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화폐개혁?
"소인은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사옵니다. 옆의 춘봉 상단에서 40여 척의 배를 운용하였음에도
사고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배가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 여겼사옵니다."
정전에 끌려 나온 최홍서는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天災)에 의한 사고라고 고의가 아닌 점을 강조했다.
"너는 천재에 의한 일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고 했지만, 이익이 나지 않으면 교환권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교환권 뒤에 쓰인 글귀를 읽어보라.”
성종은 내관에게 이익금 교환권의 뒷면을 들게 하여 읽게 했다.
“...교역선에 대한 이익금이 발생해야 그 이익에 대한 가치를 인정해 주며, 이익금이 없으면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그럼, 내 한번 물어 보겠다. 만약에 말이다. 교역선이 교역을 하기 위해 출항을 하였으나, 고의로 이익을 내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냥 이 교환권의 이익을 다 먹는 것이 아니냐."
성종은 이익금 교환권이 가지는 약점을 바로 잡아낸 것이었다.
“저, 전하 그것이...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말라카로 가는 길에 운이 없어 해적에게 당한 것이옵니다. 절대 고의가 아니옵니다."
최홍서는 다음 교역선을 띄울 때 진짜 이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을 권하필과 이야기했었기에 괜히 켕겼다.
“이 교환권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위험하구나. 고의와 저의 그리고 우연이 모두 다 연관이 되는 것이 교역인데, 그것을 확인할 방도도 없이 사실상 상인들의 행동에 목을 매는 것이구나. 헌데 그 상인이 나쁜 자라면 어찌 되겠느냐?"
"사기를 치려고 할 것입니다."
원종이 옆에서 거들었다.
“맞다. 그저 배를 멀리 대어두었다가 다시 오게 만들면 이익금 교환권에서 생기는 수익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기막힌 사기가 아니더냐?"
나름대로 사가에서 살았고, 대군 시절 한양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상행위하는 것을 보았던
성종이었다.
해서 상인들의 물욕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최홍서라는 작자가 절대 그럴 일은 없다고 이야길 했으나, 속이 검은 상인의 탐욕이라면 이익금 교환권을 팔고, 배는 다른 곳에 있다 오기나 아예 배를 팔아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손쉬운 사기 수법이구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소신은 사기를 치지 않았사옵니다.”
"그래? 그럼, 일반 교환권은 잘 관리가 되고 있느냐? 한양 전장에 지급보증을 위해 은(銀)이 제대로 보관되어 있느냐?"
“일반 교환권에 대한 은(銀)은 발행한 수량에 맞게 잘 보관되어 있사옵니다."
“헌데, 왜 춘봉 상단에는 은이 아니라 현물로 주었느냐? 그것도 1할 3푼의 현물을 더
얹어주었다고 하던데. 보관된 은이 없으니 현물로 주고 더 얹어 준 것이 아니더냐?"
최홍서는 옆에 같이 나와 있는 전원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이미 성종이 알고 있고, 그렇게 거래했다는 자료가 있으니 부인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은이 부족하여..."
"갈! 교환권의 발행 정관에 분명 쓰여있지 않으냐. 발행한 교환권만큼의 은을 상시 보관한다고. 그것이 교환권의 신뢰인데 그것을 어기고 유용한 것이냐?"
"그...그것이 아니오라."
"보관해야 하는 은을 주머니 속 돈처럼 사용했다면 교환권을 은에 맞게 제대로 발행했는지도 의문스럽구나. 선전관은 이리 오라."
"네, 하명하소서."
“당장 한양 전장으로 달려가 교환권을 발행할 때 썼던 장부나 인쇄에 들어간 비단 수량을
명시해둔 장부를 가져오거라."
최홍서는 아직 어리게만 보이던 성종이 이리 교환권 발행에 대해 잘 알자 의아했다.
아무리, 야밤에 궐을 나와 교환권을 쓰며 풍류를 즐겼다고 하더라도, 이리 자세히 아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필시, 저 춘봉 상단의 저놈이 농간을 친 것이구나.'
최홍서는 머리를 굴리며 빠져나갈 방도를 찾는데, 방법이 없었다.
분명 교환권을 찍을 때 쓴 촉금 비단의 수량을 계산하면 교환권 규모를 바로 알 수 있을 터였다.
선전관은 잠시 후 돌아와 장부를 내밀었다.
"허허허. 내 이럴 줄 알았느니라. 8천 냥의 발행권을 찍어 낸다고 했는데, 사용된 촉금의 비단 양을 보면 1만 5천 냥을 찍었구나."
