 이양하라고 할 것이다.”

“전하 그 전에 해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뭔가?”

“고려 사람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설탕을 만드는 그들을 그들을 다 죽여 버리면 손해이지 않은가?"

“맞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만 죽이고 강제로 혼인을 시켜 동화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토마루가 없는 북쪽에서 실권을 잡게 될 겁니다."

“그들도 타지에서 온 자들인데, 북쪽의 사람들이 그들을 따를까?”

“설탕과 설탕주로 부를 늘려간다면 북쪽의 사람들은 다들 고려에서 온 자들을 따르게 될 겁니다..그렇게 힘을 기른 자들은 우리를 잡아먹을지도 모릅니다.”

“흠. 그렇게 된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들을 치게 되면 너무 야비하지 않은가."

“전하. 왕은 그런 야비함을 가져야 하옵니다."

상선위는 묵가의 맥을 이은 자성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따랐기에 지금처럼 기토마루를 토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형님 큰일입니다!"

김수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올 때는 진짜 큰일이 터진 거라는 생각에 배일도 바로 움직였다.

“상선위가 배신한 건가?"

“맞소. 남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오고 있수다."

"역시, 준비하길 잘했군. 기토마루 측에서 보낸 병사들은 어찌하고 있지? 술을 먹였느냐?"

"그 중국에서 배워 왔다는 자성이란 놈이 병사들을 술을 먹여 재우고 다 죽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수다. 적당하게 먹게 했고, 정신을 잃은 이는 없소."

"잘되었군. 그들을 앞장세우고, 뒤를 우리가 받치는 것으로 해서 싸움을 준비하자. 대만국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느냐?"

“내일쯤 도착한다고 했는데, 대만 국의 병사들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수.”

“상단주가 미리 알려주었지만, 때가 맞지 않은 것이군."

“그리고, 앞에는 내가 설 거요. 선상총통이라는 걸 진짜 제대로 써보고 싶소."

“위험하다. 다른 이에게 쓰게 해라. 제 죽을 자리를 모른다고 하는 꼴이 바로 네 놈꼴이다.”

“그러면 내가 재미가 없소. 내가 꼭 이 선상총통을 써보고 싶소."

총통이라는 것을 직접 써보겠다고 앞장선다는 김수를 말렸지만, 마치 제 죽을 자리라는 듯이 앞장서겠다고 하자 배일욱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배일욱은 김수가 앞장서 싸우다 죽으려고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부족한 군세의 기세를 올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말로 들려 눈물이 앞을 가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