"아, 아니옵니다. 전하. 그건 인쇄할 때 불량이 나와 그런 것이옵니다."
"그 비싼 촉금을 2배나 쓰면서 불량을 찍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럼 그때 기술자를 데려와 확인하면 되겠구나. 이 자리에서 거짓을 고하는 것이 어떤 중벌을 받게 되는지 잘 알고 있으렷다?"
성종의 말처럼 인쇄를 담당한 기술자를 데리고 오면 모든 것이 들통날 것이 뻔했다.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소인이 욕심이 과하였나이다. 허나, 저희 인쇄를 맡았던 이는 춘봉 상단의 인쇄도 하였던 자이옵니다. 저희뿐만 아니라 춘봉 상단도 공시한 것보다 많이 발행을 했을 것이옵니다."
최홍서는 혼자 뒤집어쓰면 목이 달아나지만, 다른 이와 함께 죄를 공동으로 쓰게 되면 감형이 될 것으로 생각해서 물귀신 작전으로 나왔다.
"하하. 영의정의 말이 딱 맞구랴. 추궁을 하면 다른 상단을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말. 상선은
장부를 보여주어라."
상선은 최홍서의 앞에 장부를 내려놓았는데, 춘봉 상단의 장부였다.
“교환권으로 인해 도성의 상거래 혼란이 극에 달한다고 하여 이미 춘봉 상단과 너희 상단에 대한 조사를 다 하였느니라.”
조사를 이미 다 했다는 말에 최홍서는 말도 나오지 않고, 침만 삼킬 뿐이었다.
"춘봉 상단은 아예 금과 은을 전장 건물 중앙에 두고 유리로 만든 투명한 뚜껑을 씌어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은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선전관이 직접 가서 그 은과 금을 보았고, 발행할 때마다 꼼꼼히 사용된 비단과 수량을 표시하였다.”
다시 상선이 책을 내려놓았는데, 한양 전장의 장부들이었다.
“헌데, 너희들의 발행목록에는 아예 추가로 발행했다는 내역 자체가 없더구나.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리고, 보관된 은도 발행권보다 더 적더구나. 이것은 교환권을 사용하는 자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더냐."
이미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에 최홍서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부인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전하. 저도 속은 것이옵니다. 발행기술자라는 권항필에게 속은 것이옵니다. 그리고, 장부보다 더 많이 발행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하도록 하겠나이다."
최홍서는 물귀신 작전이 되지 않으니 죄를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고 반성의 의미로 교환권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
"일반 교환권은 그렇게 보상이 되겠으나, 이익금 교환권에 대한 보상은 어찌하겠는가? 결국 이 이익금 교환권도 속여서 판매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그것은... 소인의 재산을 다 처분하여도 3만 냥을 어찌할 수가 없사옵니다."
“한양 전장을 실제로 설립한 경상들이 연대 책임을 져야 하겠지. 헌데 이상하군. 교환권은 말 그대로 교환권이다. 3만냥 치를 팔았다고 하면 그 3만 냥 치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게 있는데 어찌 환불할 수 없다는 말이냐?”
"맞사옵니다. 3만 냥 치의 교환권을 팔고 받은 현물이나 곡식을 융통하여 또 이익을 만들어 냈을 것이니 3만냥에서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흠. 같은 전장을 운영하는 전 도정의 이야기이니 이것이 맞겠지. 그 수익까진 뭐라고 하지 않겠다. 이익금 교환권에 대한 것은 모두 다 환불을 하도록 하라.”
"저...전하..."
“더해서 백성들을 속인 죄가 있으니 한양 전장과 그 주축이 된 경상들은 앞으로 교환권을
발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속임수로 이익을 쉽게 벌 수 있는 교역 이익금에 대한 교환권은 발행 자체를 금하도록 하겠다. 춘봉 상단은 불만이 없는가?"
"영민하신 전하의 판단에 두 손 들어 환영을 하는 바이옵니다. 실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상 수익을 걸고 발행하는 모든 교환권은 발행을 하지 말아야 하옵니다."
"옳다. 언제든지 보상을 할 수 있는 금과 은을 지급보증으로 들고 있지 않은 한 모든 교환권은
발행을 중지할 것이며, 앞으로 교환권을 발행하고 싶은 상단은 호조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성종의 어명이 떨어지고, 이것이 실록에 쓰여 명문화된 법이 되자 원종은 기쁨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순한 교환권 발행의 허가제로 보이는 이 어명은 사실상 다른 상단이나 전장에서 교환권을 발행하지 못하게 막는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나라의 기축통화로 춘봉 전장에서 발행한 교환권만 인정해 주겠다는 뜻으로도 확대 해석이 가능했다.
왜냐면 한명회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른 전장이 발행 신청을 해도 해주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되고, 그 유통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전장에서는 발행할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조정도 춘봉 상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었다.
조정에서도 돈을 써야 할 때 우리의 교환권을 발행해서 가져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춘봉 상단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처럼 나라에 돈을 빌려주고 통화관리를 해주는 나라 위의 기관화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오늘의 이 일로 첫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조에서는 직접 나가 일반 교환권 1만5천 냥과 이익금 교환권 3만 냥이 제대로 환불이
되었는지 살피도록 하라.”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백미 2 섬이 은 1냥인데, 백미 3섬을 은 1냥 가격으로
책정하다니요."
"그래? 춘봉 상단은 백미 2 섬을 은 1냥에 구매할 것이오?"
“저희는 비싸서 그렇게 구매하지 못합니다."
"그럼, 만상은 어떠하오?"
“저희 만상도 은 1냥에 백미 3섬이면 사겠지만, 은 1냥에 2섬이면 살 이유가 없지요. 비쌉니다요."
"보게나. 지금 시세가 은 1냥에 백미 3섬 아닌가."
“아...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가격추정을 하는 것이 불만이면 직접 나가서 내일까지 은 1냥에 백미 2섬으로 해서
400섬을 다 팔아 오게."
"어찌 하루 만에 그리 팔 수 있겠습니까요. 사정을 봐주십시오."
"그래? 춘상이나 만상은 은 1냥에 백미 3섬이면 내일까지 다 팔아 올 수 있겠나?"
"물론입지요. 날짜가 정해져 있다면 어느 정도는 손해를 보고 팔 수밖에 없는 것이 상행
아니겠습니까요."
한양 전장의 창고 담당 행수는 속이 터저 나갈 것 같았다.
호조에서 나온 관리는 노골적으로 시세를 낮게 만들어 현물을 처리하고 있었고, 춘봉 상단과
만상은 가만히 있으면 더 가격이 낮아지니 가격이 비싸다고 배짱을 튕기며 매집을 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양 전장과 경상의 창고에는 몇만 냥의 현물이 쌓여 있었지만, 교환권의 환불을 위해 급히 다 팔아야 한다는 이유로 헐값에 물건들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소. 그건 2배는 받아야 하는 유기요!"
경상의 행수들은 눈물을 보이며 팔려나가는 것을 막아보려 했으나, 갑사들이 저지했다.
호조에서 나온 관리들은 양반이라 상거래를 하지 않았고, 데리고 온 갑사들은 상거래에 익숙하지 못했다.
해서 춘봉 상단과 만상의 사람들이 대행을 해서 물건들을 교환권으로 환불해 주었는데, 자기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교환을 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몇만 냥의 물건이 환불 처리되며 쓸려나갔으나 아직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어 교환권을 내밀었기에 호조에서는 최홍서의 집과 전답까지 공매 처리해 은을 마련했고, 그의 재산이 떨어지자 전장에 출자를 많이 한 경상의 상인들이 들고 있는 재산을 공매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공매 처리를 담당하는 호조의 관원들은 쉽게 은으로 결제를 하는 춘봉 상단에게 상가나
전답을 넘겨주었다.
공매로 나온 상가와 전답을 춘봉 상단이 싹쓸이하다시피 챙겼다.
"허허. 천하제일 거부라고 하더니 정말 춘봉 상단에는 돈이 많구랴.”
"그러게. 한양 전장과 경상 상인들의 전답, 상가가 나오는 족족 다 사버리니 그 부가 참으로 어마어마하네."
공매 처리되는 경상의 상가를 구매하려고 했던 다른 이들은 춘봉 상단의 부유함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여기에는 꼼수가 숨어 있었다.
공매 처리되는 물건을 은으로 구매를 하면 그 은은 호조를 통해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조정에서는 다시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그 은으로 춘봉 상단의 교환권을 구매하였으니 거래에 사용되었던 은은 쳇바퀴 돌듯이 돌아 다시 춘봉 상단으로 오는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의 눈에는 춘봉 상단에서 은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으로 보였다.
"교환권에 호의적이신 전하와 영의정 어르신이 힘을 써주신 덕에 앞으로 녹봉도 우리의 교환권으로 지급되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리고 부산의 희재 행수에게서 급하게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